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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연애의 목적 (스포일러 만땅데스)

조회 수 2661 추천 수 0 2005.10.20 16:44:00
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군에서 내가 쓴 글이 대개 그렇듯, 읽고 보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보니까 거기서 좀 과도한 의미를 이끌어내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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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9시간 연속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긴, 내가 워낙에 수면을 좋아해서 그렇지, 보통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그런 기회를 갖는 일이 흔치 않을 것이다. 기회를 가져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 뻔하고.) 그래서, 오랫만에 금요일 밤에 찾아온 비번에 나는 감격했고, 오늘은 반드시 9시간 취침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것을 방해한 것이 중대장이 놓고 간 디빅스였고, 그 디빅스에서 나온 영화 "연애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잠을 청하다가도 몇몇 대사를 듣고 다시 몸을 돌리기를 반복해서, 결국 중반 이후부터는 잠자기를 포기하고 영화를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평가할 자격이 없는 수용자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뼛속 깊이 영상매체보다 문자매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 내 여동생은 여동생들이 학창시절에 흔히 하는 경험 - 오빠가 컴퓨터에서 보다 만 야동을 발견하는 일 - 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성욕이 거의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내가 그 분야에서조차 영상매체보다는 문자매체를 추구했음을 밝혔다. 상황이 그 정도쯤 되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장면을 보지 않고 드러누워서 귀로만 들어도 스토리가 무리없이 연결되는 것들이다. 이건 매체를 올바로 대우하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래서 영화관에 보면 화면을 열심히 쳐다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처럼 화면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잠을 청하려다 말고, 청하다가 말고, 하면서 봤으니, 내가 이 영화를 거의 라디오처럼 '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연애의 목적"은 그렇게 라디오처럼 들어도 별 무리가 없는 영화였다.

전반부에서 이 영화는 홍상수꽈의 영화인 것처럼 위장한다. 적당히 귀엽게 찌질거리고 찐득거리고 찝적대면서 온갖 성폭력을 행사하는 박해일은 "연애의 목적? 그것은 섹스!"(홍상수식의 전형적인 질문과 전형적인 대답)라고 말하는 듯 하다. 내가 처한 공간이 내무실이 아니었다면, 숙취로 뒹굴거릴 때 친구 방에서 나온 영화였다면, 이 영화 전반부를 견디지 못하고 책이나 보러 다른 방으로 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퇴장할 곳이 없었고, - 꿈나라를 제외한다면 - 박해일이 온갖 범죄를 너무 어이없이 귀엽게(;;) 저지른 데다가, 대사빨이 꽤 받는 시나리오였는지라 그저 키득키득하면서 보고 있었다. (극중 인물의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는 관계로 - 영화 내내 그냥 '이선생', '최선생'이라고만 부른다. 거의. - 그냥 배우 이름으로 쓰겠다. 배우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내가 뭔가 기대하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남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징후가 드러나면서부터였다. 박해일의 욕망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반부의 스토리는 (홍상수처럼) 그것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강혜정의 상처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강혜정의 스토리는 박해일의 지적대로, '뻔한 것'이다. 하지만 뻔하다는 건 세상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고 - 사실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기엔 사건이 심각했지만 - 그만큼 일반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자는 어느 남자와 밀애를 즐겼는데, 그 밀애가 들키고 남자의 명예에 손상이 갈 가능성이 보이자, 남자는 모든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고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 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것은 여자뿐이고(정말로 정말로 흔히 그렇듯이), 그래서 그 여자는 그 세계를 떠난다. 강혜정이 '교사' 박해일보다 한 살 많은 '교생'이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6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박해일, 결혼할 상대가 있는 강혜정의 밀애는 또 한번 들킬 경우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손상시키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 혼자 피박을 쓰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 학교에 그들 사이의 관계가 소문이 나게 되고, 강혜정이 이전에 다니던 대학에서 어떤 이유로 쫓겨나게 되었는지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 교육청인지 어딘지에서 나온 감사관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박해일. 둘이 사귄 적도 없고, 그냥 좀 친근하게 지냈는데 애들이 짖궂어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박해일의 '거짓말'은 강혜정을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 시점에서 박해일은 강혜정을 '무진장'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연애를 추구할 수 있는 '현명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가지 간과하는 것, (혹은 별거 아니라고,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 경우 강혜정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치는 여자라는 세간의 소문은 '그대로' 남게 된다. 그것 얼핏보면 봉합인 것 같지만, 이미 여자 입장에서는 또 한번 (그 세계, 교직원과 학생들의 세계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이후의 봉합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문제가 봉합된다면 그후의 연애의 전개에서 두 사람의 권력 관계는 박해일 쪽에서 강혜정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체제로 정립(;;)된다.

그래서 나는 저 교육청 감사관들이 그대로 떠나간다면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참 난감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강혜정은 울부짖으면서 감사관들에게 박해일이 교사의 교생에 대한 권력을 이용해서 성폭행을 행사했다고 고발한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20분간 영화는 아예 성격이 달라져버린다. 이제 이 영화와 홍상수 영화의 거리는 우리 은하계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쿠데타(?)를 보고 마음 속으로 꺄악꺄악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벙찐 것은 우리 내무실 병장/상병들. 그들에게 이 상황은 해독불가능이었고, - 멀쩡하게 박해일을 좋아하던 강혜정이, '현명한' 행동을 한 박해일에게 저렇게 뒤통수를 때린다는게 -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중에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어느 상병에게 내가 상황을 순화시켜서 전달한 설명은 이랬다.

