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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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러나 경탄과 존경은 탐구를 자극할 수 있기는 하지만, 탐구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는 없다. (중략) 세계의 고찰은 인간의 감관들이 언제든 제시하고 감관들의 넓은 범위를 좇는 우리 지성이 언제든 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광경에서 출발해서, 종내는 별자리 해석[점성술]으로 끝났다. 도덕은 그것의 전개와 개발이 무한한 유용에까지 미칠 것으로 보이는 도덕적 자연본성에서의 가장 고결한 성질에서 출발해서, 종내는 광신이나 미신으로 끝났다. (중략) 돌의 낙하, 투석기의 운동은 그 요소들과 거기에서 표출되는 힘들로 분해되고 수학적으로 작업되고 나면, 마침내 세계 구조에 대한 명료하고도 전 미래에서도 불변적일 통찰을 가져왔고, 그리고 이 통찰은 고찰이 전진해 감에 따라 항상 오로지 확장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 결코 퇴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무릇 저 실례는 우리에게 우리 자연본성의 도덕적 소질을 다룸에 있어서도 이 길을 걷도록 충고할 수 있고, 비슷하게 좋은 성공을 거둘 희망을 줄 수 있다. (중략)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거친, 훈련되지 못한 판정의 착오를 막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훨씬 더 필요하거니와) 천재의 범람을 막을 수 있다. 천재의 범람에 의해서는 연금술의 도사들에 의해서 흔히 일어나는 바처럼, 아무런 방법적인 탐구나 자연에 대한 지식도 없이 몽상적인 보물들이 약속되고, 진짜 보물들은 내던져져 버린다. 한마디로 말해, (비판적으로 추구되고 방법적으로 이끌어지는) 학문[만]이 지혜론에 이르는 좁은 문이다. (후략)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맺음말에서
*굵은 글씨는 칸트 자신의 강조이며, 붉은색은 내가 표시한 것임.
실은 군대에서 '천재의 범람'이란 구절을 읽고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굴렀더랬다. 독일인들은 문장이 길지만 칸트는 적어도 헤겔처럼 '헤겔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고, 또한 백종현 선생님의 번역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으면 오독의 여지는 별로 없다. 이것은 이 책의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윤리학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보다 먼저 모든 학문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때는, 칸트 선생의 생각만큼 점성술과 지혜론의 차이가 명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가령 파이어아벤트 같은 과학철학자는 그것들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워낙에 얼렁뚱땅 점성술로 흘러가는 이론(?)이 많은 사회에 살다보면, 비록 점성술과 지혜론의 경계는 희미할 지라도, 그것들이 엄연히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어쨌거나 우리 사회에 천재가 범람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천재가 범람한다는 건 방법론이 없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데이터 몇 개에 자신의 센스를 끼워맞춰 얼렁뚱땅 황급하게 형이상학 하나가 만들어져 버린다.
칸트 선생님은 '훈련되지 못한 판정의 착오를 막'는 일보다 '천재의 범람을 막'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했다. 훈련되지 못한 판정의 착오는 훈련을 해서 시정하면 될 일이지만, '천재'들은 이성의 훈련 자체를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이 '학문'이 아니라면, 그 다음 할 일은 이 범람하는 '천재'들과 싸우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