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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혼네의 민주주의

조회 수 972 추천 수 0 2006.04.25 02:19:00
카이만은 상병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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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국주의자들은 비서구 세계의 역사는 정체되어 있으며,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건전한' 발전단계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오늘날 제 3세계의 국가주의자들은, 자신의 역사에서 그 '건전한' 발전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급급하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주장은 동전의 양면으로, 사실상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생각해 보라. 학술 논쟁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토론도 아닌 이 이상한 논쟁에서 쌍방 모두에게 근대는 공히 '좋은 것'이다. 그리하여 한쪽에서는 그 '좋은 것'을 일본이 줬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이러이러한 나쁜 짓을 했으니 그 '좋은 것'을 줬을 리 없다고 말한다. 근대라는 것은 무엇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인지, 긍정적이라면 어떤 준거틀을 통해 긍정적인 것인지 따위의 질문은 논의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근대는 '서구(일본) 따라잡기'와 동일시되었고, 그 자체로 '좋은 것'이었기 때문일까?


대신 '통계는 역사를 반영하는가.' 따위의 사이비 역사철학 테제들이 횡행한다. 그것은 민족주의 진영의 지적 게으름을 폭로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경제사학자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선전하고 있지만 말이다. 비록 이 논쟁의 구도가 잘못 되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경제사학자들에 대한 민족사학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과도한 비판이 더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가운데 시간을 초월해서 한국사에서 서구 근대문화의 '닮은 꼴'을 찾으려는 강박은 여러 가지 '작품'을 낳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화백회의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국사교과서의 서술이다. 이는 상식인들의 입말 세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현대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인식일 수도 있다. 과거 독재정권에 참여한 이들이 만든 정당과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이 만든 정당이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경쟁하기 시작한 이후, 한국에서는 한쪽에서는 정상적인 '민주주의 정치의 진행'으로 여겨지는 사건이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의 파행'으로 선전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언어혼란 현상을 단지 일부 정치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지겹다면, 우리는 우리 역사 속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의 개념을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화백회의가 대변하는 문화가 민주주의와 가장 멀리 있음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다.


화백회의의 특징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만장일치제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결정구조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것은 '의사결정 이후에 이견이 남아 있는가, 남아 있지 않은가.'의 차이다. 화백회의에서는 회의 후에 이견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선 이견이 반대표를 던진 그 숫자만큼 그대로 남는다. "결과에 승복한다."는 규율은 말 그대로 결과에'만' 승복한다는 것이다. 결코 상대방이 옳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한번의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대편 정당에 대한 집단적인 귀순(?) 현상이 일어난다면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는 제대로 유지될 수도 없을 것이다.


화백회의의 방식은 공동체의 의지와 개인의 의지의 간극을 체계적으로 지워나가는 것이다. 고대에는 신라 뿐 아니라 모든 정치공동체의 의사결정방식이 그러했다. 거기엔 개인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끔씩 발생하는 불일치도 다시금 해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혼네와 다테마에의 구별에 지친 일본인들은 에반게리온에서 거대한 용기에 담겨진 인간 종족 전체의 영혼을 상상했지만, 고대에는 모든 공동체가 그러한 '공동의 영'을 산출해 내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민주주의의 이념과 그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민중의 지배'가 올바른 이유는 그것만이 '스스로의 규율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도 않지만, 일단은 대의 민주주의의 충실한 옹호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왜 지배는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마 나 자신만이 나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방어하기 때문이라고, 종종 또는 왕왕 그에 실패할지라도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현대의 표준적인 민주주의자는 답할 것이다. 그가 전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개인은 추구하거나 지켜야 할 개인적 이해관계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

2) 개인적 이해관계와 욕망은 (어떤 수준의 한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J.S. 밀식으로 얘기하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전에는) 긍정적인 것으로 지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사회에서는 위 두가지 전제가 모두 부정된다. 그것들은 사회병리현상으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행사들을 언급한다면) 제천의식이나 화백회의에 의해 해소되어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내면을 소유할 수 없으며, 주체는 개인의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영이 '우리모두'와 교통한다는 이런 행복한 환상에 균열이 생기고 개인의 내면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가장 내면을 가지기 쉬운 자, 정치체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최고 지도자가 여왕개미와 같은 거대한 체제의 부속품 역할을 벗어나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치체제를 그 욕망의 수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타인의 욕망에 억눌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명증하게 인식한다.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모든 여자를 소유하는 아버지는 필연적으로 아들들의 반란을 추동할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귀족정이 아니라 참주정을 거쳐 민주주의가 성립했다.


한편으로 정복국가의 지배지역에서는, 이전에는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던 정치소외가 발생한다. 피정복민들은 신정일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다. 제천의식의 혼융 대신에 세리의 각박함에 직면한 이들은,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원자화되어 내팽개쳐진다. 그러므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예수의 슬로건은 그들의 빈틈을 파고든 천재적인 통찰이다. 예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참주와 정복자가 내버린 성스러움을 정치와 상관없이 기능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치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위로하고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각자의 내면을 소유해야 하는 끔찍한 세상으로 내몰려왔다. 인간은 그 끔찍함을 위로하기 위해 내면 안에 아무도 부술 수 없는 거대한 왕국을 세워왔다. 하느님 나라든, 목적의 왕국이든, 위버멘쉬의 세상이든.


