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카이만은 군인이지만 상병이었다오. ㅋㅋ

--------------------------------------------------------------------------------------------------

관중이 단지 스펙터클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것처럼, 그들이 연출하는 상상적 연대는 수동적 연대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자본보다, 어쩌면 관중보다 앞서는 능동적 충동의 실현일 수 있다. 일단 그것을 연대의 충동이라 부르자. 그래서 정치도 상업도 심지어 스포츠도 그 신비한 연대의 충동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지 모른다. 영원한 것은 정치도 자본도 스펙터클도 아니라 다만 그 연대의 충동뿐인지 모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우리의 신체 자체가 연대와 관계를 결과로 낳는 어떤 끈운동의 귀결점인지 모른다. 생명체의 죽음도 조여졌다 풀어졌다 하는 그런 끈운동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잇고 연결하고 모으는 모든 종류의 패스를 통해서 구체화하는 그 끈운동이 정치나 자본 혹은 스펙터클보다 먼저 있었던 운동일 수 있다. 그러므로 축구선수가 멈춰서 운동화끈을 조일 때 우리는 관중을 묶는 끈, 세계를 묶는 끈은 물론 우주를 묶는 끈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강준만 교수가 한참 ‘개혁 상업주의’를 얘기하던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때라 정확한 맥락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월간 이물과 사상 잡지를 낸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돌아온 조롱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한 인터넷 논객은 개혁 상업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기자의 연애를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을 사례로 들었다. 본인이 로맨스 소설 보는게 취미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강준만의 언행이라기보다는 행위들을 모두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도 피식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겠지만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기실 그런 마인드로 구성이 된 것 같다. 이 드라마에는 두 개의 연애담이 존재한다. 과거의 연애담과 현재의 연애담 말이다. 현재의 연애담은 대통령 딸과 일개 경사의 연애담으로, 신데렐라 스토리를 성별만 바꿔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연애담은 로미오와 줄리엣 스토리인데, ‘로미오’는 재벌 그룹 총수의 맏아들이고 ‘줄리엣’은 개혁 대통령의 딸이다. 저 인터넷 논객의 로맨스 소설이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원수같이 지낼 것이다.’는 환상을 통해 성립된다면 <프라하의 연인>의 갈등은 노무현 대통령과 삼성 그룹이 원수라는 야무진 환상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저 인터넷 논객이 말한 개혁 상업주의는 기껏해야 ‘환상의 교집합’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그 논객은 재미있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원수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 그 중 악당은 전자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가르치고(?) 싶었겠지만, (‘교육’하고 싶다면 떳떳하게 널 교육하겠다고 선포할 일이지, 로맨스 소설에 끼워팔겠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 발상인가. 이처럼 자칭 ‘대중주의자’들이 그들이 비난하는 ‘엘리트주의자들’보다 더 오만한 경우가 허다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우연히 한 자리에 모인 두 개의 환상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환상이 다른 환상으로 이행하는 일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를 감상하는데 가문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저 “사이가 안 좋은 두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프라하의 연인>은 군대에서만큼은 <내 이름은 김삼순>에 맞먹게(!) 히트를 쳤는데 -내무실의 유행 드라마는 대충 <그린로즈>, <...김삼순>, <프라하의 연인>의 계보로 이어지고 있다. 프라하 이후로 내무실을 휘어잡은 후속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도 우연히 지금 군인인 죄로 이 드라마를 꽤 재미있게 관람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더더욱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프라하의 연인>을 즐기는 이들이 노무현 지지자의 환상을 공유하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노무현 지지자들만 이 드라마를 즐긴다는 게 아니라, 이 드라마를 즐기는 여러 정치적 성향의 관객들이 노무현 지지자들의 환상에 털끝만큼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상은 그저 덩그러니 두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양자는 우연히 한 드라마에 모였을 뿐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볼펜이 빨간색이고 동시에 길죽하다해도 ‘빨간’이라는 속성과 ‘길죽한’이라는 속성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만큼이나, 정말이지 그렇게나 관련이 없다. <프라하의 연인>을 아무리 열심히 본다 한들 개혁정권의 수반과 재벌 기업의 총수가 본질적으로 원수 사이이며, 그 이유는 전자가 진정한 서민의 편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생기지는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그런 주장을 한다 해도 시청자는 피식! 할 뿐이다.

