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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오만과 편견의 '환상'

조회 수 867 추천 수 0 2006.10.24 16:37:00
대대에서 사단 독후감 경연대회 때문에 원고 토해내라길래 2시간만에 쓴 글이다. 밖에선 흔히 이런 경우 '발로 썼다'고 한다. 군간부들이 심사하는데 이런 글이 어필할 리가 없다. 결국 아무 소식도 안 들려왔다.

...란다. 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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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세계문학전집 88) 상세보기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펴냄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류 작가로 꼽힌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이자 출세작. 하트포드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 가에는 다섯 자매 중에서도 결혼적령기를 맞은 두 딸이 있었다. 온순하고 내성적인 맏딸 제인에 비해,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재치가 넘치는 발랄한 아가씨이다. 제인은 근처에 이사 온 청년 빙리를 사랑하지만 신중하게 자기 애정을 숨긴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는 매력적이지만 거만한


제인 오스틴은 스스로 "이 작품은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이 소설은 하나의 '환상'이라는 얘기일 텐데,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환상일는지가 궁금해진다. 만일 그 환상이 현실의 어두움을 은폐하는 마약과 같은 역할밖에 안 한다면, 우리는 그런 환상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환상이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그 내용 여하에 따라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에는 요새도 흔히 통용되는 연애물의 일반적인 설정들이 눈에 띤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과 그녀의 언니인 제인 베넷은 귀족 계급과 시민 계급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처지다. 그런 그들이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성'인 다아시 경과 빙리 씨를 마나 결혼에 성공하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신분의 차이가 있는 그들의 사랑은 주변인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다아시 경은 친인척 중에 어려서 맺어진 정혼자가 있기까지 하다.


물론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주인공들의 성공 스토리만이 <오만과 편견>의 미덕은 아니다. 이후의 삶을 위해 적당한 재산을 가진 남성과의 결혼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여성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처음에는 다아시 경의 청혼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오만과 편견>은 현실의 어두움을 은폐하기는커녕 그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려는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소설이 하나의 환상이었다면, 그 환상의 내용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물론 그것의 극복과도 거리가 멀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을 교정하려고 노력할 때에, 잘못을 저지른 바로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사실상 그 잘못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환상을 보았다. 흔히들 이 이야기를 다아시 경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극복되어가는 이야기라고 한다. 다아시 경의 편지를 읽고 자신의 편견을 깨달은 엘리자베스의 외침을 보라.


"내 행동이 그렇게 한심했다니!" 그녀는 외쳤다. "변별력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똑똑하긴 하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내가! 때때로 언니가 너무 너그럽고 솔직하다고 비웃으면서 쓸데없이 남을 의심함으로써 허영심을 마족시켰던 내가! 이제야 깨닫다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하지만 창피해하는 게 당연하지!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거야."


비굴해지지 않으면서 이보다 더 심하게 자신을 질타하기는 쉽지 않다. 이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구든 살아가면서 몇 번쯤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나를 부끄럽게 맏는 행위에 대해 사과할 기회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엘리자베스가 그랬듯 잘못을 교정할 기회가 있었던 당시의 '나'는 그 잘못을 깨닫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에서 나오는 한심함과 무력감에 의해 더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생활을 하면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있을 때, 나는 종종 바깥에서 내가 했던 부적절한 행동과 그 행동에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사과할 기회는 없었다. 이제와서 그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 뿐더러, 애써 찾아내서 사과한다 한들 그게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야 할 중요한 존재였던 적도 없을 것이고, 단지 자신을 불쾌하게 했던 어떤 타인에 불과했다면, 그런 타인은 잊어버리는 게 손쉽고도 유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그들을 찾아내서 내가 사과를 한답시고 과거 일을 들추어 내봤자, 그저 나는 망각된 그들의 불쾌함을 들추어 낼 수 있을 뿐이고, 그런 행동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부끄러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그 부끄러움을 가슴에 품을 수 도 있고, 나 때문에 불쾌했던 그 타인들이 그랬듯 그것을 망각의 바다로 흘려보내는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부끄러움을 망각해 버린다면 나는 다시 그런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닐까? 혹은 그 이전에, 만에 하나의 행운으로 주어질지도 모르는 내 잘못을 교정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런 면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경의 결합은 환상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저지른 두 사람의 잘못을 두 사람이 스스로 교정하고 두 사람의 행복한 결합으로 그것을 용서하고 있는 바,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그 부끄러움의 자기교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세속적인 성취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 세상에서 윤리와 행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일치시키는 신(神)과 그 신에 의해 주관되는 사후세계를 희망하는 것은 인간에게 정당한 일이라고 했다. 그와 비슷한 감정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쉽사리 망각하지 않고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가 올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만과 편견>이 그런 환상이라면, 어찌 그런 소설을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덧붙이는 말)

저 글을 쓸 때는 분량상/미관상 생략해 버렸지만 사실 쪽팔리는 상황 중에는 딱히 누구에게 사과할 일은 아닌데 하여간 쪽팔린 일들도 많다. 가끔 멍하니 있을 때는 그런 기억들이 나를 습격하는데 참으로 처치난망이다.

아햏햏

2013.02.01 08:55:43
*.113.121.37

예고없이 불현듯 스스로에게 너무 '쪽팔리는' (부끄러운 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기억이 떠오르는데, 스스로 제어할 틈도 없이 입에서 '끙' 이나 '으음' 이나 혹은 '시발'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곤 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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