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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카이만, 군인, 일병이었음. 이 영화 1차정기휴가 나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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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이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찬욱은, 본인 영화의 남성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좀 신경질을 부리면서 “복수는 보편적인 거다. 올드보이 주인공 여자라도 바뀔 거 별로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입대 직전에 본 어느 기사에서는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주인공이 여자다. 이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횡설수설은 그 자체로 징후적이다. 언어화시킬 수 없는 것을 만난 박찬욱의 곤혹스러움이 드러나는 거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내 가설은 이렇다. 원래 박찬욱은 그저 주인공을 여자로 바꾼 올드보이를 찍을 생각이었다. 대신 올드보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들을 조금 의식해서 몇부분 고쳐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박찬욱은 여자를 잘 몰랐다. 그리고 본인이 그렇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금자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지웠다. 이금자는 주인공이지만,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 주인공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 설명되는 주인공이다. 오대수의 독백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올드보이가 강박증의 영화라면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히스테리의 영화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더 있었다. ‘히스테리자의 복수극’이라면 이미 킬빌이 보여줬다. 브라이드는 빌을 죽이는데 성공한 후 욕실 바닥에서 울다가 웃는다. 이런 것이 히스테리자의 복수다. 브라이드는 여전히 빌에게 전이되어 있었고, 그를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브라이드는 빌의 시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빌을 죽였다. 그러나, 만일 다시 자신을 구성해줄 수 있는 시선, 딸의 시선을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브라이드가 빌을 죽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브라이드는 마마가 되면서 킬빌에 성공한 것.


이런 도식은 결국 이금자를 설명하던 나레이션이 딸의 목소리로 밝혀지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반복되는 듯하다. 하지만 다르다. 올드보이의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고, 그러면서도 킬빌을 피해가려고 하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영화는 박찬욱의 의도를 벗어나 요동친다.


정성일도 라캉을 끌어들여 이 영화를 평했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장면이 무엇인지는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읽어내야 하는 건 “백한상은 맥거핀이다.”와 같은 맥빠지는 소리가 아니다. 이금자가 도착증이라는 건 더더욱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 라캉을 불러놓고 엉뚱한 질문만 하는가. 이 영화야말로 주이상스(jouissance)에 관한 영화다. 이금자는 신경증에서 도착증으로 퇴행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신경증을 넘어가 버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라캉의 인간구별법에 대하여. 1) 정신병, 2) 도착증, 3) 신경증, 4) 신경증 너머. 정신분석학은 인간을 고치자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가 질병이라는 푸념이다. 일반적인 인간들은 대개 3)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3)의 세부적인 양태로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다. 보통 남자는 강박증이, 여자는 히스테리가 주도적으로 드러나지만 원래 두 가지는 대립되어 있다기보다는 혼합되어 있다. 가령 나는 남자치고는 히스테리가 꽤 센 편인데, 강박증은 그보다 더 세다. 4) ‘신경증 너머’는 실현되기 매우 어렵지만 논리적으로 가능은 하다고 보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그리고 주이상스를 느끼는 사람은 대충 3)과 4)를 넘나든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야말로 라캉이 지지하는 ‘윤리적 인간’이다.


강박증자는 타자를 부인하며, 타자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다. 백한상이 식탁에서 벌이는 정사씬을 생각해 보라. 적나라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백한상의 눈엔 여자가 구멍으로 밖에 안 보이는 거다. (백한상은 강박증치고도 증상이 너무 심한 편이기 때문에 도착증일 가능성도 있다.) 반면 히스테리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사람이다. 이금자는 히스테리자로부터 시작했다. 이택광님의 지적대로, 그래야 “이야기가 된다.” 딸을 위해 자기자신을 포기하는 그 행위는 히스테리자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이금자가 기자들 앞에서 범죄상황을 재연하는 장면을 호출해내자. 이금자는 자기 자신에게 윤리적 명령을 내렸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순서를 까먹어서 담당형사의 사인을 받은 이금자가 방석을 들고 인형의 입을 막는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방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인형의 목이 떨어진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이금자는 그 상황에 몰입하고, 쾌락을 느낀 것이다. 주이상스란 그런 종류의 쾌락이다. 그 순간 기자들이 평정심을 잃고 우르르 달려들어 셔터를 누른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주이상스를 느낀 여자를 앞에 두고 그들은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저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Che vuoi?)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 장면은 이금자가 백한상을 핍박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이금자가 잠시 백한상의 입을 자유롭게 하자, 백한상의 입에서 나온 대사가 가관이다. “금자야, 눈화장이 그게 뭐야-” 이것은 여전히 자신은 인식주체고, 너는 인식대상이라는 찌질한 남자 백한상의 자유선언이다.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달리 시도할 수 있는게 없었을 거다. 사실 이금자가 백한상에게 한번 말할 기회를 줬다는 것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전이가 남아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자유선언을 듣자마자 이금자는 다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백한상을 넘어뜨린다. 그리고 인형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한다. 주이상스다. 여기서 이금자는 사실상 복수를 완성한다. 아니, 해소한다. 복수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백한상은 이제 도대체 이금자가 복수할 만한 레벨이 아니다. 복수는 기본적으로 전이가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므로, 이금자가 갑자기 희생자가 넷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른 피해자들을 불러와 ‘우리의 복수’를 거행하는 것은 보는 관객들에게는 충격적이었겠지만 이미 이금자 본인에겐 그다지 중요한 장면이 아니다. 교실에서 이금자가 피해자들에게 ‘친절한’ 설명을 하는 걸 보라. 속죄도 못했고, 구원도 못 받았지만, 이제 이금자에겐 별로 거리끼는 게 없다.


이 영화가 속죄와 구원에 관한 영화라는 건 박찬욱의 변명이다. 복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는 게 너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속죄와 구원에 대한 영화조차도 아니다. 물론 이금자는 속죄도 못했고 구원도 못 받았다. 하지만 그건 이금자가 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너무 잘 나서 그런 거다. 설령 신(神)이 있다 한들, 신경증에서 신경증 너머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여자를 어떻게 구원해준단 말인가? 찜찜해서 그렇게는 못한다.  


이 영화는 '윤리적 여성'에 대한 영화다. 여자는 원래 존재론적으로 남자보다 10만배쯤은 우월한 동물인 것. 남자가 형이상학 혹은 여자에서 구원을 찾을 때, 여자는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윤리적 여성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이금자의 진정한 대립항은 백한상이 아니라 전도사다. 전도사야말로, 형이상학(기독교) 혹은 여자(이금자)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는 남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 대고 이금자는 사실 별로 할 말도 없다. 그래서 "너나 잘하세요."와 같은 시시한 대사가 나오는 것이다.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에 실패했다. 그것도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이 영화는 ‘괴작’이 되었다. 올드보이에서 쓰였던 만화적 구성은 이금자를 길들이려는 박찬욱의 몸부림이지만 그저 안쓰럽게만 보인다. 이금자는 박찬욱에게 해석되지 않는 ‘실재’의 앙금을 던진다. 박찬욱이 라캉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실수가 친절한 금자씨를 올드보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화로 만들었다. 원래 정신분석학을 잘 모르는 사람의 꿈이 더 분석하기 쉬운 법. 버벅거리는 박찬욱의 모습이야말로 친절한 금자씨가 실재에 대면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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