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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연애가 끝나고 난 뒤

조회 수 889 추천 수 0 2006.05.05 13:48:00
카이만, 군인, 꺾인 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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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이란 건 볼트나 너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물건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일단 '연애'라는 걸 시작하고 나면, 당신은 상대방의 성격에 꼭 맞는 볼트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노력해야만 한다.

성격과 취향의 파편들의 한가운데에, 당신은 하나의 기준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 기준을 중심으로 하나의 중심화 작용이 일어난다. 상대방의 빈 곳을 채워주는 당신의 성격, 그 곳을 중심으로 당신의 성격과 취향은 재조정된다. 당신이 변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당신의 일부였다. 다만 당신은 그 부분들을 도드라지게 하고, 나머지 부분들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숨겨놓을 뿐이다. 사랑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며, 그 이데올로기는 세계 속에서의 당신의 위치를 해명하는 일종의 목적론이다. 말하자면 당신은 상대방을 위해 있는 어떤 것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호불호의 감정이 옆 사람의 기분의 영향을 받는지. 스크린을 바라볼 때 당신은 두 가지를 모두 보고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영화와, 상대방의 기분. 두 가지가 조응하여 당신의 그 영화에 대한 판단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 당신이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 관한 당시의 판단을 점검하려고 한다면, 당시 누구와 영화를 봤는지, 또는 그 소설에 대해 누구와 얘기를 나눴는지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 사람과 함께 하던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상대방의 결여를 중심으로 나의 구조를 건설했으므로, 연애가 끝나고 난 직후 정말로 못 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으로 바라보자면, 중심화의 과정이 일어난다면 그에 대응되는 정반대의 과정, 탈중심화의 과정이 진행될 법도 하다. 연애가 끝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연애로 이행하던 시기에는 이러한 사색이 그야말로 논리적인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과정을 결코 경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일년간 나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을 목도했으며, 그건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 고통만큼이나 짜릿한 해방감을 주기도 했다.

여기, 당신이 그동안 돌보지 않은 당신의 부분들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씩 콩나물 대가리처럼 고개를 내밀고, 나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어떤 것들은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가뭄에 콩나듯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있다. 그 행렬이 주욱주욱 이어질 때면,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이 함께 떠오르기도 한다. 친구란 것도 결국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한 친구였기 때문일까. 중심화 과정에선 친구들의 중요성마저 새로운 관점으로 재편성되곤 한다. 물론 탈중심화가 진행되면 잊혀졌던 모든 친구들의 지위도 복권된다. '나'는 더 이상 통합된 주체가 아니다. 이 녀석과 전화를 할때는 이러하고, 저 녀석과 전화를 할때는 저러하다. 나는 갈팡질팡하는 게 아니라 그저 분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분열을 그저 말없이 수긍한다. 내가 못 견뎌낼 정도의 혼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몰락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제국의 낙조이다. 당신은 가끔 옛 도성의 폐허를 방문해 보고 싶을 것이다. 상대방이 좋아했던 것, 상대방으로 인해 좋아하게 된 것을 다시 보고 예전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확인해 본 것들은 물론 여전히 다시 좋거나 더 이상 좋지 않거나 한다. 상대방은 나를 잘 알았거나,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어찌됐건 그것들은 이제 모두 당신의 경험이다. 언젠가 당신은 그것들을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헠헠

2013.02.01 07:04:12
*.113.121.37

"여기, 당신이 그동안 돌보지 않은 당신의 부분들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씩 콩나물 대가리처럼 고개를 내밀고, 나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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