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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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은 군인이고 상병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덧글 논쟁이 굉장히 흥미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다 옮기는 것이 더욱 흥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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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이 미덕이라면, 부정직은 악덕일 게다. 그러나 나는 이 명쾌하고 상식적인 구별이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가령 거짓말이 비난받아야 마땅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한겨울의 찬물샤워를 각오하고 나 혼자 중대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운대가 잘 맞아서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횡재에 즐거워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묻는다. "뜨거운 물 나와?" "응."이라고 말하면 중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 같아서 "아니."라고 했다고 치자. 그리고 무사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그 다음 순간부터 뜨거운 물이 나온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액션("아 c8 괜히 먼저 샤워했다!")까지 연출해서 중대원들의 의심을 피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윤리적인 비난은 가능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경우 타인의 몫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행위가 그른 것이며, 거짓말은 그에 대한 수단으로써 그른 것이지, 그 자체로 그른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여자친구를 둔 남자가 바람을 피고 있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그 행동을 숨기고 있다. 그가 그런 줄타기에 성공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윤리적인 비난은 가능하다. 이 경우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연애를 일대일 관계로 정의하고 남자의 행위가 그 정의에 위반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은 비록 그런 정의를 강하게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상대방은 연애가 일대일 관계라고 믿는 상태로 놓아두고 혼자 다른 욕망에 의해 행동했다는 점을 비난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연애의 정의에 입각한 비난이므로 거짓말은 논의될 자리가 별로 없고, 주로 후자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은 거짓말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 경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가 그른 것이며, 거짓말은 그에 대한 수단으로써 그른 것이지, 역시 그 자체로 그른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이런 구별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나는 말하자면 이런 사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마땅히 내 것이라고 치자. 그 물건을 내가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거짓진술(가령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든지.)을 하는 것도 그른 일일까? 또 이런 사례도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며, 그중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약속장소에 늦었을 때 내뱉는 "차가 막혔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른 일일까? 나는 그 경우 윤리적인 비난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개인의 속사정을 타인에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공지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며, 타인과의 불필요한 충동을 피하려는 욕망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참말'이 무기가 되는 특정한 국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연애소설이나 드라마 따위를 보면, 한두번씩은 꼭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입히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나온다. 거짓말이 그 자체로 윤리적인 악이라면, 그런 이를 비난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최소한 나의 윤리적 직관과는 위배된다. 거짓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난 논증은 칸트에게서 온다. 칸트에 의하면, 거짓말을 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은 참말을 하리라고 기대하면서 한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거짓말은 불가능하며, 만일 모든 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인간 사회는 무너져버린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슷한 의미에서 거짓말은 참말의 맥락에 대한 기생일 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즉 거짓말은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르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매우 타당하지만 내 논지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앞서 말한 두 개의 사례에서, 나는 타인과 이권이나 책임이 교차하는 상황에선 거짓말이 그릇된 행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올바르다. 그러나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영역도 있으며, 그 영역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효력을 가지기 힘들다. 나의 거짓말 옹호 논증은 일반적인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의 옹호 논증에서는 거짓말 일반은 일단 기본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인정해 놓고, 그중 일부를 선량한 의도나 결과의 이득에 의해서 구원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여기 이렇게 비난할 수 없는 거짓말이 있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그 자체로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어떤 것의 수단으로 관계할 때는 그르고, 다른 것의 수단으로 관계할 때는 그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진실을 말하는 것 역시 그릇된 행위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는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구별함으로써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투명한 의사소통이 요구되는 부분에서는 바로 그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거짓말이 그르다. 그러므로, 투명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 않는 사적인 부분에서는 애초에 거짓말이 그르지 않다. 모든 거짓말이 그르다는 것은 문법적 착시 현상이다. 수단적으로 도출된 원리를 근본원리로 삼고 보편화시켜버린 오류인 것이다. 내 초콜렛을 내가 까먹는 것을 숨기거나, 아침에 늦게 일어났으면서 "차가 막혔어."