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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난해함에 대하여

조회 수 1455 추천 수 0 2006.01.05 02:00:00
카이만, 군인, 글을 쓸때는 일병이었으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올 때는 상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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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휴가나가서 가진 술자리에서 만난 이택광님은 '난해한 것이 되돌아온다'는 말을 했다. 한 학자의 이론이 있다면, 먼저 유명해지고 논의되는 건 명료한 쪽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난해한 부분, 이해되지 못한 부분이 거듭 논의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지적 허영이 아니라, 난해한 부분이야말로, 불가능한 실재를 포착한 부분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럴 만 하다고도 했다. 내 식으로 고쳐 말하자면, "그가 버벅거리는 곳이 중요한 곳이다" 정도가 될 것.

그러나 애초부터 난해함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한 철학자들도 있다. 물론 그들의 이론도 충분히 어렵지만, 그 어려움은 난해함이라기보다는 정교함과 복잡함이라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만일 내 머리의 계산이 충분히 빠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연산식에 익숙해진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고 추정된다. 아직 이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추정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매우, 무지막지하게 투박하게 말하자면 영미 분석철학과 그 전통의 주변에 있는 철학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나는 논리주의가 논리가 통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건드리는, 일종의 '논리적 초월'에 쾌감을 느끼는 부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곤 한다. 가령 러셀과 포퍼의 글을 읽을 때, 나는 그들과 철학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정치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이 더 즐거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읽기 전에는 내 취향에 꼭 맞을 거라고 '기대'된 책이었다. 그러나 그 책의 1부 "플라톤과 유토피아"를 본 이후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포퍼는 종종, 단어에 대한 근대적인 정의(definition)를 가져와 플라톤이 이에 어긋나 있다고 비판한다. 또 플라톤의 이론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적대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플라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차라리 니체의 성마른 비판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가 비록 똑같이 플라톤을 원한감정의 소유자로 몰아붙일지라도, 그 때 그의 전선은 플라톤이 보았던 곳, 형이상학의 영역에 그어져 있다. 니체는 회의주의자들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넘실거리는 형이상학적 갈망을 주체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포퍼의 비판은 플라톤을 단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정당하지 않다. 내 기준에서 볼 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이론서라기보다 저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정도 수준의 저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의 수준은 대단히 높은 것이며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 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러셀에게 철학은 '미해결 문제의 저장고'였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의 칼럼이 '철학적'이 된다는 건 러셀에겐 난센스였을 것이다. 철학은 미해결 문제에 관한 것이고, 러셀이 칼럼에 대고 미해결 문제에 대해 논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러셀의 칼럼은 대단히 맛깔스럽고 정교하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그 명료함은, 가끔 그 너머의 것에 대한 아쉬움을 준다. 하나의 칼럼이 해결된 문제의 배후에 있는 불가능성을 살짝 넘겨다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러셀이나 포퍼에 비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말로 담기 힘든 영역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버벅거리면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깔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단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며 한계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선을 긋는 작업도, 결국엔 한계를 넘나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를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해함에 맞닥트려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종류의 난해함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칸트를 그러한 난해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편견은, 이성과 논리라는 도구를 그것의 한계 안에서 사용할 때 우리는 속물성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한계를 이유로 이성과 논리를 부정하다 보면 이윤의 욕구에 종속될 위험이 있고, 이성과 논리 밖에 없다고 말하다 보면 잇속 계산 이외의 차원을 도외시하기 쉽다. 우리에게 가능한 대안은 이성을 인간적인, 즉 불완전하지만 인간된 입장에서 회피할 수도 없는 그러한 도구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해함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그것에 대한 긍정은 하나의 해프닝을 낳는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가 지극히 좁기에 모든 것이 난해해 보이는 사람의 언어가, 다른 사람이 주목할 만한 실재(the Real)와 대면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암스트롱을 좇아 인간의 인식을 온도계로 비유하는 관점에서 답해야겠다. 어떤 온도계가 평소에 우리의 느낌에 대응되는 수치를 가리키다가, 어느날 이상한 수치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온도계의 능력을 초과하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도 고장난 온도계가 이상한 수치를 가리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멈춰 있는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가장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횡설수설이 아주 가끔 적절한 지점을 짚는다 해서 그의 인식을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는 재능은 횡설수설의 재능뿐일 테니까.

어린 아이는 자신이 흔드는 팔이 몸 뒤로만 가도 그 존재를 의심한다. 어떤 횡설수설이 자신이 이성 위에 있음을 주장할 때,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실소뿐이다. 그런 것들을 잘 가려내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 잘 작동하는 온도계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날씨를 계측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른바 '전문가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데, 한국에 횡설수설이 유난히 많고 그것을 가려내는 데에도 민중(?)의 저항이 있는 건 바로 그러한 온도계의 집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난해함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해프닝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도 갖춰야 한다.

p.s. 11월 초에 쓴 글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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