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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보담론과 개혁담론의 화해를 위해

조회 수 2311 추천 수 0 2005.01.05 15:12:00
입대가 코앞이었다. 진보누리와 폴리티즌에 올린 글. '어설픈 지젝주의자'의 망령이 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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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라는 단어

노무현 정권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구체적 정책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좌파'들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하지 말고,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자."는 식의 요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실상 그들의 요구는 '구체적 정책'에서 '정권의 성격'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는 방패일 뿐이다. '좌파'들이 아무리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을 들어 비판해도 노무현 정권이 '개혁'이라는 그들의 주관적인 '느낌'을 깨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체적 정책'으로 말을 시작하지만 '개혁'이라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 자신의 신념체계를 합리화하며, '좌파'를 비판하며 말을 맺는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구체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개혁'이라는 낱말을 처음부터 '실체'와 상관없이 남발되는 이데올로기적 술어로 생각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3년 전쯤의 나는 명백히 그렇지 않았고, 당시의 판단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가령 김규항처럼 "개혁이란 건 원래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개혁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조차도 자본주의의 몰락을 지연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며, 우리가 '어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지, (혹은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것도 단어의 의미와 그에 따른 가치평가로 재단되어야 하는 어휘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용의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어휘다. 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숨겨진 목표다..."라는 김규항의 현실진단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나는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이며, 다른 식의 '개혁'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개혁을 모토로 삼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평가하기 위해 특정한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한 평가조차도 진보담론과 개혁담론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 형평성을 잃고 좌초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관념좌파와 노빠 사이

순전히 관념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노빠'라든가 '관념좌파'와 같은 경멸어는 (다른 단어라도 괜찮다.) 결코 타자를 지시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일관성을 흩트리는 불쾌한 대상을 회피하는 주체의 방식이다. 말하자면, '노빠'들에겐 좌파들이 관념적이어야 이 세상이 살만한 것이며, '관념좌파'들에겐 노무현 지지자가 광신적인 인물론자 일 때에 이 세상이 견딜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만일 노빠나 관념좌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 선택에서 충분한 쾌락을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사용되는 경멸어는 그들이 얻는 쾌락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관념좌파에겐, 개혁적 우파라는 포지션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서 그들은 개혁을 말하는 이들의 노선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개인적 능력에 기댄 인물론이라고 판단한다. 인물이 구조를 거부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므로, 그 노선의 미래는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경멸어가 '김대중 광신도'와 '노빠'처럼 '인물'에 대한 광신성에 연유함은 그 때문이다. 실패할 것이 실패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를 저지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 점은 그들의 정치평론을 빈곤하게 만든다. 이러저러한 욕망을 가진 이들이 모두 민주노동당에 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가령 '자유주의 개혁'을 하면서 진보적 의제를 상정하고 실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는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신뢰를 깎는 일이다.    
  
반면 노빠에겐, 합리적 보수세력에 대한 사회의 필요성이 곧바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정당성의 논거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에겐 열린우리당이 추구해야할 노선에 대한 지지가 열린우리당의 행위에 대한 지지로 전환된다. 최장집이나 박명림 등의 지식인이 열린우리당 지지자라고 말하는 노빠의 심리는 정확히 그것이다. 사실 최장집이나 박명림은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지지자이며, 어떤 노빠들처럼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지지하는 것은 열린우리당이 추구해야할 노선이지 열린우리당의 행위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열린우리당이 지금껏 한 행위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노빠는 이 점에 대해 애써 침묵한다. 노무현에 대한 공격을 자유주의적 개혁 노선에 대한 공격과 등치시킨다. 결과적으로 노정권을 비판하는 이들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며, 그에 합당한 경멸어는 '관념좌파'가 된다.

