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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변방 무협의 길

조회 수 1223 추천 수 0 2006.03.17 02:13:00
여보게, 카이만은 불과 상병 3호봉 때 이런 짓을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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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의 혈기린 외전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경탄을 요약하자면 그것이 '변방무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한국 신무협의 총아로 불리는 저자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두서없이 읽은 몇 권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전통적인 무협지의 시공간을 고수할 때에도 그 시공간에 대한 미시사적인 지식을 폭넓게 활용해 서술하고 있었다. 둘째, 아마 내가 인문학도라서 보이는 부분일 지도 모르겠지만, 학부시절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 사람은 종종 근대 이전 한자어 무리의 틈으로 근대 이후에 발생한 한자어를 '외삽'하고 있다. 말하자면 무협지 사투리 속에 철학계 사투리가 티나지 않게 들어가 꽤 재미있는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좌백의 무협지에서는 내가 이전에 언급한 표준적인 '무공비급의 판타지'의 해악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

그런데 혈기린 외전에서는 좀 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왕일은 잘생겼다라는 것과 조숙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밑천이 없는 농부의 아들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남만에서 7년간 군역을 살다가 돌아온다. 돌아왔을 때 그는 가족이 지역토호와 결탁한 무림인들에게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복수를 다짐한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일반적인 무협지에서 벗어나는 두 개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군대라는 조직이고, 둘은 남만이라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강호무림의 바깥, 변방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시점까지 혈기린 외전은 역사소설이자 무예소설이며, 하나의 복수담일 뿐이지 무협지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요새 말로 하면 대충 특수부대 요원 수준쯤 되는 왕일이 복수가 거의 성공하려는 단계에서 강호의 삼류무사 증국영에게 어이없이 패배하면서, 갑자기 강호무림이라는 차원이 소설에 새롭게 도입되어 버린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 내공의 세계가 열려버린 것이다.

남만에 대해서는 좀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무협지의 고향인 중국 작가들에게는 강호무림의 시공간이 그들의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할 것이며,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느낄 것이며- 그곳과 남만은 꽤 이질적인 공간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써 무협지를 쓰는 좌백의 입장에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공부를 통해 무지막지한 설정자료집을 구축하기만 하면 충분히 진입할 수 있는 세계일 뿐이다. 말하자면 중국 작가들에게와는 달리 좌백에게는 남만과 중원이 평등한 권리와 동등한 접근성을 지닌 공간일 수 있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메타meta적인 위치를 점유할 때에, 비로소 '중원무림' 역시 중국인들의 역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무협지의 토대가 되는 환상의 공간으로 현상된다.

이는 한국 무협의 자생적인 진화를 의미하며, 좌백은 그 길을 선도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 길의 의의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찬탄하며 나는 그의 길을 '변방무협의 길'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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