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이 책을 통해 진중권의 저서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꽤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은 진중권의 이전 저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

저자는 한국인들의 습속을 탐구해 보겠다고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겠다고 한다. 여기서 <폭력과 상스러움>과 이 책의 차이가 드러난다. <폭력과 상스러움>은 유학생의 시각에서, 독일인의 습속에 적응한 저자의 시각에서, 한국인들의 습속(의 부정적인 측면)에 '몸'으로 반응한 생생한 기록이다. (사실 <폭력과 상스러움>은 요새 한참 유행하는 지젝을 모르는 채로, 유행하기 전에 쓰여진 한국 사회에 적합한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반면 현재의 저자는 국내로 돌아온지 몇 년이 지났고, 다시 한국인들의 습속에 적응한 상태다.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그가 하는 일은 그 역시 적응해 버린, 한번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한국인들의 습속에 '성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폭력과 상스러움>의 후속작이다. 하지만 이 책이 <폭력과 상스러움>보다 재미가 없다면, 진중권이라는 글쟁이가 '성찰적'으로 쓰는 것보다 '감각적'으로 쓰는 데 훨씬 더 재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연결되고, 그 자체로 굉장히 훌륭하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이 포착한 인상은 단편적이다. 좀 더 분석해 들어갈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도, 거기서 멈춰버리고 나열만 한다.

정치적인 문제에서 그는 더 적극적으로 분석했어야 했다. 가령 박정희와 김일성의 '인간개조'론을 통해 남북한에서 산업사회에 걸맞는 기계적 신체가 탄생했다는 기술을 보라.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이 '인간개조'론이 박정희와 김일성이 파시스트인 걸 보여주는 증거라고 맹비난했다. 생각이 바뀐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타켓이 바뀐 거다. 이 책에선 독재자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아니라 그 독재자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주조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가치평가의 영역에서도 문제는 남는다. 저자 역시 그런 고민을 한다. 가령 이런 부분.
 
일본 우익은 자신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말하고, 한국 우익이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치켜세운다. 방식이야 어떻든 산업화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보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발상이다. 이들에게 폭력적 근대화의 그림자에 대해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푸코를 들어 서구에서도 근대화는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고 할테니까. 여기서 '근대화' 자체를 비판하는 프코의 논지는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곤경이다. 언젠가 어떤 시인은 TV에 나와 디스토피아 문학인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그냥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자.'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곤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 저자는 더 들어갔어야 했다.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그는 푸코식의 계보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많긴 하지만, 그것이 윤리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비록 반지가 인신구속을 위해 만들어진 장신구라는 (은폐된) 기원을 가진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반지가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탁월한 통찰이다. 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런 통찰을 하지 않는 것일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손쉬운 방식은, '박정희'라는 독재자에 대한 엄정한 평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되, 오늘날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염원하고 갈구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일인지를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이런 식의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여하간 저자는 그마저도 안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입장은 몇 년전에 그가 맹비난한 강준만의 박정희 관과 흡사한 데가 있어서, 아마 저자에게는 이 입장조차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분석은 이것보다도 더 정교해야 한다. 그러나 여하간 그는 여기서 멈춘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포스트모던 수용은 노조탄압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하되, 회계감사는
'한국식'으로 받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포스트모던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 난감한 자세를 취했다면 그것에 맞서 싸워야 마땅하다.
 
새로운 조류, 상상력에 대해서도 그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사실 나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상상력 혁명"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상이 질료의 저항 없이 곧바로 현실로 전화하게 된 것이다. SF는 더 이상 문학의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

결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군대에서 작성한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에서 나는 이 문구 밑에 다음과 같이 기입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유전공학이라는 테크놀러지가 상상력을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게 아니라, 국가주의적 상상력이 유전공학의 생산력을 날조하는 현장을 목도하였다. 상상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질료만이 아니다. 상상은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기도 한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줄기대란'이 있기 전에 쓰여졌다. 그리고 진중권은 누구보다도 황우석과 황빠들에게 비판적인 이였고, 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와 황우석"이란 글을 통해 상상력을 멀리하라는 <성찰>의 문구까지 끌어들여 그들의 왕성한 상상력을 비난한다.

이른바 '황빠'와 '황까'의 대결은 두 가지 시간의 대립이요, 두 가지 인성의 대립이다. 이것은 그 어떤 갈등보다도 더 근본적인 갈등이다. 한국 사회는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분열되어 있다. 두 개의 지각판이 부딪혀 일으킨 황우석 지진은 깊은 곳에 존재하던 이 균열을 표면으로 드러내주었다.

