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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황산벌

조회 수 1967 추천 수 0 2006.01.07 16:47:00
카이만, 군인, 상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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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사에 대한 주목을 요구하는 어떤 역사가의 견해에 따르면, 백제는 당군의 상륙작전에 사흘 만에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수/당 두 나라와 70여년에 걸쳐 군비경쟁을 벌인 결과 발생한 해양전의 패러다임이, 역량은 탄탄했지만 순간적으로 변화에 뒤쳐진 국가 하나를 그대로 침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침몰은 뒤이은 고구려의 침몰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방탕함과, 백강과 탄현을 사수하라는 성충의 간언, 백화암 아래로 사라진 삼천궁녀 등등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국가의 멸망을 바라보는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상징체계에서 나온 상투적인 표현으로 봐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국가는 우주의 혼돈 위에 세워져 있는 질서였으며, 국왕은 그 질서의 구현자요 신의 대리인이었으니, 국가의 멸망이라는 것은 천시가 변했거나 국왕이 무능하여 그러한 일치가 깨지는 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황산벌의 전투는 전략적인 의미가 아니라 백제의 상징적인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할는지도 모른다. 즉, 백제인들은 황산벌에서 5천명의 젊은이가 산화한 다음에야 700년이나 존속한 그들 국가의 멸망을 심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황산벌은 그러한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상관이 없으려고 했다. 영화 황산벌에서 역사적인 고증을 찾는건 무의미한 일이다. 많은 이들은 백제의 5천 결사대가 기병이었다고 추측한다. 그리 본다면 5천의 기병이 5만의 기병과 보병이 혼재된 부대에게 네 번의 승리를 거두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황산벌에선 거의 순수 보병으로 이루어진 백제군이 목책을 사이에 두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충무로는 헐리우드가 아니라서, 펠레노르 평원을 가로지르는 로한 기마병의 장관을 재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황산벌은 애초에 코미디 영화를 의도했다. 어쩌면 개그콘서트 '생활사투리'의 성공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벼운 추측이 일만큼, 황산벌의 코미디는 사투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산벌은 스펙터클을 지향하는 영화가 아니다. 충분히 스펙터클한 고대의 전쟁은 간략하게 기호화된다. 그리고 그 기호화가 또한 웃음을 자아낸다. 백제군과 신라군이 기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아마 고대에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 연고전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 듯하다. 네 번의 전투는 일종의 '시합'이 되며, 그 시합들은 많은 영화의 패러디다. 마상 활쏘기 시합은 아무리 삼국유사에 그 기원이 나온다 한들 시각적으로 볼 때 기사 윌리엄 류의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마상 창술 시합 장면을 연상케하고, 계백과 김유신이 두는 인간 장기는 기묘한 영화에 그 근원을 둔다. 아마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일 욕쟁이들의 시합은 그러한 구도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실제로 남도 욕쟁이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8mile과 같은 영화에 나오는 랩배틀 장면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가 없다. 킬빌의 우마 서먼이 입은 노란 운동복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인지 아닌지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독창성조차도 패러디의 맥락에서 파생된 독창성이니, 이들의 시합은 전쟁과도 역사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영화 황산벌은 황산벌 전투의 진실에 직각적으로 접근한다.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면 스펙터클의 숭고함에 가렸을 전쟁의 상징성이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은 조갑제나 김훈이 믿는 것처럼 리얼리티가 아니다. 극중 김유신의 말대로 "전쟁에는 절차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의례이며, 만일 관조하는 이의 감정을 허락한다면 슬픈 의례다. 현대에 와서 핵무기를 비롯한 여러 대량살상무기들이 그 균형을 결정적으로 파괴하기 전까지, 전쟁은 수 천년간 하나의 의례이면서 동시에 '숭고한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숭고함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자금이 없기에 충무로는 의례에 집착한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여러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제작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금이 없다는 것은 충무로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단점을 봉합하려는 시도가 충무로를 유일하게 헐리우드와 구별시켜 줄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러나 그 의례는 개체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을 생명마저 서슴없이 파괴하는 그런 의례. 그런 의례의 집전자로써 계백과 김유신은 만난다. 두 사람은 전쟁의 문법에 통달한 이들이지만, 김유신은 그 의례를 규정하는 현실을 인식하는 반면 계백은 그렇지 못하다. 이를 김유신은 "너는 전쟁은 알아도 정치는 모린다."고 표현한다. 차라리 이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표상하는 단어가 있다면, 전쟁이 아니라 바로 정치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정치가 전쟁에 대해 일종의 하부구조라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전쟁은 종종 정치를 뒤엎을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이해된다. 김유신이 신라태자 김법민에게 "네 아버지와 나는 정치는 알아도 전쟁은 모린다. 지금 총공격하면 그대로 몰살이야."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군이 거는 유일한 기대도 거기에 있다. 스타크래프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원도 후달리고 멀티도 적지만 유닛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세가 바뀌는 경기가 종종 있는데 백제인들은 그런 경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황산벌의 전세에 백제인들이 거는 기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한다. 당군이 먹을 군량미를 운반하는 (계백의 말로 '쌀 배달' 김유신의 말로 '살 배달'인) 신라군의 처지, 몇월 몇일까지 오라는 소정방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약속, 전쟁의 승패보다 본인의 명예와 이윤이 관심이 많은 듯한 소정방의 태도가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상황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전쟁은 대국인 당나라의 입장에서도 "이기면 좋고 져도 그만인"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는 당나라의 욕망은 일정부분은 고구려에 대한 공포심에 연유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집요했다. 여하간 적어도 백제인들이 황산벌을 중요한 전장으로 믿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서사를 지탱하는 틀이다.