개혁 상업주의란 레토릭에서, 상업성은 뭔가 포장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포장지는 내용과 독립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작용한다. 그런 시각은 이쪽 편이 아니라 저쪽 편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읽은 국방일보의 한 칼럼에서 논자는 왜 이쪽 편은 <웰컴 투 동막골>처럼 대중을 많이 모으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개탄하고 있었다. 재미있게만(?) 만들면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상으로도 700만을 동원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국방일보가 아닌 조선일보는 직감적으로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외려 <...동막골>의 판타지의 위대함을 소리높여 찬양한다.)

하지만 환상이야말로 상업성이며, 상업성이라는 말 자체가 환상이다. 환상을 기준으로 보면, 담론은 환상을 구축하는 담론과 환상을 해체하는 담론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엔 “누구의 환상인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이득을 주는 환상인가?”를 물을 수 있을 뿐이며, 비교적 많은 사람의 환상이 이윤을 생산하기 때문에 편의상 거기에 ‘상업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업성은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그것도 스스로를 끝없이 복제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인하는 어떤 내용물이다.

그래서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긍정성만 떼어 내어 계승하려면 거기엔 상업성이 아니라 접근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처럼 그 사회의 상식인과 지성세계가 유리된 곳에서는, 지식인들 중에서 일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좀더 쉽게 기술해야 할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쉽게’라는 것은 -비록 그 기준이 두루뭉실할 지라도- 상식인의 언어 구사능력의 수준을 고려한 서술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어떤 주장은 매우 평이한 언어로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도무지 이해받을 수 없다고 배척받고, 어떤 주장은 개념어가 혼란스럽게 난무함에도 대중의 이해(?)를 확연하게 이끌어내곤 한다. 상업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전자는 상업성의 의무를 게을리한 것이라는 힐난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저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논증방식이 아니라 결론 뿐, 애초에 대중의 환상에 벗어나는 결론을 내리려고 한 측에 그런 식의 ‘상업성’을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러나 문제가 환상에 있다면, 상업성이 아니라 접근성만이 의무가 된다면, 전자는 비록 실패했을 지라도 의무를 이행한 것이고 후자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징후일 뿐이다. 상업성이라는 용어의 잘못된 사용을 논파하고 접근성이라는 용어를 그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지식인의 담론 독점현상과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동시에 비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보게 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1 열 아홉 살의 나 [1] 하뉴녕 2006-02-28 1130
» 프라하의 연인 : 환상의 상업성, 상업성의 환상 하뉴녕 2006-02-24 2105
199 조우커의 정치비평 [2] 하뉴녕 2006-02-21 1861
198 왕의 남자 : 패러디를 둘러싼 욕망 -연산군은 왜 웃는가? [1] 하뉴녕 2006-02-10 1366
197 강준만, 혹은 어떤 무공비급 [1] 하뉴녕 2006-02-07 2501
196 선임병의 탄생 하뉴녕 2006-01-17 929
195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 하뉴녕 2006-01-10 1264
194 황산벌 하뉴녕 2006-01-07 1967
193 난해함에 대하여 하뉴녕 2006-01-05 1455
192 강우석 영화와 중산층 의식 [2] 하뉴녕 2006-01-03 1074
191 전통 하뉴녕 2005-12-26 2897
190 팜므 파탈 하뉴녕 2005-12-22 1423
189 니체와 보편성 하뉴녕 2005-12-03 1191
188 그렇게 되고 싶었던 사람들 하뉴녕 2005-11-07 1626
187 연애의 목적 (스포일러 만땅데스) [1] 하뉴녕 2005-10-20 2661
186 형이상학 (1) - 고르기아스로부터 하뉴녕 2005-10-09 1592
185 내가 스타리그를 좋아하는 이유 [1] 하뉴녕 2005-08-26 1196
184 친절한 금자씨, 주이상스의 영화 (스포일러 有) 하뉴녕 2005-08-23 1985
183 고참의 취향 하뉴녕 2005-08-20 824
182 인트라넷 소설과 쾌락의 경제 하뉴녕 2005-08-17 1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