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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선임병의 탄생

조회 수 929 추천 수 0 2006.01.17 13:45:00
카이만, 군인, 상병이었음. 겨우 상병 1호봉인 주제에, 이때부터 욱일승천의 기세로 올라가기(?) 시작했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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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만일 본인이 선임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결코 선임병은 탄생하지 않는다. 중대 왕고가 되는 그 순간까지 바로 윗고참에게 갈굼을 먹었다는 어리버리들의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일병 생활을 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선임병이라는 사실, 고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참들은 그런 자각의 단계를 거친 후임은 (상대적으로) 건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그 자각이 매우 늦게 왔다. 내 바로 밑 후임 제헌이가 짬밥이 비슷한 무리 중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며 중대 이등병들의 새로운 공포로 자리잡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갈굼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다. 그 와중에 지난번에 언급한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자각한 사건이 있었다. 그 며칠 후 내게는 또다른 자각이 찾아왔다.

L병장이 행정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남자들에게 어필하는 섹슈얼리티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만큼, 내 군생활에선 '개념없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고참이 분기별로 하나씩 있었는데, '고참의 취향'에도 등장한 바 있는 L병장은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좋아하는 고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병 초짜 때 '이등병 킬러'였기 때문에, - 이 영광스런 호칭은 다름아닌 내가 붙여준 것이다.- 그가 전역하는 날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L병장님은 제 군생활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자, 오아시스였습니다."라고 선언할 생각이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 그는 이제 드디어 병장 모드가 되어 군 바깥의 사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이든 노인네가 갑작스레 종교를 찾는 것처럼, 군대가 전부인 것처럼 그 안의 상징계에 안주하던 중대의 갈굼쟁이들도 짬밥이 쌓이면 불현듯 사회를 떠올린다. L병장에겐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내가 온 걸 보더니, "내가 잘하는가 싶어. 밖에 나가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인데, 애들한테 말 함부로 한게 후회되네. 이젠, 뭐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한마디 하려고 해도, 단지 한마디만 해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내리갈굼이 되니까 뭐라고 말하기도 뭣하고..."라며 말문을 텄다.

카이만은 짬밥과 상관없이, 고참과 후임을 포괄하는 중대의 비공식 고충상담병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L병장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내게 말해줬다. "이제 너도 자리를 잡을 때가 되었다."고.

며칠 후 주말에 전입온 지 얼마 안 되는 이등병 몇몇과 내 아래 일병 둘셋을 데리고 PX로 갔다. 원래 메뉴 고르는데는 소질이 없는지라 후임들이 음식을 가져오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직불 카드를 꺼내 한번 그어주기만 한 후 테이블에 앉았다. 너랑 너는 이쑤시개를 가져오고, 너랑 너는 냉동식품을 전자렌지에 돌려라, 따위의 초보적인 명령을 내린 후의 일이었다. 양팔의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손바닥 위에 얼굴을 괴어놓고 있었더니 PX병 고참 -04년 1월, 아버지 군번 중 하나다.- 이 나를 보고 외쳤다.

"아들!! 멋있어!!! 고참 가다 나온다~~~야~~~!!"

"아닙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제 자신이 잘 압니다. 이건 고참 가다가 아니라 물주의 가다입니다. 밖에서도 이런 짓은 많이 해봐서 말입니다."

"그거랑 그거랑 같나. 이제 일병 꺾였잖아. 다음달이면 일병 왕고네? 어서 상병을 달아줘. 그래야 아버지가 집에 간다!"

"예."

외박나와서 같이 술을 마시던 고참들도 말했다. "이제 카이만이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고. 대개 이등병 때 정신없이 지내고 빠르면 일병 3개월 때부터 자리를 잡는데, 나는 이등병 때는 참으로 답답하게 보내고, 일병 때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일말 상초 때 내 자리를 찾았다. 고참들에겐 '걸어다니는 폭탄'으로, 후임들에겐 '선량한 고참'으로. 그게 이 세계에서 내가 부여받은 역할, 이 좁은 세계의 상징계가 나를 포획한 방식이었다. 그후론 더 이상 중대에서 나를 건드는 사람이 없었다. 고참들은 서로 말싸움을 할 때면 '폭탄'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후임들은 내 앞에서 언어의 해방감을 누리는 대신 나를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유리시키려고 애썼다. 내 생각에, 그건 꽤 괜찮은 거래였다.

그래서 듣는 나조차도 어색하게도, "비켜라, 일병 5개월이 변기를 어떻게 뚫는지 보여주겠다." 따위의 대사를 내뱉게 되었고, 후임들에게 제법 잘난 척하며 "나한테는 사과하지 마라. 나는 사과받는 거 안 좋아한다. 왜 그랬는지만 말해라. 그건 다 들어줄테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생겼다. 또 한명의 선임병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런 식의 적응을 하지 않은 SHS 앞에선 여전히 한 명의 친구로, SHS 본인의 말을 빌리면 "선후임 관계가 아니라 마치 동네친구 같은" 관계를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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