그 서사 속에서 계백과 김유신은 통합의 환상을 주조하는 장인이다. 그건 오늘날의 우리가 군인에게 부여하는 역할은 아니다. 오늘날의 군대는 환상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며, 용맹한 병사가 아닌 통제받는 병사를 원한다. 그러나 통합의 환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정치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고대인들이 전쟁터에서나 급조했을 연대의 환상을 오늘날의 우리들은 '현실'로써 살아간다. 우리에게 정치가 더 이상 리얼리티로 현상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이다. 황산벌의 '정치'는 차라리 우리에겐 '경제'에 대응하며, 황산벌의 '전쟁'은 우리에겐 '정치 + 전쟁'이다. 고대의 전쟁은 진지전과 기동전이 분화되기 이전의 것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대사들은 의도하지 않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띠게 된다. 도대체 정치 - 황산벌의 '정치'가 아닌, 우리들의 '정치'로써- 의 환상이 우리를 어떻게 포박하고 규정하는 지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바, 바로 그것이 김유신이 이해하는 전쟁의 문법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냉혹한 부분에 대해 김유신은 '미친 놈들 짓'이라고 말한다. 통합의 환상이 은폐하는 것은 신분의 차이이며, 백제가 신라에 복속되든 말든 삼국통일이 되든 말든 계백 처의 말대로 "나라가 쳐 망해뿔든 말든" 일반 병사들의 삶은 별 차이가 없으리라는 평범한 진리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김유신은 귀족 자제 -화랑-의 피를 요구하며, '백제인'이라는 주체와 '신라인'이라는 주체를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진격 직전에는 백제가 망하면 백제 땅은 모두 너희들(=병사들) 것이라는 거짓 선전을 한다. 화랑 관창의 에피소드 역시 영화에서는 한 화랑의 주체적인 결단이 아니라 그러한 의도적인 환상 만들기의 일환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월간조선이 황산벌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김유신은 '알면서도' 행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김유신이 계백에게 줄곧 측은감을 느끼는 것은 구조에 속박되어 운신이 제약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처자식을 죽이는 계백을 모습을 보라. 그것은 나라가 망하면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것을 선도적으로 암시하는 일종의 상징-의례다. 그런 의례를 행하는 것이 계백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결사대를 유지하기 위한 통합의 환상. 그러나 그 상징은 실재가 아니라서, 계백의 처자식을 죽이는 건 외적이 아니라 계백 자신이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융을 위시한 다른 귀족 자제들은 어쨌든 당나라 장안성에 끌려가서라도 살아남는다.)



그러나 극중에서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행세하는 김유신조차도 그 문법을 완전히 넘나드는 인물은 아니다. 김유신이 총공격 직전에 수하들에게 나직하게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친척인기라."며 말할 때, 그것만은 '알면서도 행한다'고 표현할 수 없는 저 주체의 구멍이 내뱉는 말로 보였는데, 그때 나는 특정 지역이 한국사를 점유한 방식이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는 느낌에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역사적인 신라와, 역사적인 김유신과 관련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우리를 형성한 어떤 외상을 반영한다. 신라왕자 김인문은 신라왕자가 아니라 친미파 외교관인 것이다.



유일하게 성장하는 케릭터인 계백은, 이데올로기가 미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한다. 계백이 죽음 직전에 떠올린, 김선아가 -오랜만에 TV에서 날씬한 김선아의 모습을 보니 매우 당혹스러웠다.- 열연(?)한 계백 부인의 대사는 줄줄이 명대사다. 그러나 미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행위를 후회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계백이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는지, 그러니까 교정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미망이기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후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편하지 않은 전쟁 영화의 문법인 '공동체 < 개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류의 영화에서 드러나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략 한국형 가족주의로 각색해서 계승한)이라는 공식을 제대로 구현하지도 못한다. 그 점 때문에 황산벌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도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너무 옹호를 하려는 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영화가 그런 식의 봉합으로 떨쳐내기 힘든 어떤 근원적인 포박을 (사람들에게 불편한 방식으로) 지시했다고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관객도 많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해(2003년)에 주목받을 만큼 관객이 많이 든 것도 아니었다.- '대중적인 영화'라고 말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선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이 영화가 평가받을 만한 지점들은 결코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가, "지구를 지켜라"만큼 흥행에 참패했다면, 오히려 평단에서는 그 지점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하나의 산업이니 그런 운명을 바랄 수도 없는 것이며, 그 역시 황산벌이라는 영화의 특성상 가능하지 않을 헛된 추론에 불과하기에, 이 영화가 개봉한지 2년도 더 지난 지금 그것을 평론의 소재로 삼을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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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읽은 것이지만, 황산벌의 백제군은 5천이 전부도 아니었고, '결사대'도 아니었단 견해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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