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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강우석 영화와 중산층 의식

조회 수 1074 추천 수 0 2006.01.03 16:46:00
카이만, 군인, 상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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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도둑은 소도둑과 다르다. 바늘도둑에서 소도둑이 파생되지는 않는다." 몇몇 강우석 영화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다. <투캅스1>에서 안성기는 박중훈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에도 경찰이었고 지금도 경찰이야." 후배에게 소소한 부정행위를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그것과 마약을 빼돌려 꿍쳐먹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ssy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당이 악마를 만났을 때" 정도의 부제를 붙여도 괜찮을 <공공의 적 1>의 설경구는 마약을 빼돌려 꿍쳐먹는 경찰에서 - 아마 이게 강우석에게는 경찰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행위에 속하는 모양이다. - '공공의 적'을 처단하는 '민중(?)의 지팡이'로 변신한다. 그런데 그의 행위의 변화라는 것이, 길거리의 노점상 물건을 그냥 뺏는 수준에서 원가는 내고 뺏는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그 노점상은 그것도 고마워서 감찰과 직원에게 "(그는) 돈을 냈다"고 증언하기는 하지만, 3천원짜리 사과를 2천원 내고 쳐먹는 것을 일상언어의 어법에서 "돈을 냈다"고 표기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인식을 우리는 <올드보이>의 이우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가라앉기 마련"이라는 그의 윤리의식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그토록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박찬욱이 복수 - 그것도 사적인, 윤리적 처단으로서의 복수 - 시리즈를 만들 수 있는 배경도 그 자신이 어느 정도는 이우진의 그런 윤리의식에 공감하거나 흥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강우석의 영화에선 이우진과 같은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다. 강우석의 세계에서 인간은 세 종류로 표상된다. 1) 바늘도둑 - 2) 소도둑 - 3) 악마. <투캅스 1>이 1)과 2)의 관계에 대한 얘기라면, <공공의 적1>은 1), 2)와 3)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3)과 관계한 인간이 2)에서 1)로 성숙해 가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의식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소소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의 큰 부정에 분노할 수 있는, 그리고 '싸이코'를 배격할 수 있는, 우리 사회 평균적인 남성들의 윤리의식의 근간이다.

...라고 단언하고 다음으로 그 윤리의식의 허위성에 대해 이죽거리는 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비평의 양식이겠지만,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체에 투영되는 윤리의식은 사회의 평균보다 더 높은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방금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 평균적인 남성들의 윤리의식의 근간'이라고 말했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바늘도둑이기 때문에 소도둑에게 성질을 부리는 건 웃긴 일이라는 '일관된' 윤리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상류층이나 중류층 뿐 아니라 상당수의 중산층들마저도,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인식에 동조한다.

그에 비한다면 강우석 영화의 중산층 의식은 차라리 권장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많이 번다'고 하면 '월 600'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강동서 강력반 강철중', 그리고 실제로 월 600 벌면서 자신이 많이 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들이 행한 소소한 탈세와 감세 때문에 부유층의 탈세에 대해 냉소적인 -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따위의 -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도, 아니 그것이야말로 웃기는 짬뽕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안쓰러운 희극'에 들어갈 것이다.

강우석 영화는 적어도 중산층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긍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주인-도덕이다. 반면 바늘도둑과 소도둑을 동일하게 보는 하나의 방법인 냉소주의는 중산층의 삶을 상류층의 시각에서 교정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노예-도덕이다. 물론 바늘도둑과 소도둑을 동일하게 보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자기 혐오인데, 반항적인 십대를 넘기면 예술가를 자칭하는 이들 외에는 괴로워서 소유하기가 힘든 의식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중산층 의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관성이라는 면에선 가장 문제가 있지만, 나는 강우석 영화의 주장을 그런대로 긍정한다.

비루함에서 코미디를 엮어낸다는 점에서 강우석은 주성치와 동일하지만, 양자가 비루함에서 코미디를 끌어내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주성치가 다루는 것은 '소년의 비루함'이고, 강우석이 다루는 것은 '중년의 비루함'이다. 주성치 영화에서, 소년은 세계의 근원적인 비루함에 걸려 과장되게 쓰러진다. 그리고 그 과장됨에서 우리는 웃게 되는데, 그것은 희극이면서도 비극이다. (중국영화의 과장법에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도, 주성치 영화의 과장은 소년의 심리적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면 강우석에겐, 그 인간의 비루함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웃음은 그것에 대한 모사(模寫)에 연유한다. 그것은 비극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강우석은 주성치와는 달리 현실성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현실성이라는 이름의 가상만큼 막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없다. 중산층 의식이 그 효과를 발휘할 때, 그들은 사회의식을 대표하게 된다. 나는 중산층 의식이 우리 사회의식을 대표하는 현상에 별다른 불만이 없다. 마땅한 흐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강우석 영화가 표상하는 그 의식이, 상류층에 의해 전이되고 왜곡된 중산층 의식을 이겨내고 중산층 의식의 대표가 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식의 대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비록 내가 그에 동의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가끔, 부시를 욕하면서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카우치는 마약을 먹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짜증이 확 돋는 경우가 있다. 주체적인 중산층의 의식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도 필요할 것이다.

시만

2007.03.27 21:10:39
*.150.179.78

손녀의 심리적 세계라...... 주성치의 손녀? ^^
덕분에 하룻저녁 즐겁고나~~

하뉴녕

2007.03.28 16:15:52
*.176.49.134

허허허, 정말 오타가 많은 블로그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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