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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고참의 취향

조회 수 824 추천 수 0 2005.08.20 13:38:00
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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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렇게 맨날 얼굴에 상처내지 말고 '사제' 면도날 써. 요샌 그거 가지고 뭐라는 사람 아무도 없어."

"별 상관없습니다."

"왜? 누가 뭐라고 할까봐? 진짜 누가 뭐라 안 한다니까. 그리고 사실 별로 표도 안 나잖아."

"그게 아니라..."

고참 앞에서 말할 때엔 말꼬리를 흐리면 안 된다. 그래서 좀 민망한 소리라도 황급히 이어나가야.

"...제가 보급병인데, 뻔히 남아서 버리는 물품인걸 아는데, 다른걸 쓰기가 좀 그렇습니다."

이전에 이 비슷한 얘기를 했을 때 '정말로 이상한 얘기로군.'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S상병처럼, L상병도 그저 그 의견에 대한 코멘트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의 반응.

"그럼 너 짬먹으면 니 아래로는 다 보급품 써야 되겠다?"

절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만, 그 순간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냥 자기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은 그에게 불만이 있었던 게 아니라, 정말로 왜 생각이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지 궁금해서였다. 아마 그때 나의 표정은 고참들이 말하는, '갈굼당했을 때의 카이만의 액션'에 가까웠을 게다. 두눈 동그랗게 뜨고 '제가 뭘 잘못했나요?"라는 메시지를 얼굴에 담고 고참을 빤히 쳐다보는 그 액션 말이다. L상병이 순간 웃음을 터트리며 "아니라는 거야?"라고 되묻는다. "그런건 아니고....말입니다." 나로서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나 스스로 '사제 면도날을 써서는 안 된다.'라는 판단을 내릴 때, 거기엔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그것은 오직 나에 대한 명령일 수도 있고, 혹은 보급병이라는 직책을 가진 이에 대한 명령일 수도 있고, 가장 넓은 경우엔 모든 군인에 대한 명령일 수도 있다. 아마 그 판단이 전자에 가까울 수록 우리는 그것을 '취향'이라고 부를 것이며, 후자에 가까워질 수록 그것을 그 개인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취향과 윤리 사이에 어떤 건널 수 없는 레테의 강이 흐른다는 증거는 없고, 양자의 차이는 순전히 상대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나마 한쪽을 취향으로, 다른 쪽을 윤리로 불러야만 하는 양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보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취향과 윤리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 사람을 규제하는 어떤 명령이 취향으로 보이는지 윤리로 보이는지는 오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크기에 있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제약할 힘이 있을 때엔 그것이 윤리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엔 그저 취향에 머무르는 것. 그래서 L상병은, 나에게 힘이 생기면 자연스레 나의 행위를 제약한 그 격률을 다른 이들에게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을 제약할 때엔 똑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명령일지라도, '남'에게도 내리고 싶은 명령과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끼는 명령이 있고 그 구분이 적어도 내 머리 속에서는 명증하다. 합리주의자들 식으로 말하면 필연성과 개연성의 차이, 경험주의자들 식으로 말하면 강한 신념과 약한 신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그것이 없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말을 건네지도 못할 것이다. 나의 말하기가, 그저 나 자신을 복제하기 위한 조야한 권력의지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내가 인지한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입을 열 수 있을까. 쪽팔려서?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반응 속도가 느린 사람으로, 고참이 왜 이걸 안했냐고 하면 "아, 그거 저보고도 그렇게 하라는 얘기였습니까?"라고 되물어서 고참을 기가 막히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적응하려고 노력해도, 내가 사태를 인식하는 방식이 바뀔 수는 없는 것이며, 사실 바꾸고 싶지도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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