관념좌파와 노빠가 의사소통에 성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상의 논쟁이 결론이 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소통은 그들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들의 관념은 일관성 있고 폐쇄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는 방식에서 '일관성 상실'을 보고 그 점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폐쇄성이 하나의 현실이라면, 일관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좌파의 일관성은 노빠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열우당 지지자의 일관성은 관념좌파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념좌파와 노빠의 관계를 다소나마 참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척 애를 써서 그들의 관념 바깥에 있는 실재(real)를 지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는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양자의 관념이 실패하는 부분에서 그 징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소통의 접점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당 지지자의 명확히 드러난 편견을 통해 소통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민주노동당 지지자의 편견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래로 "경쟁대상과 극복대상을 구분해야 한다."(홍세화, 2000)는 주문을 받아왔다.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권영길이 이회창보다 김대중을 강도높게 비판한 것은 오류라는 지적도 있었다.(강준만, 1999?)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좌파들이 IMF이후 직접적인 노동계급의 억압자로 부상한 김대중 정권을 인정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극우 헤게모니는 이미 깨졌다."(주대환, 2001)라는 잘못된 인식마저 표면에 부상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대해 처음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권영길 후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는 '김대중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를 민주노동당이 채택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던 사람이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다른 점인데, 민주노동당은 당론의 차원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던 적은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조직체계가 엄밀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깃발과 함께 김대중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를 보았다는 몇몇 이들의 진술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권영길 후보의 차별화를 도식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통일문제에 대해선 대립된다. 그리고 그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의 편이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있어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거의) 동일하다." "김대중은 당선되어야 했고, 노무현도 당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의 거리보다 노무현과 권영길 사이의 거리가 훨씬 크다."

이것은 강준만과 그 지지자들(나도 그중 하나였다.)이 주장했던 '두 개의 전선'론, 즉 극우 대 반극우의 전선과 보수 대 진보의 전선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민주노동당식의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노동당 내의 역학관계가 반영된 '주체적인' 수용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통일운동에 치중하는 NL진영이 김대중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 있다는 것을 민주노동당이 인정한 것이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면 NL은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좌파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파적인 이중잣대가 민주노동당에 내재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실용적이고 단순한 결론이었던 것만큼 폐해도 컸다. 가령 우리는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좌파적 시각의 비평이 필요한 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민족적 감성에 의한 남북화해 모드가 남한 자본가의 이윤추구와 결합할 때, 북한 민중을 수탈하는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은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역할은 개성공단의 냄비가 성배과 같은 상징성을 획득해야 한다(김정란, 2004)는 관점을 넘어, 북한 노동자들의 터무니없는 저임금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나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의 비평은 당내외에서 슬슬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의 관심사에 끼지 못한다. 통일문제는 기본적으로 보수정당의 일이요, 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그들을 지지하고 더욱 급진적으로 투쟁하는 NL의 일이기 때문에, 좌파들의 의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틀 자체가 잘못 짜여져 있기 때문에, 만일 어떤 좌파가 집권당의 통일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일말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반면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일말의 긍정성도 보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적으로 실시하는 정권의 경제정책을 우호적으로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의 '조류'와 개별적인 경제정책은 다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신자유주의자도 없기 때문에, 정권의 경제정책은 여러 가지 조류가 혼합된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제정책 중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유리한 것을 골라내어 상대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유권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이 수권정당으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집권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또한 집권당의 경제정책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는 오히려 과잉된 개혁담론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가령 김대중 정권의 개혁정책들을 생각해 보자. 나는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통일부문만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 4대보험 확대와 각종 사회보장 법률 정립 등은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할 부분이고, 그 와중에서 한나라당으로부터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말도 안 되는 폭언까지 들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도 정립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현실적인 간극이 있다. 4대보험 확대는 정규직 중심의 노동환경에 어울리는 사회안전망으로 비정규직이 확대되던 당시의 현실과 어긋나고, 공적부조 관련 법률의 정비는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최저생계비 때문에 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 경우 좌파들이 할 일은 오히려 법률적인 정비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그러나 그것의 현실적 효과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보수정당의 개혁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좌파들이 이런 커다란 맥락을 생각하고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신자유주의'라고 칭했을 테지만, 그런 식의 뭉뚱그린 평가는 세밀한 평가보다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는 행정수도 문제에서 민주노동당이 전술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행정수도 문제는 찬성측을 지역분권론자, 반대측을 서울패권론자로 몰아가는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폭력적인 이분법은 찬반에 포섭되지 않는 여러 입장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그 이분법의 구도에서 굳이 반대입장을 표명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당론은 찬성으로도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원칙을 떠난 전술의 차원에서, 담론적으로 지역분권론을 옹호하는 찬성측이 입장에 서는 것이 훨씬 좋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게 아니라 원칙을 견지하고 싶었다면 '민주노동당의 당론은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며 애초부터 찬반론 중 어느 쪽에도 포섭되지 않음을 천명하는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최근 국보법 철폐 투쟁을 둘러싼 민주노동당내의 논쟁을 대중정당 vs 계급정당의 대립구도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것은 민주노동당 자신의 책임이다. 반극우와 반보수의 '두 개의 전선'을 흡수하면서 전자를 통일문제, 후자를 경제문제에 고착시켜놓은 까닭에, 통일문제를 중시하는 쪽이 언제나 전체 한국 사회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는 '대중적인' 집단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어적 혼란에 의한 착시현상일 뿐이다. 민주노동당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지, 통일문제라는 특정 국면에 당을 밀착시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통일문제와 경제문제의 이분법을 벗어나 노무현 정권의 '개혁'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할 때, 민주노동당은 비로소 해묵은 2중대 논란에서 벗어나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의 편견

