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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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씨 사건 이후로 학력을 허위기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너무나도 광범위해서, 한국 사회를 ‘학벌 사회’가 아니라 ‘학벌 위조 사회’라 불러야 온당하게 느껴질 판국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도 판이하다. 보수언론 등은 주로 개개인의 도덕성을 질타하는데 앞장서고 있고, 진보의 목소리들은 ‘학벌 사회의 희생양’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구조냐, 개인이냐 ●
하나의 사회문제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개인적인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며, 각자의 선택이 서로를 보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우리가 사태의 본질을 올바로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학벌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수사는 쉽사리 “거짓말한 사람들이 뭐가 희생양이냐?”는 반응을 불러오게 되고,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이 말하는 구조를 드러내기 보다는 은폐하게 된다. 마치 우리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능력을 학력으로 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고장난 계산기’가 박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은폐되고 모순된 ‘학벌 위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인문학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봐도 ●
‘학벌 없는 사회’와 같은 단체는 사람을 잘못된 잣대로 차별하는 것의 폭력성을 지적한다. 좋은 시각이다. 또한 학벌사회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학벌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실력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지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우리가 그 실력이란 것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이다. 신정아씨는 학력 위조가 발각되기 전에는 대중적인 기획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그리하여 학력 위조가 밝혀진 후에도 그녀의 실력만은 인정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그녀는 정말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나? 예술에 안목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에 안목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조차 그러한 평가의 기제가 없다면?
기업의 실무자들은 가끔 “우리도 토익이 영어실력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토익점수가 높은 학생은 그 성실성은 증명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무의식적인 ‘진리’의 발설이다. 토익점수가 영어실력이 아니라 성실성을 보여준다면 학력 위조도 ‘성의’는 보여준다고 말해야 할까? 한국 사회 전체가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실력을 평가하는 잣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력은 가장 큰 잣대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가치로 기능하는 이상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은 나올 수밖에 없다.
고장난 계산기는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이 계산기를 대체할 다른 연산방법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우리의 장래가 밝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한윤형 서울대 인문 01 (대학내일 3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