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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드라마틱이나 판타스틱에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경우는 없었는데, 두 매체 모두 시간이 지나더라도 인터넷에 원고를 전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특집의 인트로성 글이라 드물게 전문이 올라왔길래 옮겨본다.

글 내용의 일부는 옛날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듯.


[특집1] 무협- 무(武)라는 현실, 협(俠)이라는 환상 2007.11.01

우리는 적절하든 적절하지 못하든 “내공이 대단하다.”라는 말로 어떤 전문가의 실력을 표현한다. 우리는 어딘가에 영화 《타짜》나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표현한 것처럼 숨겨진 고수가 있고, 그를 찾아가면 뭔가 인생이 변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무협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을 보자. 강대구(지현우)는 몰락한 선배의 출판사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이런 멸문지화의 참극을 당하셨소.” 술을 진탕 먹은 다음날 오후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전 내내 운기조식을 하며 주독(酒毒)을 몰아냈지.” 이처럼 우리는 현실세계의 무엇이든 다 무협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요정과 난쟁이가 등장하는 서구 판타지처럼, 우리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주어져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건 무협지의 세계뿐이다. 강호무림(江湖武林)은 이미 다른 나라의 역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자리매겨진 환상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이 공간의 대략적인 윤곽을 알고 있으며, 그 세부적인 모습을 묘사할 때 나 자신의 환상을 덧붙여 끄적일 수도 있고, 남의 환상을 슬쩍 지우개로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곳에선 성장담, 영웅담, 로맨스, 추리, 전쟁, 정치, 스릴러, 첩보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남자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일부 무협소설을 ‘야설’로 소비해 본 경험마저 가지고 있다. 그렇게, 그곳은 장르 이전에 하나의 우주, ‘유니버스’다. 미국인에게 제다이의 우주가 있고 영국인에게 톨킨의 ‘가운뎃땅’이있는 것처럼.

당연하겠지만, 무협 유니버스의 논리는 서구 판타지 소설의 유니버스가 드러내는 논리와 일정한 차이를 지닌다. 판타지 소설의 인물들은 세계 안에서 각각의 역할, 즉 ‘직종’을 부여받는다. 가령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과 간달프은 마법사와 전사(왕)으로서 서로 역할이 다르며, 그 능력도 교환 불가능하다. 그들의 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세계다. 신(神)이 각각의 것들을 다른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다른 것’들의 세상. 여기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피로해진, 중세의 조화로운 질서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있다. 이런 세계에선 각 개인의 능력이 상승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뚜렷하기 마련이다. 호빗은 호빗인 것이다.





많은 판타지물에서, 신에게 선택받은 기사(騎射)들은 다른 어떤 인간보다 강하다. 이런 질서를 인간이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제한’은 무협소설의 팬에게는 싱거워 보일 것이다. 무협소설에서 인간을 제약하는 건 오직 인간들뿐이니까. 무림 고수는, 재능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끝없이 상승해 올라간다. 무협의 세계의 짜릿함은 주로 이 아찔한 상승의 느낌과 함께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서양의 휴머니즘이 인간이 다른 동물 및 사물과 존재론적으로 다른 등급을 차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해 동양의 휴머니즘은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로 바라본다. 사람 안에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발전에는 한계란 없을 것이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나 중국의 도가적 수련은 모두 이런 맥락에 위치한다.

한편으론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판타지 소설이 중세의 낭만으로 회귀한다면 무협의 세계관은 오히려 경쟁사회의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림인의 능력을 거의 수치화시켜 표현하는 ‘내공’이라는 설정은 중국 고전소설에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근대 이후 중국 신파 무협소설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보편화된 가치를 끝없이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은 무협세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공이 2갑자쯤은 되어야 ‘센 척’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요즈음의 강호무림이라고 생각해 보자. 2갑자라는 말은 평상적으로 수련하면 120년쯤 걸린다는 뜻이다. 이 말을, 우리가 흔히 집값에 대해 푸념하듯이 “월급쟁이 월급으로는 120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이라고 표현해 보면 어떨까. 현실감 있게 와닿을 것이다. 날 때부터 고수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라. 마흔이 되기 전에 2갑자의 내공을 운신에 구비하려면, 우연히 부모 모두 협객이고, 두분 모두 우연히 명문정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어릴 때부터 정종의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등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또한 수련 중에 내공을 증진시키는 온갖 영약을 얻어먹고, 덧붙여 만일 성장기에 한두번 주화입마에 빠진다면 기꺼이 자신의 내공을 희생시켜 ‘소공자’를 살릴 가신 몇 마리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이들이 활보하는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의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사실 출발선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을 해야 하는 잔인한 세상에 떨어진 우리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武)가 드러내는 현실은 냉엄한 것이다. 이 세계에서 주인공은 통쾌한 역전극을 이끌어내어 고수가 되거나, 적어도 고수들의 틈에서 자족적인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내공은 자유이며 초식은 정신의 표현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반복적인 소수자의 성공 스토리는 단순한 대리만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武)를 제어하는 협(俠)이 무협소설의 품위를 유지시킨다. 협(俠)이란 자신이 획득한 무(武)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 세계의 언어로 바꾸면,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다. 무(武)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무(武)를 획득하며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상승은 그만의 협(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저 강함만을 추구하는 것’, 이런 식의 무협(無狹)도 실은 협의 일부다. 여러 협의 방식이 경쟁하면서, 주인공의 윤리적 선택이 드러난다.

극한의 내공을 소유하는 데 성공한 이가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힘을 바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을 바탕으로 조직을 완전히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완전히 추구되기는 힘든 ‘환상’이다. 그 ‘환상’을 문자 그대로 추구하려는 소설도 물론 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은 두 개의 환상 사이 적절한 공간에 자신의 선택을 위치시킨다. 문파들의 다툼과 강호패권의 욕망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려고 시도하는 김용의 《소오강호》가 한 예일 것이고, 역시 문파들의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떨어졌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좌백의 《혈기린 외전》이 또 한 예일 것이다. 영호충과 왕일의 윤리성은 보편적인 것이며, 판타지 소설처럼 심리학의 세계로 넘어가지 않고 우리 세계의 사회학에 머문다. 무(武)를 이용하여 무(武)에 저항하는 협(俠)의 선택. 그 선택의 폭이 넓고 선택지의 숫자가 무한하기 때문에, 여러 주인공의 성공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새로운 무협(武俠)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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