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강준만, 혹은 어떤 무공비급

조회 수 2501 추천 수 0 2006.02.07 02:07:00
카이만, 군인, 상병이었다.

---------------------------------------------------------------------
무공비급이라는 것엔 하나의 판타지가 숨어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에선, <멘큐의 경제학>을 완벽히 숙지하고 달달 외운다 해서 재태크의 기량이 향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음진경은 그 뜻도 모른 채 달달 외워도 무공이 현저히 증진된다. 이것은 무협지를 즐기는 아시아권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판타지는 아니다. 가령 알리바바를 생각해 보라. '열려라 참깨!'하면 문은 단박에 열리는데, 알리바바가 아닌 우리는 그 암호가 뭔지를 모르니 문제다. 즉, 진리는 별 것도 아닌데, 단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도 '신지학'이니 하는 것들이 있어서 이러한 판타지를 돕는다. <인디애나 존스>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올 것이다.


이 판타지는 길버트 라일이 맹비난한 '주지주의적 전설'과 함께 '반지성주의'를 동시에 배양한다. 지식을 알기만 하면 뭔가가 금세 이루어진다는 발상은 라일식으로 말하면 '사실을 아는 것'과 '방법을 아는 것'의 차이를 전혀 고려치 않은 가장 낭만적인 지식에 대한 애착이다. 반면 그 '알기만 하면'이란 행위에 지성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반지성주의다. 일견 모순인 것 같은 두 사태는 실은 동일한 사건의 두 가지 양상이다. '주지주의적 전설'을 믿는 이는 현존하는 지식이 그 전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그 지식이 '가짜 지식'이라 단정짓는다.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아탑의 지식! 그것은 가짜다."라는 '생활혁명가(?)'들의 외침.) 물론 그 후 그가 할 일은 '진짜 지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해탈 이론을 아무리 배워도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한 이들은 '나무묘법연화경'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세계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점에선 이것도 형이상학적 충동인데, 여기서 그 충동은 암호해독학으로 나아간다. 문제는 신이 진리를 숨겼다는 것이니, 우리는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해프닝으로 끝난 <바이블 코드>를 생각해 보라.) 이 명제도 고차원적으로 해석하자면 일반적인 지식 활동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듯도 하지만, 저 판타지의 수용자들에게 그 명제는 훨씬 단순한 사태를 의미한다. 즉, "내가 이해하지 못할 진리란 건 없다. 내가 모르는 건 단지, 그 진리가 어디 숨겨져 있느냐는 것이다."가 된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조잡한 사유의 구조를 곧바로 세계의 구조로 이해하게 된다.


강준만은 김영민이 이해한 대로 단계적 현실타개론자, 점진적 사회공학론자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만들기보다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라."는 포퍼의 공리를 따르는 사람이란 것이다. 포퍼주의는 물론 무공비급의 판타지와는 달리 지성세계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강준만에게서 본 건 다름아닌 무공비급의 판타지였다. 그들이 강준만을 읽었을 때, 드디어 정치의 진리는 그들에게 암호해독학으로 현상했고, 그들은 '조선일보'라는 텍스트에서 "한나라당은 악, 민주당은 (상대적?) 선"이라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강준만의 거친 문체 속에 숨겨진 뛰어난 분석력은 주목받지 못했고, 그의 '능력'은 '예지'로 격상 혹은 폄훼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진리(?)는 진리의 발견자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자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준만은 그들에게서 잊혀졌다. 무공비급은 한번 외워버리면 태워버리면 그만인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내공심법은 한번만 숙달하면 두 번 다시 탐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한번 강준만의 진리를 체득하자, 그들은 더 이상 강준만이 필요없었다. 그리고 강준만이 자신들의 바램과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강준만을 버렸다. 강준만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소멸시킨 건 동일한 욕망이다. 민주당 광신도가 그를 키워냈고 노무현 광신도가 그를 버렸다는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것이다.


2004년 한때 일부 노무현 지지자들이 유통시킨 '디알북'이라는 책을 보면, 그들이 강준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단순한 도표와 몇 줄 안 되는 설명만으로 각각의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 디알북은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도식적이고 관습적으로 '수구정당'과 '수구언론'에 떠넘기고 있다. 개중엔 대충 맞는 소리도 있었고, 정말 한심한 소리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비평'이었다는 것일 게다. '디알북'은 그들이 그들 수준에서 이해한 강준만, 노무현 시대의 개막 이후 그들이 기대했던 강준만이었던 것.


그것이 강준만의 잘못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강준만보다 몇만 배는 오래된 판타지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강준만의 잘못이 아닐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강준만은 지식인 사회를 비판했을 때 바로 그 판타지가 따라나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전혀 무지했거나, 알았더라도 방기했다. 안티조선 이후 강준만의 모든 작업은 그 판타지를 떨쳐내려는 노력, 즉 지식인과 대중 / 지성세계와 생활세계의 올바른 교통관계를 확립하려는 시도다. 그 작업들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의미있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는 좀더 일찍 그 작업을 시작했어야 옳았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가 싫어하는 진중권처럼 주기적으로 '대중'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어쨌든 나와 넌 소속이 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줬어야 했다. 진중권이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존재론적 모순을 선택했다면, 강준만은 존재의 일관성이 논리적 비일관성을 설명해버리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전략을 비교해 보다보면 일관성이라는 말이 결코 쉽지 않은 어떤 강박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절로 깨닫게 된다.


