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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차피'의 화용론

조회 수 1140 추천 수 0 2006.04.28 13:47:00
카이만, 군인, 상병 꺾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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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는 1년 고참을 '아버지' 군번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05년 1월인 내게 '아버지'는 04년 1월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 전역한 그들 중 진짜로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위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업무상 '사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니셜은 HSB이지만, 이니셜로 부르는 건 너무 번거롭고 우연히 그의 이니셜은 '화수분'과 같으니까 편의상 그를 화수분 군이라고 칭하기로 하자.


묘한 부분에서 성실함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던 그는 종종 내 언어 생활을 간섭했다. 나는 화수분의 간섭을 통해서, 내가 '어차피'라는 말을 정말로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을 지독히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라는 말에는 발전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여기가 군대라고 해도 나의 냉소주의적인 근성은 변하지 않아서 거기다 대고 " '어차피' '발전'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해버린 적도 있다. 다행히 그는 그런 식으로 두세번 꼬아서 비난하는 데에는 무신경하거나 관대한 편이었다.


여하간, '어차피'라는 말에는 내 성격이 묻어있기는 하다. 나는 말하자면 내 딴에는 리얼리스트로, '해서 변하는 일'과 '해서 변하지 않는 일'을 구별하며, 후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어차피'라고 표현한다. 노정태라면 여기다 대고 '그게 무슨 리얼리즘이냐, 귀차니즘이지.'라고 반격했겠지.


그래서 단어 하나 안 쓴다고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차피;가 금지당하자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단어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수분 군은 수고스럽게도 그 단어들을 적발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먼저 '원래'라는 범용한 단어가 적발되었고, '그래봤자'라는 좀더 긴 단어가 적발되었다. 날이 갈수록 블랙리스트는 늘어만 갔고 그와 나의 숨바꼭질도 그가 전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정치적인 냉소주의자는 아니지만, 냉소주의자의 기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군대에서 나는 영악한 속물처럼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바깥에서 나는 '해서 변하는 일'과 '해서 변하지 않는 일' 이외에도 '안 변하지만 해야 되는 일'이라는 세 번째 범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나는 그 세 번째 범주를 폐기해 버렸다.


군대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심오한 지혜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나, 반대로 군대에서 몹쓸 것을 배워온다고 믿는 이들에게나, 이것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가언명법이며, 실천적 훈계에 불과할 따름으로, 다시 상황이 변하면 또 다시 바뀌게 될 그런 종류의 준칙이다. 이곳은 사회와 달리,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결국엔 위치가 상승하고, 거부해 봤자 나 자신에겐 군생활이 늘어나는 것 이외의 변화가 없었고,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할 때도 이미 군대는 변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했기 때문에, 나는 이런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다른 방식으로 가혹한 곳이며,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냉소주의적 언명은 다시 그것을 반영하는 나의 냉소주의에 부딪혀 반사되기 마련이다. "무슨 수로?" 원래 완전히 일관된 회의주의가 불가능한 것처럼, 완전히 일관된 냉소주의도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냉소적 반격에 허를 찔리지 않을 보편적인 냉소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냉소하지 않아야, 다른 무언가를 냉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권을 냉소하는 어떤 이들이 "너희들로 인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냉소할 때에, 나는 그에 맞서 "너희들이 출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냉소해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출세가 필요없는 위인들도 있지만, 그 분들은 '어차피' 이 논의와는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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