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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유

조회 수 1186 추천 수 0 2006.03.21 02:14:00
카이만은 겨우 상병이었다. 그리고 짬밥도 안 되는 주제에 약속한 글은 안 올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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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식으로 말하면 자유의 차원은 인과론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정확히 칸트적인 구분이 나와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이영도가 말하는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의 ‘복수’는 칸트적으로 말하면 인과론/결정론의 세계이고, 오스발의 ‘자유’는 그것을 초월한 그야말로 칸트적 의미의 자유의 세계다. 이영도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교양을 갖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구성하는 형이상학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정도는 보는 이로서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가령 드래곤라자의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정확히 혼돈이론인데, 혼돈이론을 직접 접했다기보다는 소설 쥬라기공원에서 취했다는 것이 티가 난다. (칼 핼턴트가 드는 예시 하나가 말콤 박사의 것과 똑같다.) 폴라리스 랩소디에는 데카르트 얘기가 나오지만 방법서설을 직접 읽었다기 보다는 이진경의 책 한 두권을 읽었다는 혐의가 짙다. 한국 대중문화평론계의 큰 별이신 노정태 선생님은 눈물을 마시는 새를 보면 “어제 차라투스트라를 읽었노라.”는 외침이 귀에 들린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 읽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말을 듣고는 언제가 되었든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영도가 칸트를 읽었는지, 혹은 칸트식의 자유를 접하고 오스발을 기획했는지는 나로서도 도통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쪽이 되었건 대단한 감각인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 자유의 현기증을 가르친 건 이영도가 아니었다. 중학교 때 감명깊게 보았지만 쇼생크 탈출의 앤디도 아니었다. 앤디가 가르치는 자유가 일상화법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관념적인 인간에게는 칸트적인 자유가 훨씬 더 짜릿함을 주는 것이다.

하나의 장면은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가 만들어 줬다. 민주국가의 장성인 양 웬리는 버밀리언 전투에서 침략자이며 절대군주인 라인하르트의 함대를 격파하고 라인하르트를 죽일 수 있는 위치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부하들이 수도를 함락시키고, “무조건 항복, 교전 중지.”라는 명령이 민주주의 정권의 수반으로부터 전송되자, 양 웬리는 깔끔하게 전쟁을 중지한다. 그러나 양 웬리의 부하인 발터 폰 센코프는 그때 인상적인 연설을 한다.

“...각하께선 계속 나아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세가지를 취하실 수 있습니다. 라인하르트의 목숨과, 전 우주와, 미래의 역사를 말입니다. 각하는 이대로 전진하셔야 역사의 정도를 걷게 되시는 겁니다.”

대충 내용은 이랬던 것 같다. 센코프와 같은 냉소주의자가 저렇게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언을 하면 꽤 강력한 느낌을 준다. (ssy식으로 말하면, ‘먹어준다.’)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제안처럼 들렸다. 물론 양 웬리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그는 센코프를 논파하지 않았고,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내게는 맞지 않는 옷 같구려.”라는, 논쟁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식인 취향의 세계로의 도피를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행사한다. 그 몇 년 후 나는 정치논쟁의 세계로 뛰어들었고 저것을 포함한 몇 개의 표준적인 논쟁을 회피하는 방식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양 웬리의 가냘픈 방어는 센코프의 ‘먹어주는’ 이데올로기적 포박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양 웬리의 자유가 짜릿했던 건 양 웬리의 반론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센코프의 설득이 너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걸음 내딛는 순간, 양 웬리는 더 이상 역사학도가 될 수 없고 본인이 큰 인물이라고 착각하는 꼭두각시들의 세계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라고 해도 결코 센코프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장면은 스무살이 넘어서 읽었는데도 나에게 탄성을 유도한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의 주인공은 영호충이었다. 영호충이 서호 호수 밑바닥에서 구해낸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은 영호충에게 일월신교 부교주직을 제의한다. (저 유명한 동방불패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영호충은 거절한다. 여기까지야 통속적인 스토리다. 임아행은 이 세계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다음 수순에 들어간다. 만일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영호충을 길러낸 화산파를 멸문시키겠다는 협박이다.