라고 하거나, 그런 일을 전 인류가 하더라도 인간 사회는 붕괴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인류의 대부분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래도 인간 사회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거짓말을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재반론이 가능하다. "과연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원리를 규정할 만큼 명확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표명될 수 있고, 그 의문에서 더 나아가 "(그러므로) 공사 구별이란 결국 거짓말하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식의 해체론적인 회의를 표명할 수 있다. 일단 이러한 의문과 회의는 정당하다. 특정한 거짓말을 옹호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런 회의의 잣대를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의definition의 문제로 다시 들어가자면 '공적인 것'이라 말할 때 우리는 인간 상호간에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을 떠올리며, '사적인 것'이라 말할 때 우리는 개개인에게 국한되며 침해받을 수 없는 성격의 영역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개인에게 침해불가능한 권리다, 따라서 사적인 것이다, 따위의 정의가 공사구별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저런 식의 정의는 경험적으로는 검증할 방법이 없고 연역을 위해선 형이상학을 요청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물론 저러한 정의를 내렸다. 그때 그들은 인간은 본래 개인적인 존재였으며, 사적인 세계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공적인 영역을 건설했다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적 입장에 의거해 그런 정의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원자화된 개인이 모여 사회를 만들었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원자화된 개인은 실체로써 존립할 수 없다. 먼저 공적인 영역이 생기고 나중에 사적인 영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인 영역의 침해불가능성을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정의하기가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로티와 같은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아예 이렇게 정의항과 피정의항을 전도시켜 버린다.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공적(公的)인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합의 될 수 없는 것은 사적(私的)인 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도는 난문aporia은 해결하지만 사회문제는 그대로 남겨둔다. 정치철학자들이 해야 할 '합의'를 대중에게 떠넘겨 버린 것이다. 따라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어쩌면 해답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별이 어렵다고 해서 실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사구분을 '그르다'고 단정하고 모든 영역을 하필 공적인 영역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양자 사이엔 분명 논리적 비약이 있다. 공사구별이 어렵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공적인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행동주의자들의 말처럼 모든 것이 공적인 것으로써 발생했다고 해도, 거기서 '모든 것이 공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당위가 파생하는 것도 아니다. 흄의 말처럼 사실과 당위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적인 몫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넓은 의미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말로 치부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너의 정당한 몫이며 권리라면, 공적인 세계에 당당히 공표하고 쟁취할 것이지 왜 숨긴단 말인가? 이런 식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그 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해 논쟁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논쟁이 생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 있고 관습이 있는데 왜 모든 것을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더욱이 그런 논변은 약자에 대한 치명적인 테러다. 아테네라면 소피스트sophist가, 스파르타라면 전사(戰士)가, 중세유럽이라면 기사(騎士)가,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자(富者)가 이기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것이며 나머지 놈들에게는 최소한의 판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말은 많은 경우 "그럼 그것도 뺏어가 줄테니."를 의미한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못 지키는 것이고, 만일 윤리가 있고 그 윤리학 안에 공통의 인간본성을 지닌 보편적인 인간이 등장한다면, 그 윤리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도 지켜야 할 것이다. 한편 내 논증이 특수한 몇몇 관계, 가령 부모-자식 관계나 교육자-피교육자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정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어린아이는 아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적 공간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고 (혹은 제한되어 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거짓말은 아이의 오류가 아니라 교육의 실패를 드러낸다. 교육자가 자신의 세계에 무능하거나 적대적이라고 느낄 때 아이는 거짓말을 한다. 거기다가 "솔직하게 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어린아이였을 때의 나를 성찰해 보자면, 내 많은 행동에는 이유가 없었다. 부모와 선생님에게 이유를 대는 그 과정이 바로 체계적으로 내 행동에 의도를 대입하는 방식을 학습해 가는 과정이다. 거기엔 참말과 거짓말의 윤리적 이분법은 없고 다만 아이가 공적인 세계로 편입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교육은 어차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거기서 거짓말이 따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의 '진심'을 누군가 말할 때 차라리 나는 이런 방법을 떠올린다. 정신분석가가 피분석자에게 말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라."고 하는 것. 그러나 그때 그가 말하는 '진실'은 참말과 거짓말의 이분법 이전에 있는 것이며, 흔히 많은 교육자들이 원하는 진실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이 납득할 만한 진실을 요구한다. 그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그다지 교육과 상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보편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을 넘어서 그릇된 일이 된다. 그건 모든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연애하듯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일는지. 그나마 연애관계는 대부분의 경우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라도 가지고 있지 어떤 이가 내게 "숨기지 말라."고 요구할 때는 대개 모종의 권력관계가 성립한다. 그게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보편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그 그릇된 일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두는게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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