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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직의 미덕?

조회 수 1821 추천 수 0 2006.05.02 02:24:00
카이만은 군인이고 상병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덧글 논쟁이 굉장히 흥미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다 옮기는 것이 더욱 흥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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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이 미덕이라면, 부정직은 악덕일 게다. 그러나 나는 이 명쾌하고 상식적인 구별이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가령 거짓말이 비난받아야 마땅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한겨울의 찬물샤워를 각오하고 나 혼자 중대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운대가 잘 맞아서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횡재에 즐거워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묻는다. "뜨거운 물 나와?"


"응."이라고 말하면 중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 같아서 "아니."라고 했다고 치자. 그리고 무사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그 다음 순간부터 뜨거운 물이 나온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액션("아 c8 괜히 먼저 샤워했다!")까지 연출해서 중대원들의 의심을 피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윤리적인 비난은 가능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경우 타인의 몫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행위가 그른 것이며, 거짓말은 그에 대한 수단으로써 그른 것이지, 그 자체로 그른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여자친구를 둔 남자가 바람을 피고 있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그 행동을 숨기고 있다. 그가 그런 줄타기에 성공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윤리적인 비난은 가능하다. 이 경우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연애를 일대일 관계로 정의하고 남자의 행위가 그 정의에 위반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은 비록 그런 정의를 강하게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상대방은 연애가 일대일 관계라고 믿는 상태로 놓아두고 혼자 다른 욕망에 의해 행동했다는 점을 비난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연애의 정의에 입각한 비난이므로 거짓말은 논의될 자리가 별로 없고, 주로 후자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은 거짓말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 경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가 그른 것이며, 거짓말은 그에 대한 수단으로써 그른 것이지, 역시 그 자체로 그른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이런 구별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나는 말하자면 이런 사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마땅히 내 것이라고 치자. 그 물건을 내가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거짓진술(가령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든지.)을 하는 것도 그른 일일까?


또 이런 사례도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며, 그중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약속장소에 늦었을 때 내뱉는 "차가 막혔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른 일일까?


나는 그 경우 윤리적인 비난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개인의 속사정을 타인에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공지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며, 타인과의 불필요한 충동을 피하려는 욕망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참말'이 무기가 되는 특정한 국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연애소설이나 드라마 따위를 보면, 한두번씩은 꼭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입히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나온다. 거짓말이 그 자체로 윤리적인 악이라면, 그런 이를 비난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최소한 나의 윤리적 직관과는 위배된다.


거짓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난 논증은 칸트에게서 온다. 칸트에 의하면, 거짓말을 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은 참말을 하리라고 기대하면서 한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거짓말은 불가능하며, 만일 모든 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인간 사회는 무너져버린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슷한 의미에서 거짓말은 참말의 맥락에 대한 기생일 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즉 거짓말은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르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매우 타당하지만 내 논지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앞서 말한 두 개의 사례에서, 나는 타인과 이권이나 책임이 교차하는 상황에선 거짓말이 그릇된 행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올바르다. 그러나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영역도 있으며, 그 영역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효력을 가지기 힘들다.


나의 거짓말 옹호 논증은 일반적인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의 옹호 논증에서는 거짓말 일반은 일단 기본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인정해 놓고, 그중 일부를 선량한 의도나 결과의 이득에 의해서 구원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여기 이렇게 비난할 수 없는 거짓말이 있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그 자체로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어떤 것의 수단으로 관계할 때는 그르고, 다른 것의 수단으로 관계할 때는 그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진실을 말하는 것 역시 그릇된 행위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는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구별함으로써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투명한 의사소통이 요구되는 부분에서는 바로 그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거짓말이 그르다. 그러므로, 투명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 않는 사적인 부분에서는 애초에 거짓말이 그르지 않다. 모든 거짓말이 그르다는 것은 문법적 착시 현상이다. 수단적으로 도출된 원리를 근본원리로 삼고 보편화시켜버린 오류인 것이다. 내 초콜렛을 내가 까먹는 것을 숨기거나, 아침에 늦게 일어났으면서 "차가 막혔어."라고 하거나, 그런 일을 전 인류가 하더라도 인간 사회는 붕괴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인류의 대부분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래도 인간 사회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거짓말을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재반론이 가능하다. "과연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원리를 규정할 만큼 명확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표명될 수 있고, 그 의문에서 더 나아가 "(그러므로) 공사 구별이란 결국 거짓말하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식의 해체론적인 회의를 표명할 수 있다.


