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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바보'의 판타지

조회 수 1358 추천 수 0 2006.04.18 02:17:00
카이만은 상병이었다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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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의 만화 <바보>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바보가 등장해 사실상 모든 사건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바보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능력이 없다고 보고, 따라서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렇게 책임추궁을 당할 우려가 없는 바보가 행위하고, 그 행위가 적절한 행운과 조응하여 사람들의 갈등을 해결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바보로 인해 행복한 결말을 함께 누린다. 두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방금 나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전형적인 설명에 매우 가깝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이 '바보 판타지'도 에우리피데스가 자주 써먹었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기계장치 神이 내려와 모든 사건을 정리해주는 방식의 결말의 일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서 모두 그 바보는 마지막에 죽는다. 이것도 말이 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은 직접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오지 않았고, 바보라는 인간의 몸속에 신내림하셨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완결성을 위해, 바보가 열어젖힌 비정상의 세계, 신성의 세계는 바보의 죽음으로 닫혀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은 다시 평온해지고, 이야기는 마음편히 종결될 수 있다. 사람들은 바보가 정리한 틀 위에서 다시 행위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전의 갈등상황보다 더 나은 행위다. <바보>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로 재기하는데 성공하고, <동막골>의 패잔병들은 동막골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사수하며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놈이 죽어야 이야기가 (안전하게) 되는데.."라는 느낌일 때 저놈이 진짜 죽어버리는 건 읽는 이의 입장에선 꽤나 난감한 경험일 수 있다. <동막골>의 경우에는 차라리 낫다. 애초에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매시지는 바보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바보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니까. 동막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벗어난 곳이 하나는 존재했다는 위안을 위한 환상의 모델일 뿐이니까.

그러나 <바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바로 '바보'가 아니었던가. 푸코의 <광인의 역사>의 논지까지 살짝 인용해 가면서 -아마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의 재인용인 듯하지만-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떨어져나간 바보의 의미를 복권시켜보려는 시도 아니었던가. 그런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완결성을 위해 바보를 죽여버리는 결말을 보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타자를 신비화하는 것 역시, 타자를 응대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바보'의 모습이 이상화되기 시작할 때, 나는 말아톤의 초원이와 바보의 승용이를 좋아하면서도 현실세계의 바보들을 경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까봐 걱정이 앞선다. '바보'가 그렇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 삶에 훈훈한 감동과 새로운 의미를 전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수치와 비루함과 회피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면? 그냥 '차별'을 정당화해버릴까?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 <제8요일>을 보자면, 저 영화에서도 '바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따스하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도 결국 죽는다. 그러나 거기선 최소한 '바보'가 성추행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말아톤의 초원이처럼 '얼룩말 무늬'를 만지는게 아니라 진짜로 여자의 몸을 탐하는 장면 말이다. 그러나 강풀의 <바보>에는 그러한 최소한의 장치조차 없다. 바보는 처음부터 뭔가 초월적인 것, 숭고한 것이다.

이상화된 바보라도 죽이지는 말았어야 했다. 나는 저 '바보'가 그렇게 여주인공과 차츰 가까워지다가 여주인공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날 여주인공이 어떻게 반응할지 막 궁금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 경우 물론 여주인공은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지만, 어떻게 하면 바보에게 그 거절이 네가 꼴도 보기 싫다는 말과 같은 정도의 말은 아니며, 사람들에겐 각자의 사는 공간이 있고, 실연 좀 당해도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할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할 때 겪어야 하는 고민들은 실제로 그런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바보'에선 여주인공이 그런 고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보가 죽어버린다. 아름다운 추억만을 남긴 채로.

정말로 바보는 열 개의 갈등을 해결하고 본인 스스로는 어떠한 갈등의 씨앗을 뿌리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나라한 판타지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바보와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보의 마법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윤리적인 결단이다. '바보의 판타지'가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 것.



p.s 이런 변명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나는 강풀의 <바보>를 재미있게 보았다. 나는 재미있게 본 것이 아니면 언급하지도 않는다. 재미있게 봤지만 뭔가가 걸리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로서도 그런 언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 내 성격은, 남들 다 보는 것을 보고 걸리는 걸 언급하느니, 차라리 남들 안 보는 걸 내가 찾아보고 만다는 쪽이다.- 이런 글은 군대에 오기 전엔 내가 쓰지 않던 종류의 글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나는 <바보>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이 없었지만, 그 만화의 말미에 붙어있는 김정란 시인의 서평(?)을 보곤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와 탈근대를 넘어서고 있다.'는 식의 수식어는 지나치게 남발되고 있다. 물론 감동은 존재한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감동에서 아우라를 보는게 아니라 판타지를 읽어내는 피곤한 사람이다. 슬프게도, 요새 내 머리속에선 모든 고상한 것들이 천박한 것으로 환원되고 있다. 그렇게 하느니 나는 (군대에 오기 전처럼) 그저 천박한 것들만 보고 살자고 다짐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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