"상황이 반복되는거 아닙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정리되고, 또 자기만 바보가 된 채로 버림받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뭐 남자는 여자를 버리려고 저렇게 감사관들에게 설명한 건 아니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가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실 이것도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첨가되어야 할 두가지.

1) 강혜정이 감사관들에게 설명한 내용에는 한점의 거짓도 없다. (-_-;;) 일단 박해일이 한 짓은 다 성폭행이 맞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영상을 보기보다 듣기만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위인지까지는 정확히 판단이 안 선다.)

2) 이 시점에서 강혜정의 속마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은 그걸 알았을까? 이 상황엔 이미 이성의 간지가, 시나리오 작가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어떤 병장은 "얘기가 왜 이렇게 되나. 쓴 놈도 여기까지 쓰곤 어떻게 수습할 지 몰라서 후회했을 거야."라고 했는데, 천만에! 이제 이야기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박해일과 강혜정은 서로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의 차원으로 넘어가려면, 먼저 '사실'의 차원의 문제가 정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1)의 의미다. 무엇보다 중요한 2)의 의미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는 헤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은 강혜쩡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반복이다. 강혜정은 박해일의 '수혜(?)'를 입고 이미 사회적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그녀가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출발점이 필요하다. 대단히 판타지적이지만, 강혜정은 박해일을 과거 자신의 입장으로 몰아넣은 후, 박해일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물론 그녀 자신도 구원을 얻는다.

결국 박해일은 깔끔하게 학교에서 짤리고, 강혜정은 주변 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모든 오해(는 아니지만)를 해소한다. 그리고 학원계에서 빌빌대고 있느 박해일에게 어느날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1) 3일후? 2) 3달후? 3) 3년후? 대략 2)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 강혜정이 찾아온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던 박해일은 술이 들어가자 예전에 자기가 그토록 비웃던 강혜정의 방식대로 자신의 상처를 토로한다. 이제 헤겔의 말대로 진리가 오인을 통하여 구성될 시간이다. 강혜정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자러 갈까?"라고 말한다. 이 옥신각신 시츄에이션이 두 사람이 제일 '귀여워' 보이는 시점인데, 그 대사 중 강혜정의 "책임질께~"에서 나는 그냥 뒤로 넘어가 버렸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제물로 삼아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좋아하게 된 그 남자를 책임까지 진다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런 상황은 현실세계에선 거의 가능하지 않다. 상처의 연쇄고리는 대개 무한히 소급되며, 다들 그저 안 그런 척 하고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일종의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무실의 다른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오직 나 하나만을 즐겁게 만든 그런 종류의 동화였다.

옥신각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소주를 그딴식으로 들이키면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여관에서 깨어날 수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 장면을 보고 웃은 사람도 나 하나밖에는 없었다. 고참들이 보기에 박해일은 강혜정에게 한바탕 욕을 하거나 주먹을 휘둘러야 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관에서 나온 후 '대충' 연인이 되어 걸어가는 엔딩에 만족한 사람도 나 하나였다. 강혜정을 너무 귀엽다고 생각한 상병 한 사람을 제외하고. "책임지면 되지-. 뭐 다른 문제 있나." OTL

연애에도 목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애는 그것 자체로 충족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성숙. 이런 부산물이 수반되는 연애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애도 끝나는 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땐 적어도 이 연애의 종말로 인해 더 이상 상대방 성(性)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느니,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느니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할 때보다 상태가 좋아졌고, 연애도 일단은 하게 될 것 같으니 이만하면 이 영화는 해피 엔딩.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연애의 목적'을 점검해 보자.

박해일: 좋아하는 여자를 맛있게 먹는 것,을 넘어서는 뭔가도 가지고 있는데, 이 녀석은 그걸 말로 풀어낼 능력이 없다.

강혜정: 상처를 치유하기, 불면증을 치료하기, 자신이 상처입힌 사람 책임지기 (orz)

덧글: 이 글은 쓴지 오래되었다. 그동안 ssy, njt와 이 영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ssy는 "홍상수의 자장에서 자라난 이가 자기 식의 로맨틱 코메디를 선보일 때" 나올 수 있는 작품이었다는 반응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박해일은 강간범이라 평을 하기가 뭣하다."고 했다. njt는 "계속 '밀애'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 해피엔딩은 무슨 (웃음)."이라고 일갈 했다.

surfnsun

2007.05.12 04:44:28
*.180.124.89

아하, 감사관 장면에서 박해일이 강혜정에게 상처주려 한 게 아니었군요. 저는 카이만님 고참들과 정반대로 관점에서 그 장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의문이 풀렸네요. :)

낸시 랭에 대해 검색해보다 이 블로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글들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덕분에 며칠 간 즐거웠어요. 가끔 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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