강준만의 성공과 좌절은 지식인 사회의 변두리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하려는 시각은, "문제가 있는 건 지식인 사회가 아니라 너야, 바로 너!"라는 꼬맹이 투정 수준의 냉소주의에서 비롯된다. 오히려 강준만을 둘러싼 사건들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문제를 체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물과 사상'은 모 프리랜서의 조소대로 '지식인 사회의 썬데이서울'은 아니었다. 썬데이서울은 하나의 세계에서 기생하는 물건이지만, 인물과 사상은 적어도 두 세계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강준만이 인용되어야 한다. 김어준이나 디알북이 아니라, 그가 정리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무공비급으로 취급되었으되 무공비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사를 쓰는 방법이며, 사회를 비평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만일 그에 대한 비평이 전무하다면, 그의 시행착오는 허무하게 증발해 버리고, 머리나쁜 이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는 괜찮다.) 아무리 강준만이 '기록과 평가'의 달인이며 '인용하는 기계'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기록'하고 '평가'하며 '인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지식인 사회는 어느 나라나 '좁디 좁은 골목'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에선 그들이 힘있어 보이는 이유는 서로 서로 띄워주고 씹어대기 때문이다. 푸코와 들뢰즈가 서로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달리 칭찬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대학에서 월급을 받고 종이신문에서 용돈을 받는 대신 '지식권력'의 추구를 포기해버린 기형적인 권력집단이다. 강준만의 '조선일보' 비판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한국에선 용돈을 주는 종이신문의 의지가 중요하지, 기고자의 글의 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약력마저도 크게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은 책임을 져야 하는 물건이기에,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을 씹었고, 진중권은 인터뷰/기고 반대 선언을 기획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상징적이고 무용한 전략임이 드러났을 때 -조선일보 측은 유명하지 않은 교수, 아니 아예 교수가 아닌 이들의 원고를 동원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그 일이 별일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안티조선 운동은 인터뷰/기고 반대 선언에서 절독운동으로 나아갔다.)  


반면 강준만은 지식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그 길에서 번번히 무공비급의 판타지에 걸려 실패하는 사람이다. 푸코 어설프게 읽고 지식권력 평준화하자고 하지 말자. 한국엔 아직 지식권력이 오지도 않았으니까.



P.S 어제 서점에서 강준만의 '사전' 시리즈를 주욱 살펴보았다. 강준만은 그렇게 자료를 축적해 나갔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지식을 쌓지는 않으므로, 그 책들은 교양도서로써 걸맞지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책들은 하나의 의의를 가지는데 그건 바로 그 책들이 강준만 자신을 드러내준다는 것다. 말하자면 그 책들은 한 판타지 소설 작가의 설정자료집이나 마찬가지다.

P.P.S 이 글의 내용 중엔 이상한 모자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대중 문화 평론계의 큰 별"인 노정태 선생님과의 전화통화 내용이 3%쯤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국

2012.07.18 15:49:27
*.97.103.233

강준만은 존재의 일관성"으로" 논리적 비일관성을 설명해버리는 사람이다.
교양도서로"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1 열 아홉 살의 나 [1] 하뉴녕 2006-02-28 1130
200 프라하의 연인 : 환상의 상업성, 상업성의 환상 하뉴녕 2006-02-24 2105
199 조우커의 정치비평 [2] 하뉴녕 2006-02-21 1861
198 왕의 남자 : 패러디를 둘러싼 욕망 -연산군은 왜 웃는가? [1] 하뉴녕 2006-02-10 1366
» 강준만, 혹은 어떤 무공비급 [1] 하뉴녕 2006-02-07 2501
196 선임병의 탄생 하뉴녕 2006-01-17 929
195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 하뉴녕 2006-01-10 1264
194 황산벌 하뉴녕 2006-01-07 1967
193 난해함에 대하여 하뉴녕 2006-01-05 1455
192 강우석 영화와 중산층 의식 [2] 하뉴녕 2006-01-03 1074
191 전통 하뉴녕 2005-12-26 2897
190 팜므 파탈 하뉴녕 2005-12-22 1423
189 니체와 보편성 하뉴녕 2005-12-03 1191
188 그렇게 되고 싶었던 사람들 하뉴녕 2005-11-07 1626
187 연애의 목적 (스포일러 만땅데스) [1] 하뉴녕 2005-10-20 2661
186 형이상학 (1) - 고르기아스로부터 하뉴녕 2005-10-09 1592
185 내가 스타리그를 좋아하는 이유 [1] 하뉴녕 2005-08-26 1196
184 친절한 금자씨, 주이상스의 영화 (스포일러 有) 하뉴녕 2005-08-23 1985
183 고참의 취향 하뉴녕 2005-08-20 824
182 인트라넷 소설과 쾌락의 경제 하뉴녕 2005-08-17 1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