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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팜므 파탈

조회 수 1423 추천 수 0 2005.12.22 13:41:00
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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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꽤 친하게 지내던 형은 군인의 신분으로 휴가를 나오더니 미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2002년이었나 보다.) 나는 그때 '그 사람 언제 앨범냈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이곳의 세계는 바깥과 다르다. 나는 레이싱걸 출신의 5인조-6인조였던가?- 그룹 '키스파이브'가 유명하지 않을 것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SM에서 나온 '천상지희'는 워낙에 회심의 상품인 것처럼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길래, 바깥에서도 유명한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나 휴가 나갔더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ssy는 날 보러 면회와서 PX의 TV에 나온 천상지희를 처음으로 봤는데, 'SM에서 만든 베이비복스'같다고 평했다.

그렇게, 군인들의 세계에서 몇 명의 '인기 여가수'의 유행이 지난 후, 요새 유행하는 건 아이비다. 박진영이 발굴한 가수라고 하는데, 이전에도 종종 박진영이 의도했던 것처럼 팜므 파탈을 컨셉으로 삼고 있었다. "오늘밤 일"이라는 노래는 가사가 꽤 남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어서, 나도 내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덮어버리고 저게 뭔소린가 하며 TV를 쳐다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역시나 영상매체에 약한 사람이라, "오늘밤 일"이라는 노래와, 아이비라는 가수와, 그 가수의 얼굴을 연결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팜므 파탈이 남자들의 욕망이긴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실현되기 힘든 욕망이다. 팜므 파탈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주도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밤 일"에서도, 남자친구가 따로 있는 화자가 원나잇을 즐긴 상대방을 함구시키는 댓가로 약속할 수 있는 건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약속하는 것뿐이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에겐 아무런 구속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 약속을 지킨다면, 그저 다시 처음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약속을 지키는 일이 반복될 수록 역시 그 약속의 매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을 장난스럽게 인용하자면, 그것은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되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서 있는 것도 위험'한 그런 정체성이다.

따라서 결국 팜므 파탈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남자들이 욕망하는 것도 팜므 파탈의 승리가 아니라 그것의 파멸이다. 파멸시키고 싶은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그 욕망은 뒤틀린 욕망이다. (이토 준지의 만화 중 토미에 시리즈가 그렇게 끔찍한 이유는 바로 그 뒤틀린 욕망을 물화시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만일 현명하고 교활한 여성이 있다 하더라도, 팜므 파탈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착한 여자'가 되어 여러 남성들의 보호막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남자들을 지배하는 -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말이지만 - 훨씬 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꿈에도 가끔 팜므 파탈이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꿈 속에서, 순진하게도 "나는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어요."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그건 현실화되어선 곤란한 은밀한 욕망이다. 그래서 꿈을 깬 나는, 설령 팜므 파탈을 현실에서 맞닥트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욕망하는 대신 뭔가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뒤에서 그 사람을 창녀라고 욕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쓴 웃음을 지으며 다짐한다. 그게 내가 은밀한 욕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주체의 영역에 포섭하는 방식이다. 팜므 파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혹되는 자신을 담담히 지켜보는 것이다.

p.s. 10월에 쓴 글인듯. 아이비의 후속곡은 영 맘에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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