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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폐지와 민주노동당

조회 수 2023 추천 수 0 2004.12.26 15:55:00
진보누리에 실명으로 올린 글이다. 민주노동당 내 논쟁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중후반부에 나오는 '민생'이나 '국민'의 개념에 대한 분석이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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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에 대한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입장은 각각 완전폐지, 폐지 후 형법보완, 국가보안법 수정이다. 민주노동당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형법의 내란죄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사상의 자유'의 원칙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한때는 '국가안전보장특별법'이라는 대체법안을 발의할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폐지는 하되 내란죄 안에 '내란목적단체' 조항을 신설하겠다고 한다. 폭동을 일으킬 '의도'를 가지고 있는 단체와 그 단체에 가입하는 이들은 처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한나라당은 반국가단체의 개념을 약간 바꾸고 다른 조항들은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등 최대한 골격은 유지하면서 처벌대상을 줄이는 쪽을 택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체제유지를 꾀해야 하는 일종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 거기서 대개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선택한 길은 행위에 대한 처벌로 국가를 반란의 위협에서 구하되 개인과 시민사회 영역엔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실패 이후 (폭력 없이) 민주주의 체제의 의사결정 원리를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뒤엎으려는 시도에 대한 방책이 필요해졌는데, 이를 위해 많은 국가들은 정당의 구성요건을 제한하는 길을 택한다. 즉, 정당의 이념의 다양성은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고, 구체적인 실행의 차원에서 관용의 정도는 국가마다 다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한나라당의 입장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의 입장조차도 표준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입장으로서는 미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유린의 덩어리인 국가보안법의 형체를 상당부분 해체하는 것만으로도 열린우리당의 법안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입장과 배치된다 하더라도 열린우리당 식의 국가보안법 폐지는 (이루어진다면) 환영받을 수 있고, 환영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국보법 폐지가 민주노동당의 중심적 투쟁과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별개의 문제다. 국보법 문제는 민주노동당에게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 하나'는 결코 '전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보법 문제는 지금 민주노동당의 '전부'가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당이 국보법 폐지를 위해 '올인'해야 한다는 논거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첫째는 국보법 문제가 진보진영의 (역사적) 질곡과 (현재적) 의미에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새질서님의 지적대로 국보법의 피해사례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으며, 진보진영이 받는 탄압도 이제는 국보법보다는 다른 법률을 통한 것이 많다. 그런데도 국보법 문제가 민주노동당에게 '본질적인' 문제라 믿는다면 그 사람의 가치지향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에는 국보법에 피해를 입은 사람, 그리고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논거라면 민주노동당은 민주노동당의 가치지향이 대변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원'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단체라는 말 밖에 안 된다. 이것은 정당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둘째는 모든 일엔 타이밍이 있으며, 다른 투쟁도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 지금은 국보법 관련 투쟁을 할 타이밍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심상정 의원의 말대로, "기조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구체적 정세에 대한 인식은 일치해야" 한다. 먼저 열린우리당의 폐지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열린우리당의 형법보완이 비록 위헌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해도, 실천의 맥락으로 내려와서 가령 한총련 학생들을 잡아들이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폭동 의도'라는 문구의 애매성을 봐도 그렇고, 북한연계 활동은 여전히 처벌할 수 있으되 북한의 입장이 달라지면 빠져나갈 구멍을 줬다는 (그런데 이는 한나라당의 개정안에서도 그렇다.) 신문보도를 봐도 그렇다. 일단 모든 힘을 몰아주고 열우당의 선처를 기대하자는 생각이라면 너무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열우당이 무리해서 법을 통과시킨다면, 그 후엔 부동층을 고려해서 그 고친 법을 매우 엄격하게 집행할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차라리 정치공학적으로 더 타당할 것이다.  


