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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어령의 '자살' 비난을 보고

조회 수 1144 추천 수 0 2007.03.02 12:36:07
이어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내 독서의 큰줄기 중의 하나는 <일본은 없다>로부터 시작된 '일본에 대한 인상비평 시리즈'였다. 뭐든지 근원으로 올라가려는 내 충동은 우리 세대의 잡스런 '일본 인상비평'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 책을 읽고 꽤 포만감을 느낀 나는 (중1이었던가?) 몇년 후에 '문화인류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걸 알고 마음 속 깊히 좌절했다. 나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이어령이 폄하한 루스 베네딕트가 문화인류학자라는 걸 (정확히 말하면 그 말이 무슨 의미라는 걸) 그 전까진 전혀 알지 못했다.

문화인류학은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지금도 잘 알지는 못하니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가령 당신이 '통속심리학'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꽤나 잘난 척하고 반짝반짝한 그 바닥의 거두가 (나는 차라리 '마두'라고 칭하고 싶다.) '정신분석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것, 프로이트와 융과 라캉의 광활한 영토가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알면서도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숨겼다면, 그래서 당신이 한동안 그 마두에게 속아 정신분석학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냈다면, 나중에 정신분석학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 내가 당시 이어령에게 느낀 감정은 대충 그런 거였다.
 
이어령에겐 '문화평론가'라는 직함이 붙어 있다. 과연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문화인류학은 아니지만, 문화평론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나온 <디지로그>도 (저서를 보지는 않고 군인시절 국방일보에 연재되던 연재물만 조금 봤는데) 일종의 '문화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잡스런 문화평론가'의 영역을 인정하지 못하고 전공자도 아닌 주제에 학문의 텃세를 부리는 중일까? 만일 내가 그런 인간이라면 이택광에게 혼나 마땅하겠지만, 사실 그건 내 취향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어령의 문화평론이 반짝반짝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잘못된 대중적 통념 위에 얹어진 양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령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그는 '국민성'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통념에 기대고, <디지로그>에서는 디지털 사회는 뭔가 대단히 새로운 사회일 거라는 자본주의와 대중의 욕망에 편승한다. 그는 일견 참신해 보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펼쳐내지 못한다.  

그런 분이 '석학'이나 '선생'으로 추앙받고, 심지어 인문대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 관련 서명을 할 때 '발문'까지 쓰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발문의 내용은 간략히 말하면 이런 거였다.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더) 필요하다." 이렇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문장을 쓰려면 차라리 더 추상적으로 아웃라인을 그리든지. 가령 이런 식으로. "사람은 천성적으로 앎을 추구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 문장)

그런 그가 "최근 연예인 등이 잇따라 무책임하게 목숨을 끊는 세태를 따끔하게 꾸짖고 나섰다."고 한다. “생명은 장난감이 아니며 자살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미련한 행동”이라 한다. “예전 염세 철학자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자살이라고 미화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전염병이 돌 때 가장 먼저 피신했다.”며 친절하게 철학자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젊을 때는 이상하게 사는 게 멋있어 보이지만 삶의 본능이 숭고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며 야바위를 친다.

이런 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자살은 종교인의 입장이 아니라면, 논박의 대상이 아니다. '본능'이 '숭고한 것'이란 건 아무래도 납득될 수 없는 주장이다. 본능은 어디에나 널려있고, 숭고는 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련한 행동'이란 말은 당위적 윤리의 관점이라기 보단 공리주의의 어법으로 들리는데, 공리주의의 관점에선 자살을 논박하기가 더욱 힘들다. 일상 생활을 돌이켜보라. 쾌락과 고통을 합산해서 '+' 값이 나오는게 어디 쉬운 일인지. 하지만 죽어버리면 그 값은 무조건 '0'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리주의적 선택을 절대화하다 보면 언제나 최선의 결론은 '집단 자살'로 매듭지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도 반박의 여지는 있다. 가령 '+2'와 '-2'가 합산되었을 때의 '0'과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의 '0'은 기호만 같지 실은 다른 의미라든지. 그래서 그런 식의 산술적인 비교는 무의미하다든지.

하지만 그래서 그런 문제를 제끼고 나면, 도대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무조건 더 좋다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우리는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양일까? 하지만 자살한 분은 이미 '없는 것'의 영역에 가 있다. 종교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를 비난할 것인가?  자살의 효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즉, 자살이 그 개인에게 올바른 선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사회의 입장에서 구성원의 자살은 대개 손해라는 것.

그러므로 이어령은 본인의 특성을 살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나았다. "디지털 시대에 자살은 도움이 안 된다." 혹은,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위해) 자살은 도움이 안 된다." 그것이 솔직한 말이다. 그의 말에 깔려 있는 정서는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한국적 잡초이즘의 의식 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게 통하지 않을 게다. 연예인들의 자살과는 별도로,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자살이 늘면 더 늘었지 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굳이 자살할 필요도 없이 사회의 낙오자들은 줄줄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오늘날의 낙오자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을 살더라도 대개 죽지는 않는다. 자살은 그 효과에서만이 아니라 그 원인에서도 이토록 사회적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이들의 역할은, 특히나 이어령처럼 한 사회의 '어른'이라고 불리는 이의 역할은, 자살에 대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자살 권하는 사회'를 탈피하기 위한 반성과 노력이다. 하지만 386 포함 그 위로 모든 한국 남자들은 20대에게 '훈계' 이외 다른 말을 해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이런게 문제라고 말하면 도중에 말끊고 "겨우 그게 힘들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냐 하면..."하기 바쁘고.

...물론 대개의 젊은이들은 저런 엉뚱한 질타를 들어도 '맞아요, 맞아요.' 끄덕끄덕하기 바쁘다. 그러면 밥 한그릇 더 사준다고 믿는 걸까? 아마 그들은 30대까지 어른들 말씀 잘 듣고 부모품에 안겨서 '얼라'처럼 얻어먹으며 토익공부하다 보면, 뭔가 정말로 길이 뚫릴 줄로 믿는 모양이다.

아큐라

2007.03.03 10:18:26
*.241.136.2

이어령은 20대부터 여지까지 오면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죠. 현 30대 이상들을 보면 사실 20대에서 그나마 퇴행하지 않은 사람들 보기 힘들고. 과로사회라는 기제는 그 구성원들이 퇴행하지 않고 그 자리에만 버티고 있어도 추앙받게 만들어 주는 듯. 뭐 원인이야 복합적이지만 결국 이승만 시대에서 지금까지 사실상 한국사회는 정신적인 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죠.

좋은 글 계속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으아

2013.02.02 14:44:24
*.113.106.17

끝내주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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