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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형이상학 (1) - 고르기아스로부터

조회 수 1592 추천 수 0 2005.10.09 01:52:00
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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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의 문제, 특히 형이상학의 문제들의 중요성은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명증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냉소적인 이들에게는 할 일없는 이들의 탁상공론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도 먼 세상의 이야기로 인지될 뿐이다. 특히 냉소주의와 기독교의 기묘한 동거를 체화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형이상학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접을 찾기란 쉽지 않다. -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설파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전략은 회의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다. 첫째로, 회의주의자들의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은 상식인들의 형이상학에 대한 불신의 느낌을 훨씬 더 정밀한 언어로 표현해 준다. 따라서 상식인들은 그들의 이론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차츰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수준이 상식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회의주의자들 역시 회의주의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이므로, 그러한 깨달음은 철학 일반에 대해서도 나쁜 결과가 아니다. 둘째로, 회의주의자들의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을 살펴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형이상학의 본질을 통찰하는 길의 입구가 될 수 있다. 회의주의자들이 공격하는 부분, 바로 그곳이 형이상학이 취약한 부분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역사는 형이상학의 취약함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의 역사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필요성이 부정되는 시대라면, 우리는 흄을 통해 칸트로, 니체를 통해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택할 수 있다. - 혹은, 그러한 역류(逆流)가 불가능하다 해도 형이상학의 한 단면을 포착할 수 있는 계기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류를 시작해보기 전에 먼저 고르기아스를 통해 출발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고르기아스의 물음이, 학문 일반, 즉 앎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적해 보는 것은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방파제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중요하다.


2.
회의주의의 비조인 고르기아스는 우리에게 흔히 세가지 명제로만 알려져 있다.

이 세상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 해도, 말할 수 없다.


힐쉬베르거는 이 문장에 대해 "회의주의의 핵심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압축할 수는 없다."고 논평한다. 그러나 힐쉬베르거의 경악에 비하면, 이 문장을 접했을 때 고대인들이 느낀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식론의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철학의 문제로 부상한 것은 근대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적절히 대응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쉽사리 경악하지 않는 고대인의 귀족적인 윤리의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하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르기아스의 주장에 대한 플라톤의 논평까지도 함께 전한다.


(...) 저 말에 한 점이라도 진실이 깃들어 있다면, 고르기아스는 왜 말하고 있단 말인가? (...)


이 논평은 정당하면서 부당하다. 정당한 부분은 논리적인 성격의 것이다.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어떠한 앎도 가능하지 않다면, 그 앎이 가능하지 않다는 고르기아스적인 앎도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고르기아스의 명제는 참이라고 주장할 경우 자기 자신도 파괴해서 참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자살테제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논리적인 반박은 이미 논리적인 언어의 세계를, 세계를 기술하는 인간 종족의 언어의 세계를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르기아스의 말은 바로 그 언어의 세계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언어의 바깥을 지시하려고 한 고르기아스의 전술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타당함과는 별개로, 플라톤의 반박은 고르기아스가 들여온 언어 외적인 지평을 다시 언어 바깥으로 서둘러 몰아내려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서둘러 닫아버린 초월의 세계에 플라톤은 나중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언어의 세계를 지탱하는 튼튼한 버팀목으로 삼으려 한다. 이것은 플라톤이 형이상학의 난점에 대해 알고 있었던 위대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또한 고르기아스에 대해서는 진실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학문은, 우리의 인식은 바로 그 언어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 언어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를 기술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이 도구가 얼마나 목적에 충실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평할 수 없으므로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러셀의 말처럼 "우리가 세상이 라고 믿는 것, 크게 보면 그것이 바로 세상"이며, 포퍼의 말처럼 인간이 덤으로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세계2', 담론의 세계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슬로베니아 학파라면 바로 그것이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실재)와 구별되는 상징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덧붙이며, 철학을 날로 먹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물'이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세계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 세계가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고, 주제넘게 없는 것에 대해서도 앎의 느낌을 갖기도 한다.


고르기아스는 처음으로 '저 세계와 이 세계 사이에 교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거기에 서둘러 '없다.'는 대답을 덧붙인다. 그러나 진정한 무능은, 자신이 무능한지 유능한지도 판단하지 못하는 그러한 무능일 것. 고르기아스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우리들은 아예 그 질문에 대답할 엄두를 못 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고르기사으스의 결론을 뒤집어야 우리의 학문이, 우리의 앎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어야, 그 아는 바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대화가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3.
어쨌거나 우리는 대화를 한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의 말을 명료하게 이해했고, 나 역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과 그것에 대한 정당화 사이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대화를 한다. 실존주의자들과, 생철학자들과, 그리고 대다수 상식인들에겐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에겐 진리가 쉽다. 간명하다. 골칫거리가 아니다. 반면 그 존재하고 있는 대화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할 것인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라고 묻는 순간, 진리는 어렵다. 난해하다. 무지막지한 골칫거리다. 그 질문을 회피하고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회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정작 속내를 들춰보면 그 질문에 대한 정당화되지 않은 어떤 대답을 - 편견을 - 가지고 있게 십상이다.


어쨌든, 대화를 하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중으로라도 이렇게 믿고 있다.


이 세상엔 아무개가 있다.
나는 그 아무개에 대해 알 수 있다.
나는 그 앎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그러므로 너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문장 옆에 괄호를 치고 '도대체 어떻게?'라고 적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의 질문이, 유령처럼 우리의 삶을 배회한다. 원인을 찾는 습성은 목적을 찾아 헤매는 의지와 동일하며, 그 바탕에는 도덕적인 요구가 깔려 있다는 니체의 말이 맞다면, - 물론 그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기술하지만 - 그 질문은 우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최초의 질문'이라 부른다. 논리적인 연쇄관계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질문을 던지든 그 질문은 궁극적으로 저 '최초의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질문하는 동물이라는 속성을 띠고 있는 이상, 우리는 형이상학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실은 특정한 - 대개는 아주 조야한 - 형이상학에 안전하게 포박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어떤 소설에서 권력투쟁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단정을 듣는다. "세상에 게임은 하나밖에 없어. 왕좌(王座)의 게임." 나머지는 그 게임의 부속품이거나, 모사품일 뿐이라는 얘기일 게다. 그것이 힘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귀결이라면, 질문하는 인간의 귀결은 다음과 같지 않겠는가. "세상에 의문은 하나 밖에 없어. 형이상학적인 의문." 나머지는 그 의문의 부속품이거나, 모사품일 뿐.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대면하지 않고도, 아니 대면하지 않을 때에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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