아하, 이는 무협지의 주인공들을 전형적으로 얽어매는 방식이다. 달콤한 과실을 따먹으면서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친절한 제안이다. 오히려, 영호충은 일월신교 부교주가 됨으로써 윤리적 행위를 했다고 야무지게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바라보며 관중들은 ‘비극적’이라며 그를 동정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영호충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는 부교주의 재목이 아닙니다. 화산파는 몇백년이나 되었으니 스스로를 지킬 방책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다. 정수리에 찬 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화산파는 몇백년이나 되었으니 스스로를 지킬 방책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정말이지 이런 후레자식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런 후레자식이 되어야 타자의 욕망에 포획되지 않는 것이다. 후레자식이니까 인과론을 잘 아는 임아행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소오강호는 나에게 꿈과 같은 텍스트였고, 영호충과 임영영이 결혼을 하면서 ‘소오강호’를 연주하는 결말은 내가 오랫동안 사랑한 것이었다. 훈련소에서는 “라캉과 함께 소오강호를”라는 제목의 글을 끄적였다. 내가 보기엔 영호충이야말로 라캉이 말하는 윤리적인 인간,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인간, 주이상스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안티고네와 사드를 ‘모르는’ 우리들에겐, 영호충을 소재로 한 라캉이론 해설이 꽤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소오강호의 독자와 라캉의 독자 사이의 교집합은? 나는 늘상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한숨짓고, 그래도 예상독자가 나 하나밖에 없는 글을 가끔씩 쓴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자유의 옹호자인 것은 아니다. 좌백의 혈기린 외전을 보면, 주인공 왕일이 결말에서 선포하는 윤리학은 영호충의 것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일은 말하자면 자신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안타깝지만, 이념이 아니라 선후배 때문에 운동한다는 선량하지만 똑똑하지는 않은 운동권 학생의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은하영웅전설의 청년 혁명가 아텐보로의 말대로 사람들은 혁명가를 보고 혁명을 꿈꾸지 이념을 보고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유는 하나의 당위인 것이다.

만에 하나 그것이 윤리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이미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다. 굳이 좌백이 ‘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왕일이 협객이라면 우리 사회의 40대 남성들은 모두 다 협객일 테니까. 배고플 때는 생존이 최우선이라고 말하고, 형편이 좀 나아지니까 사회적 관계를 위해 산다고 말하는 왕일은 사실 한국 중산층의 표본이다. 여기엔 자유의 당위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끈끈하고 따뜻한 ‘인간’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칸트의 옹호자다. 칸트처럼, 행복해지라는 요구는 인간에게 가혹한 것이라고 믿는다. (‘부당한’ 요구라고 하지는 않았다. 양자는 다른 얘기다. 나도 행복하고는 싶다. 어느 정도의 욕망인가 하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 윤리학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솔직하게 부자가 더 행복하다고 써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솔직함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윤리학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면, 역시 칸트의 말대로 행복은 윤리학의 목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법칙에 복종하라는 요구가 칸트에게는 외려 ‘인간적인’ 것이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자유로울 수는 있는 것이다.


P.S 글 한편으로 참 여러 사람 놀린다. 그러나 나는 혈기린 외전을 존중하기 때문에 훨씬 더 성실한 비평문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글이라고 부르기엔 뭣한 짜임새이긴 하지만 혈기린 외전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그 글들도 올리기로 하겠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이 글의 후반부와 중복이다.

서하

2007.03.24 22:34:30
*.249.0.101

코르토 말테제도 영호충과 비슷한 말을 한 것이 기억나는군요. 당신 친구나 걱정하시지, 라는 말을 듣고서 난 그 친구 엄마가 아니야, 라고 대답했죠. 멋진 친구네요. 무협지는 안보지만 한번 봐야겠습니다.

아햏햏

2013.02.01 00:01:03
*.113.99.103

예상독자가 한윤형님 하나뿐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네요. ㅎㅎ 저는 한윤형님 글을 탐독중입니다. 끝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정주행중. 흥미진진하네요.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생각들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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