이것은 적합한 분석이다. 문제는 그가 책의 뒷부분에서는 다시 상상력을 예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문자문화의 학습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디지털 시대에서 문화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지당하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 예찬'이 아니라 '학습'이 아닐까? 그냥 젊은이들에게 '책 좀 더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 될 텐데, 저자의 태도는 애매하다. 인문학자들이 영상언어의 문법을 이해하고 새로운 교양도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참신하긴 한데 별로 실현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이 말은 '깬다.' 두 개의 문법을 모두 이해하고, 더군다나 그것의 변환을 꾀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우리는 그를 마땅히 '천재'라고 칭하며 그의 작업을 칭송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천재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닥치고 책을 읽는 것이다.
 
여러가지 문화적 현상에 대한 그의 진단 역시, 가상과 실재라는 개념의 표피적인 적용에 불과하다. 된장남과 된장녀를 말했다면 한국인들의 욕망의 문제,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의 문제를 짚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저 된장녀가 진짜 된장녀인가, 아니면 된장녀인 척 하는 것인가." 따위의 문제에 치중한다. 낸시랭과 함께. 결국 그는 한국인들의 습속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논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기에 은폐된 욕망을 캐내는 위험한(?) 작업을 하지도 않는다.

아마 저자에겐 한국인은 더 '문명화'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확실하게 드러내지는 못하고, 독일에서 그가 배운 서구의 습속에 비겨 한국의 습속을 설명한다. 지금 한국의 우파(?), 뉴라이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선진화'라는 단어로 정리했다. 어쩌면 그 반대편의 입장에 걸맞는 레토릭은 '문명화'일 것 같기도 하다. 황빠와 황까의 대립이 좌우 대립보다 훨씬 근원적인 대립이라는 그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자본주의에도 가능한 여러가지 양식이 있고, 근대에도 가능한 여러가지 양식이 있다면, 그중 우리가 좀 더 '문명화'된 체제를 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문명화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바로 그런 핵심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습속'에 대한 논의를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지점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지점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일부 독자들이 이 책에 '오리엔탈리즘'이란 딱지를 붙이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적인' '문화 상대주의'는 도움이 된 적이 없다. 나는 진중권의 '오리엔탈리즘'을 적극적으로 지적한다. 내가 불만인 건 그가 미적미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파이어

2007.02.28 20:28:30
*.237.213.17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최장집교수가 70년대 초 박통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 했던 전력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왜 그만 뒀는진 모르나 왜 들어 갔을까 궁금치 않으신지...

하뉴녕

2007.02.28 22:26:50
*.148.250.73

그런 얘기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근의 최장집 교수가 포함된 논쟁과 큰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사파이어

2007.02.28 20:17:46
*.237.213.17

지인의 추천으로 한형의 블러그를 보게 됐오..우선 논리에 입각한 치열한 정치성에 배울점 많다 생각하오..본인은 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 서민이오..동시대를 살면서 또한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상대에 대한 비판은 적이 아닌 담엔 최소한의 애정을 담기 바라오..논쟁에서 이긴 들 뭐하오..그 이김이 우리 참세상에 보탬이 되는 싸움이여야지 그저 서로 낯 붉히는 멱잡이가 되면 무슨 소용있겠오..무수히 많은 기라성같은 선후배들 많이 만나봤지만 끝내는 기본 품성이었오..박종철이 죽음으로 지켜낸 선배가 한나라당 경기 지구당 위원장 이란걸 보고 참담했었오..좋은게 좋다는 의미는 아니니 건승,건필 하시고 조금만 여유를 갖기 바라오..

하뉴녕

2007.02.28 22:31:08
*.148.250.73

...그런데 제가 강력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제가 싫어하는 사람들이랍니다. '적' 개념을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가령 한나라당이나 과거 독재정권에 참여했던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열린우리당이나 과거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을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입장'을 가진 '상대'로 생각하는 것은, 제 세계관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제가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사파이어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하네요. 저 자신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상한 모자

2007.02.28 21:46:03
*.63.208.238

사파이어님 같은 이야기 하는 분도 오랜만에 보네요.

사파이어

2007.02.28 22:48:53
*.237.213.17

한형 다좋소..어차피 형은 노무현식 개혁,혹은 노무현이 처해진 개혁 그거 다 인정 안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좀 아이디얼이라 생각하오..이 하오 체가 맘에 안드네..한형 글을 좀 뒤로 돌려 읽어 봤는데 논리는 탁월한데 뭔가 좀 뜬다는 생각입니다.그 건 내가 공부를 덜 해서 그 럴 수도 있고 형이 좀 현실과 유리 됐을 순 없겠는지..예를 들어 최교수 같은 경우도 DJ정부에서 정책자문위원 인갈 했습니다..그럼 좀더 현실적인.예를 들면 자기 실천의 문제라든지..그런게 있어야 좀 더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가 아닐까...그리고 한형의 다분히 민노당(물론 비판도 있었지만) 편향적 논술도 전 좀 문제 있다 봅니다

사파이어

2007.02.28 23:29:03
*.237.213.17

최교수의 박통시절 전력을 모른다면...일단은 아주 간단하게 네이버 검색도 됩니다..