민주주의는 그 파편화가 홉스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내는 (정확히 말하면 홉스는 '언제나'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역사적인 선행성이 아니라 논리적인 선행성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우리 인간은 그런 일을 두려워하며 뭔가 조치를 취한다. 홉스의 주장은 그 조치가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집단의 방어기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개인의 내면을 보존하면서 그렇게 한다. 서로 다른 내면이 존재하고, 심지어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그 차이가 해소되지 않을지라도, 유지될 수 있는 공동체의 방식에 대해 논하는 것이 로크의 <통치론>이다. 그것은 항상적인 정치적 긴장을 내전(內戰) 없이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주의가 사회문제의 완전한 해소를 목표로 한다면, 그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그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 해소되지 않은 차이가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질서를 지탱하는 힘이다. 가령 휘그당원과 토리당원은 서로를 같잖게 생각했지만, 정치행위에서는 서로를 존중했다. 조선조의 붕당정치는 그 이념과 취지에서는 정당정치와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수준높은 정치행위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 해소되지 않는 차이가 내면으로 파고들지 않고 끝없는 긴장을 조성한 탓에 정치 자체가 매우 피로해졌다. 비록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조선조의 전성기는 붕당정치의 시대였고, 그것이 붕괴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될 때 왕조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세도정치는 붕당정치의 피로가 불러낸 괴물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정당정치는 선거라는 특정시기의 전환점을 통해 정치적 긴장을 해소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는 정해진 틀에서만 싸운다. 서구와 똑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한국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 속에만 숨겨놔야 할 극언을 일삼고 한쪽에서는 그 정치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전환점을 창출하려고 애쓴다. 한쪽은 선거 없이 정당만 존재하기를 바라고, 한쪽은 영원히 선거하기를 바란다. 게임의 룰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내면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원시공동체 사회는 절대왕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로 이행하기가 힘들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른 내면을 소유하면서도 공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은, 절대왕정기에 '아첨'이라는 처세술을 터득하면서 내면과 외면의 분리를 체험한 이들에게 더욱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원시공동체에서 실현됐던 감성공동체가 단지 몇 개로 갈라져서 국가 안에 상이한 제천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대한민국이 지금 그런 꼴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표준적인 민주주의 국가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내면'은 현대에 와서 증명될 수 없는 '기계 속의 유령'으로, 특히 행동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아 왔다. 라일에 이르면 그것은 데카르트가 만든 신화이자 공식적 교설로써, 반박의 대상이 된다.


마음의 개념 상세보기
걸버트 라일 지음 | 문예출판사 펴냄
데카르트의 물심(物心)이원론의 논리적 일관성 결여 또는 과정을 나타내는 지적, 마음의 능력, 개념들의 논리적 범주에 대해 심층 고찰한 영국 철학자의 논저.



따라서 한 인간(person)은 두 개의 평행하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육체에서 일어난 일들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정신에서 일어난 일들로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육체의 세계는 공적(公的, public)이고, 정신의 세계는 사적(私的, private)이다. 전자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리적 세계의 사건이고, 후자에서 일어난 것은 정신적 세계의 사건이다.


라일이 하는 일은 물론 이러한 통념을 반박하는 것이다. 비록 행동주의자들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날 위와 같은 '안정된' 판본은 심리철학에서 소수자의 견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의 타당성은 부정하지 않더라도, 위의 신화가 민주주의의 논리를 지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분석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논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주의의 전성기처럼 확장된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저 해체가 불가능한 일부분만 남아 있어도 충분하다.


준(準)-기계론적 신화가 남긴 업적 중의 하나는 당시에 팽배해 있던 정치만능의 신화에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과 그 기능은 정치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유추하여 서술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에 마음과 관련된 용어로서 "지배하는(ruling)", "복종하는(obeying)", "제휴하는(collaborating)", "반역하는(rebelling)" 등의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일조차도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혼네의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을 고려함 없이 인간을 전적으로 물리적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전적으로 동일한 인간 본성의 담지자로 바라본다면, 정치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계산'이 너무 어려워 불가능할지라도- 소수 과학자나 소수 윤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반면 물리적 대상으로든 인간 본성으로든 완전한 환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가정하고 그것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가정한다면 '민중의 지배'가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이는 '천부인권'이라는 신학적 근거 밖에서 민주주의의 전제를 옹호하는 하나의 가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화백회의는 민주주의와 가까이에 있는게 아니라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론분열'이나 '사표'를 우려할 때 우리는 여전히 대의민주제도를 가지고 '공동의 영'을 산출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샤머니스트인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무당들과 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s 지식이 달리는데 통밥으로 굴려, 간신히 끝맺은 글이다. 그런 티가 좀 나나?;;


나만의행복

2011.04.22 11:13:35
*.138.6.72

[ 희 망 / 정 보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내 병은 내가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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