일단 이러한 의문과 회의는 정당하다. 특정한 거짓말을 옹호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런 회의의 잣대를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의definition의 문제로 다시 들어가자면 '공적인 것'이라 말할 때 우리는 인간 상호간에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을 떠올리며, '사적인 것'이라 말할 때 우리는 개개인에게 국한되며 침해받을 수 없는 성격의 영역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개인에게 침해불가능한 권리다, 따라서 사적인 것이다, 따위의 정의가 공사구별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저런 식의 정의는 경험적으로는 검증할 방법이 없고 연역을 위해선 형이상학을 요청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물론 저러한 정의를 내렸다. 그때 그들은 인간은 본래 개인적인 존재였으며, 사적인 세계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공적인 영역을 건설했다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적 입장에 의거해 그런 정의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원자화된 개인이 모여 사회를 만들었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원자화된 개인은 실체로써 존립할 수 없다. 먼저 공적인 영역이 생기고 나중에 사적인 영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인 영역의 침해불가능성을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정의하기가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로티와 같은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아예 이렇게 정의항과 피정의항을 전도시켜 버린다.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공적(公的)인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합의 될 수 없는 것은 사적(私的)인 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도는 난문aporia은 해결하지만 사회문제는 그대로 남겨둔다. 정치철학자들이 해야 할 '합의'를 대중에게 떠넘겨 버린 것이다.


따라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어쩌면 해답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별이 어렵다고 해서 실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사구분을 '그르다'고 단정하고 모든 영역을 하필 공적인 영역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양자 사이엔 분명 논리적 비약이 있다. 공사구별이 어렵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공적인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행동주의자들의 말처럼 모든 것이 공적인 것으로써 발생했다고 해도, 거기서 '모든 것이 공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당위가 파생하는 것도 아니다. 흄의 말처럼 사실과 당위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적인 몫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넓은 의미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말로 치부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너의 정당한 몫이며 권리라면, 공적인 세계에 당당히 공표하고 쟁취할 것이지 왜 숨긴단 말인가? 이런 식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그 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해 논쟁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논쟁이 생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 있고 관습이 있는데 왜 모든 것을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더욱이 그런 논변은 약자에 대한 치명적인 테러다. 아테네라면 소피스트sophist가, 스파르타라면 전사(戰士)가, 중세유럽이라면 기사(騎士)가,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자(富者)가 이기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것이며 나머지 놈들에게는 최소한의 판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말은 많은 경우 "그럼 그것도 뺏어가 줄테니."를 의미한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못 지키는 것이고, 만일 윤리가 있고 그 윤리학 안에 공통의 인간본성을 지닌 보편적인 인간이 등장한다면, 그 윤리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도 지켜야 할 것이다.


