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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카이만, 군인, 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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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슬픔의 해석학'에 대한 원천적인 딴지

나르시스의 꿈 상세보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펴냄
부제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청년, 나르시스,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져 비극적 최후를 맞은 젊은이. 서양정신의 역사를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책. 서양철학의 텍스트를 자립적인 논리적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정신의 욕구와 충동이 만들어낸 꿈과 환상으로




우리 역사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지키지 못하는 민족이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찢기고 상처받는지를 모자람 없이 보여주는 부끄러운 기록이다.                                          
                                       -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프롤로그에서



한 재능있고 사려깊은 철학자의 철학적 프로젝트는 한국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수준에서 그 프로젝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만든 현실인식, 그의 한국사에 관한 인식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인식이 매우 자명한 공리라도 되는 듯 별다른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저 프로젝트의 의의는 상당부분 퇴색되는 것일 게다.


왜 한국사는 '부끄러운 기록'인가? 천번이나 외침을 받아서? 하지만 한국사는 많은 이들이 자랑하듯이 그 길이가 사천년이다. 분모가 크면 분자가 아무리 커봤자 1을 넘지 못하는 법, 사천년에 천번이래봤자 사년에 한번.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현대 이전에 그보다 전쟁이 더 적은 곳도 있었던가? 정말로 놀라운 건 천번의 외침이 아니라 누군가 그걸 다 세어봤다는 사실이다. 불쌍한건 우리 조상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그걸 다 세본 우리 현대 한국인들이다. "천 번의 외침을 받으면서도...." 이 상투어구를 만들어낸 그 역사학자는 언제나 '어느 역사학자'라고만 소개된다. 나는 가끔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하다.


한국사 어느 구석을 봐도 나는 '처절하게 찢기고 상처받은' 민족을 발견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렇게 찢어발겨지면서 계속 존립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디오니소스는 판타지일 뿐이다. 한국사가 지속되었던 건 지속될 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말과 일제강점기에 살마들이 그토록 좌절했던 것은, 그 직전의 시기에 고려인과 조선인이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그토록 컸기 때문이다. 크나큰 자부심 이후에 크나큰 좌절이 있었던 거지, 사천년 내내 좌절만 했다면 나중에 그 좌절은 습관이 되었을 테고 저런 음성들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조선에서 대한민국까지 민족사의 줄을 세우는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역사관에 동의한다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영역은 상고시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과정도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식민통치? 사천년 역사 집어치우고 삼국시대부터 이천년으로 따져도 몽골에게 일백여년 일본에게 사십여년 채 백오십년이 못 된다. (한사군 포함시키려면 다시 분모에 이천년을 더하라.)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게다가 식민지 통치 하에서 한국인의 지위는 꽤 높은 편이었다. 원조의 인종차별 정책에서 고려인은 몽골인 다음이어었고, 대일본제국에서 조선인은 이등국민이었다. (비록 '대'일본제국이 무능한 정복자라서 삼등국민을 마구마구 생산해주지는 못했지만. 일본 극우파를 볼때 가장 짜증이 나는 지점은 그 부분이다. 도대체 뭐가 그리 자랑스럽단 말인가? 사이즈의 최전성기를 따진다 해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확실히 모든 민족을 먹어치우면서 성장해온, 게다가 지금은 정신착란에 빠져 그 모든 민족이 하나의 중국민족이라는 헛소리를 작작 해대는 거대한 옆나라를 생각하면, 가끔은 나도 이 민족이 과연 미래에도 존립할 것인가 걱정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비록 한국사의 경향성이 민족 공간의 축소였고 그 경향성이 미래까지 이어져 결국 그것이 민족의 멸망으로 이어질 지라도, 그 과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그 경우에도 아직은 남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경향성은 필연성으로 둔갑할 만큼 임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사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점점 좁아졌다지만 지금도 그리 좁은 국토도 아니다. 옆에 있는 나라들이 하도 커서 문제지. 인구로 말한다면 더더구나 적은 인구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모든 '이기적 유전자'의 본성이라면, 이만한 성공을 거둔 '민족집단'도 몇 개 없다. 우리 위로는 대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이야기의 끝을 싫어하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나는 한국사의 진행속도에 그럭저럭 만족한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국사에 종말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기는커녕 그 종말의 전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삶, 한국적인 삶에 대한 내 고민이 한순간에 맥락을 상실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 2차 한국전쟁이라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은.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서 이 이상의 어떤 확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는 아직 한번도 우리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반성했던 적이 없다. 우리의 정신을 규정했던 철학의 텍스트는 언제나 외국어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지배했던 정신 역시 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부끄러운 자기상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고통스런 자기상실이기도 했다.



정신사의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지식인들이 이토록 부끄럽고 고통스러워 했던 시대도 한국사에선 예외적인 시기에 속한다. 자신의 언어로 반성했던 적이 없다? 세상에, 자신의 언어를 소유한 나라가 도대체 몇 개나 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내 집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집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수많은 서민의 삶을 일축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가 고통받는 인간, 혹은 겸손한 인간이라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내적 고통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저 대사는 몰락한 중류층의 대사이지 결코 하층민의 대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같은 상황이 구현되면 비판에 인색한 걸까? 멀쩡히 자기네 입말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구현할 문자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청승일까? 우리 문자 발명한지 오백년 밖에 안 된다고 징징거리지 말자. 역사가 오백년 안 되는 나라도 수두룩하니까.


중국에서 수학하거나 신라에서 스스로 공부하여 중국인들에게까지 불교를 가르쳤던 원효나 의상의 사상이 어째서 '부끄러운 자기상실'일까? 원효가 민중에게 가르쳤던 정토종이 어째서 '자기상실'일까? 하물며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펼친 사단칠정 논변은 도대체 누구의 모방일까? 중국사상사에는 그 비슷한 논쟁도 없었는데.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철저하게 지식인 엘리트들의 국가였던 조선왕조가 '고통스런 자기상실'이라면 그 상실의 주체는 누구요 객체는 누구일까?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학문의 보편성 속에서 자유로웠고 우리 시대의 누구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그들을 부정하려면 그리스 철학자나 중국 사상가들이 아닌 다른 모든 학자를 부정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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