셋째는 '국보법이 아니라 민생'을 말하는 것은 한나라당이나 하는 일이라는 투정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 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진단에 동의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의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의 확대와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은 민주주의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설명이다. 일반인의 삶에 대한 고려가 민주주의의 요소가 아니라면, 민주주의 체제가 왜 왕정이나 독재에 비해 우월한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보수적인 한국인들은 과거의 독재체제가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보다 '민생'을 더 잘 고려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시정하는 길은 민주주의 체제가 '민생'을 다루는 것이지, '민생'을 한나라당의 것으로 내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민생'이란 말에는 '국민'이라는 단일한 집단이 가정되어 있으며, 이는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 부분은 따로 챙길 일이다. 국보법 문제도 사상의 자유를 탄압받는 소수자들을 위한다는 점에선 분명 '민생' 문제이니, '국보법이 아니라 민생'이라는 레토릭은 세심한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국보법이 민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그리고 '민생'을 비난하는 이들은 방금 내가 언급한,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진짜 위험한 요소를 알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걸핏하면 '국민'의 힘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국민은 개혁을 원한다."며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비판한다. 이는 민주노동당 정치인들과 지지자들 역시 흔히 입에 담는 바다. 그런데 여기서 '국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다지 알아낼 바가 없다. 국민은 순간 어떤 것에 찬성하며 다음 순간 어떤 것에 반대한다. 탄핵을 부추기고 탄핵을 단죄한다. 그러한 비일관성은 국민이 우매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신경과 관심이 필요하고, 대개의 국민은 그러한 신경과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 그런 정도의 관심을 요구하려면 아테네에서 그랬듯 정부가 생활비를 줘야 할 것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일관성을 갖춰야 하는 건 국민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그러라고 국민들이 뽑아놓은 것이다. 돈벌고 힘들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 여러 가지 지향의 얘기를 듣고 대충 판단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도 정치인이 일관성 없이 국민에게 기대겠다는 말은 정치를 하지 말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대개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관성을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는 화법 안에 담아서 전달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정치학을 '감정동학'으로 이해하는 세태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며, 긴 안목으로 볼 때 바람직한 것은 못 된다.


이렇게 볼 때에 '국민'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면서 '민생'이란 말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부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는 '국민'이 '국민의 삶'(민생)이 아니라 더욱 추상적이고 심오한 것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이리라. 그리고 이때에 그의 '국민'은 그 심오함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국민'에서 축출하는 배타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는 당을 지지해야만 노동자로 불릴 수 있었고, 따라서 당은 언제나 노동자를 대변했기에 노동조합조차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 모든 논변에 미흡한 점이 있을지라도,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국보법에 대해 쓰는 애정은 지나친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최고위원들은 의원단이 일상적인 상임위 활동조차 중단하고 국보법 철폐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실제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정적인 면에서 보면 현재 당 수입의 8할 정도가 국보법 폐지 투쟁에 쓰이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란 것인지 민주노동당 학생위에선 지하철을 돌며 폐지 투쟁 모금 운동을 벌인다고 한다. 너무너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원론적으로 말해서, 당비에 의해 지탱되고 국가로부터 세비 지원도 받는 정당이 또 다시 시민의 모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지 못할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앵벌이로 느껴질 것이고, 실제로도 앵벌이다. 명의도용의 위험 앞에서도 속수무책인 그러한 행동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불신을 생각해 보았는가.


다음으로 실용적인 측면을 본다면, 그러한 모금 운동이 성과를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내게 그런 광경들을 전해준 이들은 자신이 본 바로는 한 명도 돈을 낸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정당간의 줄다리기가 되었고 국회에서 처리할 일을, 거리에서 돈 한두푼 낸다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당의 입장과 국회의원의 마음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모금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정치공학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그렇게 돈 거둬서 만드는 것이 '찌라시'라고 하는데 그거 다 쓸데없는 짓이다. 민주노동당은 빨리 그 '찌라시' 근성 좀 버려야 한다. 나는 당 재정 8할 쓴다는 말 듣고 뭘 그렇게 쓸데가 있나 싶었더니 그것도 다 찌라시 비용이란다. 대학교 정도의 공간이라면 그거 열심히 나눠줘서 정보전달의 효과쯤은 거둘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에선 다르다. 사람들이 돈 주고 신문을 보는 이유는 심심해서가 아니라 신뢰할 만한 정보 수용의 틀을 얻기 위해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온갖 종류의 찌라시를 거부하기 위해 신문을 읽는 거다. 아침에 신문보고 나온 이에게 찌라시를 억지로 쥐어준다고 제대로 읽을 리 없고, 출근시간이 지겨워서 읽는다 한들 제정신 박힌 소리로 인지할 리 없다. 조중동 세 보수언론사가 신문시장의 7할을 차지하는 나라에서, 게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신문시장 자체가 쇠락해 가는 나라에서, 길거리 행인을 찌라시로 바꿀 수 있는 다고 믿는다니 얼마나 한심한가. 찌라시 사업은 무조건 폐지하고 당에서 일하는 사람 인건비로 전용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사람 잘 살게 하자는 정당이 당을 위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 돈 아껴서 하는 짓이 고작 찌라시질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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