한편 내 논증이 특수한 몇몇 관계, 가령 부모-자식 관계나 교육자-피교육자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정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어린아이는 아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적 공간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고 (혹은 제한되어 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거짓말은 아이의 오류가 아니라 교육의 실패를 드러낸다. 교육자가 자신의 세계에 무능하거나 적대적이라고 느낄 때 아이는 거짓말을 한다. 거기다가 "솔직하게 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어린아이였을 때의 나를 성찰해 보자면, 내 많은 행동에는 이유가 없었다. 부모와 선생님에게 이유를 대는 그 과정이 바로 체계적으로 내 행동에 의도를 대입하는 방식을 학습해 가는 과정이다. 거기엔 참말과 거짓말의 윤리적 이분법은 없고 다만 아이가 공적인 세계로 편입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교육은 어차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거기서 거짓말이 따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의 '진심'을 누군가 말할 때 차라리 나는 이런 방법을 떠올린다. 정신분석가가 피분석자에게 말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라."고 하는 것. 그러나 그때 그가 말하는 '진실'은 참말과 거짓말의 이분법 이전에 있는 것이며, 흔히 많은 교육자들이 원하는 진실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이 납득할 만한 진실을 요구한다. 그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그다지 교육과 상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보편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을 넘어서 그릇된 일이 된다. 그건 모든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연애하듯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일는지. 그나마 연애관계는 대부분의 경우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라도 가지고 있지 어떤 이가 내게 "숨기지 말라."고 요구할 때는 대개 모종의 권력관계가 성립한다. 그게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보편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그 그릇된 일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두는게 좋다.

http://kaiman.8con.net/blog/rserver.php?mode=tb&sl=79
milkwood    06/05/02 22:10  x
이 글의 전체적인 논지와 후반부의 논리에 대해서는 공감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모든 사람을 정직의 잣대에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반부의 예의 방식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이 경우 타인의 몫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행위가 그른 것이며, 거짓말은 그에 대한 수단으로써 그른 것이지, 그 자체로 그른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행위와 수단을 구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스틴적 개념으로 말해서 저는 거짓말은 그 자체로 행위 (즉 speech act)라고 생각하거든요. 즉, 내가 타인의 몫을 갈취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는 건 타인이 뭐라고 침범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발화를 함으로써 그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거짓말 자체가 그 행위가 되는 거죠. 물론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써 속이는 방법도 있겠죠. 그 경우에는 신체적 동작이 그 행위가 될 것이니 거짓말이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거에요. 거기서 거짓말을 비난할 지점이 등장합니다. 사실, 첫번째 예에서 저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서도.

'연애의 양다리'에 대한 예는 제가 이전에 썼던 논지와 유사하군요. 거기서도 거짓말이 행위라는 점으로 비난할 수 있을 거에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한다는 발화행위.

그 양다리 경우에서 배신당한 상대가 더욱 분노를 느끼는 경우는 회피하다가 그렇게 되어버린 경우보다,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일 거에요. 즉, 전화를 안 받는다기보다 전화를 받아서 거짓말을 한 경우. 이는 말을 하는 행위가 더 적극적인 부정직의 행위이기 때문일 겁니다. 말이라는 건 부정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인 거죠.

물론 카이만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어찌보면 적극적인 말의 행위가 더 분노를 산다는 것은 단지 핑계일 뿐이고, 사람들은 속임을 당하는 경우가 다만 불쾌한 것일 뿐, 어찌되었건 상관은 없겠죠. 하지만 거짓말은 비난을 할 포인트를 제공해줍니다. 개인적 욕망의 외표적 행위에는 분노늘 느껴도 정당하게 생각하는 거죠. 사람에게서 그것까지 빼앗는다면, 너무 인생이 합리적이기만 하지 않겠어요.
노정태    06/05/03 10:10  x
밀크우드/ 거짓말이 그 자체로 발화행위라는 님의 논지를 받아들인다면, '옳은' 거짓말도 있을 수 있다는 카이만의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거짓말 자체의 선악을 따져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반면 거짓말을 언어 행위로 본다면 목적 여부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선악 여부도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일반적인 거짓말 구원 논증과 비슷한 궤도를 따라가게 되겠죠. 거짓말은 옳지 않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옳다, 이렇게.

하지만 발화된 거짓말이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윤리적 비난이 더 쏠려야 하는 것 또한 옳다고 생각합니다. 카이만이 들었던 예를 받아서 설명해보자면, '뜨거운 물 나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과, 못들은 척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분명 다르거든요. 만약 상대방이 '정말 더운 물이 나오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샤워장에 들어선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카이만을 불신하는 행위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따라서 상대방이 느끼는 배신감의 정도도 큰 폭으로 차이가 납니다. 대개 전자의 경우 후자보다 훨씬 더 큰 실망감이 생기죠.