개혁담론에 대한 가장 간단한 도식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제공했다. 2002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노무현 후보는 권영길 후보에게 말했다. "열발자국이 목표일지라도 세발자국이라도 먼저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권순옥이 최근 노무현 정권을 옹호하면서 다시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세발자국-열발자국 담화엔 일종의 전제가 깔려 있다. 첫 번째 전제는 물론 수량적인 것으로, 노무현 정권의 개혁정책이 민주노동당의 진보입법의 3/10 정도의 효과는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두 개의 법안이 동일한 사회를 지향하는 일직선상에 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정치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황망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급진적 열린우리당주의자'라는 얘기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진보든 개혁이든 어차피 사람들 골고루 잘 살자고 하는 얘기"라는 순진한 의식이 깔려 있다. 그건 물론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한가지 더 지당한 말씀을 하자면,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도 사람 골고루 잘 살지 말자고 얘기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요점은 기업이 하자는 대로, 그리고 국가가 동원하는 대로 따르면 온 국민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념은 '좋은 것'에 도달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 그 '좋은 것'을 거부하는 경우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진보와 개혁이 일직선상의 목표라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얘기인지 알 수 있다. 그게 옳다면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도 일직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입법부를 선출할 필요없이 (즉 정당정치 없이) 투표를 통해 행정부만 선출해도 충분히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대환은 2001년 강준만과의 비판적지지 논쟁에서 노무현과 민주노동당의 길이 같지 않다는 점을 "권영길은 유럽으로 가자는 것이고 노무현은 미국으로 가자는 것이다."라는 말로 간결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사회민주주의자 주대환의 주장을 민주노동당내의 어떤 좌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민주노동당의 길과 노무현의 길이 같은 여정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민주노동당의 길과 노무현의 길이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민주노동당과 노무현의 노선 논쟁이 노무현 지지자의 생각처럼 성급한 10/10과 꾸준한 3/10 간의 이상 vs 현실 논쟁으로 치환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최근 흥미롭게 읽은 관점하나를 소개해야겠다. 양재진에 의하면, 세계화와 탈산업화된 현대사회의 국가는 건전재정, 소득평등, 고용증대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고, 잘해봐야 그중 두 가지만 달성할 수 있는 트릴레마(trilemma)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럭저럭 성공한 국가의 선택은 세 가지로 갈릴 수 있다.

첫째는, 소득평등을 희생하면서 건전재정과 고용증대를 추구하는 영미 자유주의 모형
둘째는, 건전재정보다는 소득평등과 고용증대를 우선시하는 북유럽의 사민주의 모형
셋째는, 건전재정과 소득평등에 대한 강조로 고용이 희생되는 유럽대륙형 기독교 민주주의 모형

이다. (당대비평26호에서 재인용) 이 말이 옳다면 문제는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비전과 그에 대한 실천과정에 있지, 일직선상의 세발자국-열발자국 담화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양재진은 김대중 정권의 경우 저 세 가지 목표를 다 추구하려다가 이도 저도 되지 않은 면이 있다고 말한다. 좀더 김대중 정권을 위해 말한다면, IMF에 의해 영미 자유주의 모형이 사실상 강요된 상황에서 나머지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구책을 강구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노무현 정권의 토대는 IMF와 김종필에 의해 발목잡히던 김대중 정권에 비하면 월등히 좋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가?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이념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시대착오적"이란 말을 반복하는 노빠들이 있는 형편이나, 가령 유럽에서 말하는 제3의 길, 혹은 2와 1/2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특정한 기준에 의한 좌표축에서 특정한 위치를 점유하겠다는 의지이지 무원칙성을 제도화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아예 자신의 노선을 (무엇을 하든) '현실'로 자리매김하고 좌파의 노선을 (무엇을 하든) '이상'으로 치환하다보니 원가연동제가 분양가 원가공개보다 친시장적인 정책이라는 코메디 같은 주장이 나온다. 지금의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결정하는 요소는 정치적 저항에 대한 판단이지 어떤 노선에 대한 지향은 아니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에서 방향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박명림이나 최장집 등도 한다.  

