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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악전고투의 판타지

조회 수 953 추천 수 0 2006.03.14 02:12:00
카이만은 상병이었다. XX 빠진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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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을 통해 성공하는 주인공은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이건 내 얘기와 달라.'라는 거리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주인공이 운수가 박터지게 좋다고 하더라도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주인공을 '악전고투'해야 할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가장 표준적인 판본으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에게 피할 수 없는 적이 생겼다. 그런데 그 적은 주인공보다 훨씬 세다. 주인공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짧은 시간에 상승시켜야 할 지경에 '던져진다'. 이때 주인공이 악전고투하며 상승의 궤적을 밟는 모습을 보고 있다보면, 비록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운이 좋더라도 그 사실은 독자들에게 은폐된다. 운이 아무리 좋아봤자 아직 미션 수행을 못할 것 같으니까, 주인공이 악전고투하고 있으니까, 독자들은 실은 지금까지 스코어만으로도 이놈이 운수 박터진 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행여 알더라도 그 사실을 용인한다.

한편 악전고투는 기연을 은폐하는 역할 이외에도 기연과 함께 주인공의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른바 '악전고투의 판타지'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이 판타지의 내용을 가장 단순하게 동물의 왕국 식으로 서술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치타는 일대일 대전 능력에서 하이에나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대개 치타가 사냥감을 챙기더라도 하이에나가 뺏으러 오면 순순이 뺏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치타가 이 사냥감을 뺏기면 곧바로 굶어죽을 지경에 처해서 악에 받쳐서 하이에나를 위협한다면? 하이에나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 먹이를 빼앗겠다는 방침을 고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치타의 악전고투에 맞서 부상 혹은 죽음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하이에나는 물러서고 한번의 전투는 치타의 승리로 끝난다.

한편, 만일 위의 상황이 실존하는 것이라면, 치타가 아닌 우리 인간의 경우는 매번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돌격해서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바로 악전고투의 판타지가 탄생한다. 모든 것을 던져서 강자들의 룰을 위협하는 소년만화 주인공의 판타지 말이다.

가령 <상남2인조>에 등장하는 오니즈카 에이키치를 위시한 십대 반항아들을 보라. 그들이 '어른'들에게 들이댈 수 있는 무기는 그들이 겁 없는 십대라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간혹, 프로 야쿠자들을 감복(?)시켜 물러서게 만드는 위업(!)을 달성한다.

좌백의 <혈기린 외전>에서도 주인공 왕일은 기연을 은폐하기 위해, 그리고 더욱 상승하기 위해 악전고투의 판타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악전고투 판타지는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승리의 공식이기 때문에, 나조차도 만일 소설을 쓴다면 그것을 (최소한 한두번은) 활용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황과는 상관없이, 소설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악전고투의 판타지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내 생각에 악전고투의 판타지가 기능하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강자가 진흙탕에 빠지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즉,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약자를 응징하는 것은 뭔가 쪽팔린 일이라는 문화적 관념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강자가 닭다리와 계륵을 구별할 줄 아는 계산적 혜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닭다리는 내가 먹지만 계륵은 그냥 저 삐리리더러 가지라고 하자,는 식의 주판알을 튕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이 두가지 덕목은 한국 사회의 '강자'들에겐 결여된 미덕이다. 그들은 코털을 건드린 생쥐를 묵사발을 내는 것을 즐기며, 그런 행위는 모종의 공포와 직결되어 있다. 즉 그들에겐 강자가 응당 가져야 할 여유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들은 관대한 행동은 자신의 힘을 약화시켜 파멸로 이끌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리하여 강자들조차도 약자들처럼 악전고투의 판타지 속에서 살기 때문에, 악전고투의 판타지는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모두가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것을 찬양하고 있다면, 배수의 진은 정말이지 효과적인 방책이 아니라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필요조건이 된다.

그래서, 나처럼 악전고투로 덤비는 타자들을 피해서 도망다니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도 생기게 된다.<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의 함대가 우주에서 가장 잘 도망치는 함대로 악명(?)이 높았듯 그렇게 나는 도망다니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들로부터 도망다니는 것에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고, 그것은 일종의 허들 넘기와 비슷한 것 같다. 임시방편과 순간의 안위만으로 가득찬 세계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러 개의 배수의 진을 허들처럼 넘어 도망가고 싶다.

으헝헝

2013.01.31 23:39:30
*.113.99.103

이 글은 왠지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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