요컨대 참말을 하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지만 그 둘만으로 사람의 언어 행위가 다 채워져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참말을 하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겠죠. 암 환자 본인에 대해서는 일단 침묵이 정답이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카이만은 거짓에 대한 묵인을 거짓말의 발화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말마따나 문법적 착시현상을 불러오는 첩경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경우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카이만의 바탕 논지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그 자체가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까발리는 것이 더 큰 악이거나 발화자에게 지나치게 큰 타격을 주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 있는 상황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듯, 상황의 폭력성이 대항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죠. 그 둘은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카이만의 논증은 재미있지만, 폭력적 상황에 처한 대응 악행의 윤리적 평가라는, 윤리철학의 어려운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글이겠지만 저는 회피하고 있다고 보는거죠. 만약 사람의 행위 중 어떤 것을, 그것이 수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윤리적 평가를 받지 말아야 할 무언가로 보기 시작한다면, 그 면죄부의 추가 발행 여부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도 끝도 없는 논쟁을 벌여야 합니다. 혹은 살인처럼 명명백백한 악에 대해서도, 그게 왜 본질적으로 악한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고요. 분명 누군가는 '목적이 정당하다면 사람을 죽여도 악한 행위가 아니다'라는 뻘소리를 하기 시작할테니까요.

카이만의 입장을 '목적주의'라고, 그리고 밀크우드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입장을 '행위주의'라고 편의상 이름붙여본다면, 일단 행위주의가 상식에 부합합니다. 다만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행위가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그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오랜 난제를 껴안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 난제 자체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행위자를 용서하는 쪽을 택합니다.

반면 거짓말에 대한 윤리적 평가에서 카이만의 목적주의를 택한다면, 특정한 목적 하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그 체계 하에서, 정당한 목적의 거짓말로 인해 손해를 입은 사람은 분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상대방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결과로서 도출되는 그러한 상황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카이만 식 목적주의를 받아들일 때, 정당한 거짓말의 상대방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자신이 받게 된 부득이한 피해를 그저 묵인하는 것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남자답거나, 성숙하거나, 쿨하거나, 합리적이거나, 아무튼 멋진 수식어를 받을 수 있는 대처 방식이겠죠. 하지만 카이만의 목적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저 대처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식의 논리 전개를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렇게 구성되어 있는 세계는, 적어도 제게는, 비인간적이거든요.
milkwood    06/05/03 14:52  x
만약 거짓말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행위로 보는 하에서도 저는 카이만님의 논지는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글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눈 것인데요, 솔직히 이 글의 경우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한테는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 다시 노정태님의 논지로 돌아가서 거짓말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행위로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짓말을 하나의 행위로서 다시 윤리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거짓말 (F)는 not T라는 간단한 논리 하에서 행동해서 거짓말이 비윤리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려면 T는 항상 윤리적인 행동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거짓말을 비난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는 여기서 목적주의와 행동주의가 별개의 것이라 생각지 않아요. 즉, T가 목적에 의거 윤리적으로 기능할 때만 F를 거부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T와 F는 윤리의 문제와 같은 평가에 있어서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카이만님의 입장이 아닐까 해석한다는 거죠. '물리적 현실을 기술하지 않음'이 F가 되어버린다,는 건 물리적 현실을 견고하게 보고 그에 가치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제 논지에서도 수단에 따라 거짓말이 더 유리해질수 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입장을 긍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는 진실 자체가 아직 기각되지 않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거짓말을 강하게 비판할 때 나오는 모든 오류들을 경계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차가 막혔어'라고 말하는 거짓말은 자기를 보호한다는 자기 욕망의 발화라는 면에서 비윤리적인 거짓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차는 막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행위에 있어서 또한 윤리적 가치를 크게 부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저처럼 남의 블로그에 와서 짜증나는 덧글을 달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짜증나니까 저리 가시오'라고 말하는 게 진실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들은 대신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저는 이게 전자는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살 수 있고, 후자는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기 때문에 이 거짓말은 윤리적이 된다기보다, 본질적으로 두 진술 사이에는 윤리의 차이가 크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노정태님이 지적하신 '폭력적 상황에 처한 악행의 윤리적 평가'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신 부분도 옳다고 생각은 합니다. 왜냐면 '악행'이라고 말할 때는 거기에 본질적으로 가치 평가가 개입되어 있고,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긍정적 가치 평가를 받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폭력적 상황'이라는 자극이 이 '악행'을 상쇄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를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두 가지 양가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순간 양비론자가 되어버렸는데. 이처럼 양가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처럼 어느 경우가 되어도 옳거나 둘 다 그르거나 한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면요.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저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거짓말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동조할 수 밖에 없게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덧글에 카이만님의 이 글의 '전체적인 논지'에 대해서 공감을 한다고 한 거고, 후반부의 '논리 전개'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다고 말한 거에요. 후반부의 '논지'까지 다 공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오히려 노정태님의 반목적주의(편의상 이렇게 이름붙이면) 이런 게 더 핫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 쪽이 더 '초'인간적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써놓고 보니까 노정태님이 하신 얘기를 그냥 반복한 느낌인데, 약간 하이라이트된 부분이 다를 뿐이지 않나 싶기도 하군요.
카이만    06/05/09 15:51  x
어쩌다보니 제가 답변드리기 전에 문제가 그럭저럭 정리된 것처럼 보이네요. 그래도 한두가지만 말하고 넘어갈게요.