하뉴녕

2007.03.01 10:11:02
*.148.250.73

1. 검색이 안 됩니다. 제가 검색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2. 설령 최장집 교수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어디엔가 참여했다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최근의 논쟁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학자의 특정한 발언이 '옳다' 혹은 '의미있다'고 판정했을 때, 그것은 그 학자의 인생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국민의 정부에 최장집 교수가 참여했지만, 조선일보의 마녀사냥에 의해서 물러났었죠. 거기서 안티조선 운동이 시작되었고, 노무현 후보는 그 운동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여서 자신의 개혁적 정체성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여기서 최장집 교수가 반성해야 할 '자기 실천의 문제'가 무엇인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4. 그런 식의 '자격론'을 문제삼는다고 할 때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의 구성원은 백프로 무결할까요? 가령 김근태나 이부영은 노무현이 자기들 운동할때 사시공부하던 사람이란 이유로 과거에 그를 무시했습니다. 이런 자세, 저 역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나라당 탈당파 5명과 함께 한다 하여 그들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저도 열린우리당 창당엔 비판적이지만 김원웅이나 이부영이 한나라당 전력이 있다하여 그들과 합치는 일을 비판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원웅이나 이부영이 대개의 민주당 의원들보다 훨씬 나았으니까요. 일단 "자격론은 비판을 막는 반칙"이란게 제 기본입장이거니와, 열린우리당은 '자격론'의 입장에서 봐도, '자격론'을 펼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정당입니다.
5. 제 관점에서 볼 때, '노무현식 개혁'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본보다 훨씬 못한 '김대중식 개혁'의 '2기'일 뿐이죠. 아이디얼이라고 하시는데, 차라리 국민의 정부와 비교해보면 속편하실 것 같습니다. 제 글이 '민노당 편향적'이라서 문제라면 말이죠.

아큐라

2007.03.03 10:31:12
*.241.136.2

사파이어/ 그간 개혁적이라고 칭해지고 자위했던 사람들 기껏해야 뭐 징병제 테두리 내에서 동원기간을 줄여야 한다고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현재로서는 모병제 수준의 논의도 과격 급진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인데 몇몇 뛰어난 20 혹은 30대 활동가? 블로거?들의 식견을 경청하고 같이 논의해야 남한 사회가 겨우겨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골수 아나키스트 성향이 있는 사람들(저를 포함해서)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하겠지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호모 코레아니쿠스 : 잘 잡은 타켓, 그러나 느슨한 활시위 [9] 하뉴녕 2007-02-28 941
280 마재윤과 온게임넷 [3] 하뉴녕 2007-02-26 951
279 끌고 가는 민주주의 [2] [1] 하뉴녕 2007-02-26 948
278 오늘의 유머 [1] 하뉴녕 2007-02-25 968
277 [펌] 마재윤이 본좌라하되 하늘 아래 저그로다. [3] 하뉴녕 2007-02-25 923
276 동영상 두 개, 행사도 두 개! [5] 하뉴녕 2007-02-23 908
275 대통령을 안쓰러워하시는 idea님에 대한 답변 [3] 하뉴녕 2007-02-21 1083
274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file [4] 하뉴녕 2007-02-20 939
273 도서 목록 [1] 하뉴녕 2007-02-19 907
272 머리가 지끈지끈 [3] 하뉴녕 2007-02-19 883
271 다람쥐 쳇바퀴 돌기 [3] 하뉴녕 2007-02-18 873
270 최장집 교수와 대통령 [2] 하뉴녕 2007-02-18 840
269 부스걸 논란에 대한 단상 [3] 하뉴녕 2007-02-18 902
268 양 웬리 [9] 하뉴녕 2007-02-17 1194
267 진보주의자들이 대통령 억울함까지 헤아릴수야 [1] [1] 하뉴녕 2007-02-17 898
266 솔직함에 대해 [4] [1] 하뉴녕 2007-02-16 1475
265 여동생의 초콜릿 [4] 하뉴녕 2007-02-15 864
264 인용에서 인문학으로 : 어려운 여정 [6] 하뉴녕 2007-02-13 948
263 자취생 vs 가정주부 [10] 하뉴녕 2007-02-13 999
262 누가 NL과 PD를 욕할 것인가 [7] [1] 하뉴녕 2007-02-09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