4대 개혁입법은 법안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몰입하면서 다른 부분이 소홀해 지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최장집의 지적처럼 노무현 정권의 개혁의제는 인권이나 과거사 문제 등에 집중되어 있다. 한나라당이 민생을 말하는 것이 오류라기보다는, 노무현 정권이 경제문제를 핵심적인 의제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단기간에 집중해서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도 2004년 연말의 두루뭉실 야합 앞에서는 힘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열린우리당이 4대 개혁입법을 조속히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처리한 이후엔 다른 무슨 '개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열린우리당이 더 이상 개혁법안을 만들 의사와 능력이 없다면, 개혁입법 처리의 연기는 개혁을 원하는 이들을 지지자로 묶어놓기 위한 훌륭한 술책이다. 한나라당 역시 지지자를 결속시키는 이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몇몇 프로젝트로 개혁성을 검증받을 수 있다면, 이명박이 노무현 지지자들로부터 비판받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명박은 노무현식 개혁과 모종의 동질성을 보여주기에 그토록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은 스케일의 크기는 차치하더라도 그 취지의 타당성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꿀릴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한 환경주의자의 반발은 의미있는 세걸음을 방해하는 조급한 열걸음쟁이들의 술책이 아닌가?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사업의 원전재검토를 요구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청계천 복원은 시장의 공약이고, 그래서 이미 서울 시민들로부터 동의를 구한 것이기 때문에 사업철회를 요구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버스노선 개편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아무리 갈아타도 거리에 비례해서 요금을 산정하게 하자는 합리적인 취지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명박의 모든 행위가 강남부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공희준류의 푸념은 적어도 이 지점에서는 마타도어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취지가 꽤 성공적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의 혼란을 두고 시민단체와 민주노총 산하 일부 단체들은 서울시장 퇴진운동을 벌이지 않았던가? 이명박이 한나라당 출신이 아니라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소위 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노무현과 이명박을 바라보는 잣대는 공평한 것이었을까? 나는 이명박에 대한 혐오가 노무현 지지자로서는 걸맞지 않는 감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지자들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버스노선 개편을 성공한 개혁의 사례로 추켜올린바 있다.  


결미

결국 양 지지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비평 잣대의 보편화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통일문제나 경제문제를 가르는 이중잣대의 비평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최근 국보법 철폐 투쟁문제 등에서 드러난 당내 분란을 실천적으로 형해화시킬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서 정당정치의 한축을 맡아야 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끔은 좌파 정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다른 한 축을 맡아야 할 바람직한 우파정당의 관점에서 다른 당의 정책을 평가해줘야 할 것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도 비평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말 그대로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으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그 잘못된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좌파들의 비평보다는 (보아봤자 '이상적이군.'이라고 투덜거릴게 뻔하니까) 오히려 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비평을 정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장집, 박명림, 그리고 강준만 등이 노무현 정권에 필요한 고언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지지자들은 막연히 우리편이라고 느끼는 이들의 비평에 대해선 유리한 말만 골라듣는 습관이 들어버린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좌파적 비판의 이상성을 씹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일단 당신들이 인정하는 같은 노선의 비평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진보담론과 개혁담론은 향후에도 약간의 세월동안 영향을 발휘할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한다. 비록 양자의 영역이 어느 정도 중첩되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경쟁적이고 배척적인 관계가 성립할지라도, 우리는 양자의 편견을 주시하면서 끊임없이 '비교적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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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교육정책에 대하여 하뉴녕 2005-01-12 964
170 시뮬라시옹 : 한계가 뚜렷한, 그러나 의의는 있는 하뉴녕 2005-01-10 1176
169 라캉과 정신의학 : 임상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라캉 하뉴녕 2005-01-08 3243
168 서양 윤리학사 : 윤리학 입문 뿐 아니라 철학 입문에도 좋은 교양도서 [1] 하뉴녕 2005-01-08 2551
167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욕망의 위험성 [1] 하뉴녕 2005-01-07 1129
166 상무게임단에 관한 생각 하뉴녕 2005-01-05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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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폴리티즌 선정 10대뉴스 4) 하뉴녕 2004-12-31 1022
163 박경순과 '국보법 올인론자'들에게 하뉴녕 2004-12-28 3418
162 국보법 폐지와 민주노동당 하뉴녕 2004-12-26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