1) 아마 저는 굳이 따지자면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행동주의자 쪽에 더 가까울 거에요. 그러니까, '목적'이니 '수단'이니 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인' 사용이었던 거지요. 전반부의 사례들은 '비난할 수 있는 거짓말'에 대한 사례제시이지요. (두분의 비판에서 이 부분이 좀 혼동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 거짓말들은 저도 비판하고 있는 것들인데.)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 행위들이 외부세계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데, 그 영향의 근원은 그 진술이 참이냐 거짓이냐, 라는 참 거짓의 문제와는 별도의 것이더라, 뭐 이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거짓진술이 그런 식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겠구요.

2) 이 글의 출발점은 사실 '참'이냐, '거짓'이냐, 라는 물음을 던지기가 애매한 국면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술을 하는 규칙을 배우는 그 국면에는 참말도 거짓말도 없더라, 뭐 이런 인식. 그리고, 그럴 때 참말을 요구하는건 사기에 가까우며, 사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참말을 원하는 것도 아니더라. 뭐 이런 경험담에서 출발하죠. 글의 후반부가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 납득할 만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탄생한 맥락의 타당성과, 논의 자체의 타당성은 별개의 것이니 두분의 비판은 새겨들을 지점이 있어요. 사실 어차피 제 입장에서는, 재미있자고 쓴 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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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대고구려사 역사 중국에는 없다 : 고구려사를 수호하는 ‘다른 민족주의’ 하뉴녕 2006-06-20 1102
216 가을의 전설 하뉴녕 2006-06-16 939
215 천박함에 대하여 하뉴녕 2006-06-13 949
214 선량함에 대하여 하뉴녕 2006-05-23 941
213 철학, 역사를 만나다? [2] 하뉴녕 2006-05-16 1139
212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 호메로스가 없어도 하뉴녕 2006-05-12 903
211 연애가 끝나고 난 뒤 [1] 하뉴녕 2006-05-05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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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어차피'의 화용론 하뉴녕 2006-04-28 1140
208 혼네의 민주주의 [1] 하뉴녕 2006-04-25 972
207 의사소통의 바깥 하뉴녕 2006-04-21 843
206 '바보'의 판타지 하뉴녕 2006-04-18 1358
205 자유 [2] 하뉴녕 2006-03-21 1186
204 변방 무협의 길 하뉴녕 2006-03-17 1223
203 악전고투의 판타지 [1] 하뉴녕 2006-03-14 953
202 강호무림이라는 공간 하뉴녕 2006-03-07 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