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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책세상

 

그때는 책세상 전집으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1학년 때 가장 먼저 읽은 니체의 저서가 <비극의 탄생>이었는데 이번에 백승영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한번 더 정독하게 되었다.


백승영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이 책에는 1) 소크라테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 와 2) 예술가-형이상학이 큰 주제의식으로 나타나며 그 하위프로그램으로 1) 예술론 2) 예술가-형이상학 3) 비극론 4) 문화/철학 비판이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요새는 샬로메가 제시한 니체 철학의 3단계 구분법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초기작에서 우리는 후기 니체에게 이어지는 부분을 뽑아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일단 니체가 거부한 부분부터 살펴보자. 먼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본인의 언급.



불쾌한 헤겔적 냄새를 풍기고, 몇 가지 정식들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시체 썩는 냄새와 숙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거기서는 하나의 ‘이념’이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론적이라는 대립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옮겨졌다 ; 역사 자체가 이 ‘이념’의 전개 과정이며 ; 비극에서 그 대립이 통일로 지향된다 ; 이러한 광학에서 이전에는 결코 마주친 적이 없던 것들이 갑자기 대립되고, 서로를 조명하며, 서로를 파악한다.......



“불쾌한 헤겔적 냄새”가 무엇인지는 “역사 자체가 이 ’이념의 전개 과정이며” 이하로 본인이 스스로 잘 설명하고 있다. 쇼펜하어우적인 요소를 거부했다는 것은 그의 염세주의적 요소와 저 예술가-형이상학 자체를 거부했다는 얘기일 게다. 그런데 예술가-형이상학 자체가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굳건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 여기서 “불쾌한 헤겔적 냄새”는 “쇼펜하우어의 시체 썪는 냄새”와 상보적인 관계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찬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p45)


이 개별화의 원리 속에서만 근원적 일자의 영원히 성취된 목표, 즉 가상을 통한 자신의 구원이 실행된다.(p46)



이것이 예술가-형이상학의 내용이다. 세계는 근원적 일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의 속성은 고통과 모순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이 아폴론적인 것이며, 그 아폴론적인 것 밑으로 우리가 근원 일자의 고통을 함께 하고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저 유명한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저편의 또다른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에서.



영원히 불완전한 세계, 영원한 모순의 그림자, 그것도 불완전한 그림자인 이 세계, 그것을 창조한 불완전한 창조자에게 있어서의 도취적 환락. 세계는 한때 그렇게 보였다.


...


저편의 또다른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덧없는 행복의 망상이었다.



그러니까 ‘맥락’을 모르고 보면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을 씹는다니까 “또 기독교인들 까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가만히 보면 자신의 예술가-형이상학을 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 자신의 예술가-형이상학이 기독교 비판에 불철저한 것이라고 (사실상 동일한 욕망에 기초해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이 책의 주제의식 중 니체에게 계승된 것은 1) 소크라테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만 남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강조를 통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위 프로그램의 4) 문화/철학 비판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에 영향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비판이며, 거기에 대한 도구 역시 디오니소스라는 점을 상기하면 ( 1) 예술론 과 3) 비극론에서 디오니소스가 등장한다는 건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 책의 통합성은 더 커진다.


요약하자면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통합(헤겔적인 도식)을 통해 근원일자를 구원(쇼펜하우어적인 도식) 하려고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아폴론적인 것은 빼고 디오니소스적인 것만 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의 상대자가 소크라테스적인 주지주의이던 것이 이 다음부터는 다름아닌 그리스도교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사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비극의 탄생>이 최초로 그리스도교의 문제를 지적했다고 ‘우기고’ 있지만 백승영은 그런 구절은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의 말은 되도록 믿는 편이 좋다. 나도 꼼꼼히 뜯어봤는데 딱히 “여기 있잖아요.” 할 구절도 찾을 수 없었고. 사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도교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적’이란 개념은 니체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백승영은 자신의 니체 해설서 제목을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은 비극적, 그리고 모순적 생명성(+....에 대한 긍정)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안티 크리스트와 안티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후기철학에서 이 개념은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을 뿐이라고 백승영은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왜 그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의 어떤 다른 저서에서보다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하고 그 한계에 맞닥트리며 비극을 호출한다. 아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합리주의자들의 외침을 자기 식으로 수용한다.



예술은 학문과 상관성이 있으며 혹 그것을 보완하는 것은 아닐까?(p114)


우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된 의미심장한 망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사유는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사유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정할 능력이 있다는 흔들림없이 확고한 믿음이다. 이 당당한 형이상학적 망상은 학문에 본능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학문을 그 한계점으로, 즉 학문이 예술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점으로 몰고 간다. 예술은 이런 메커니즘에서 원래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p117)


칸트쇼펜하우어의 커다란 용기와 지혜는 힘겨운 승리를 얻었다. 즉 논리의 본질 안에 내재한 낙천주의, 다시 말해 우리 문화의 토대인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다.(p137)


저 “전환”은 수호신의 새로운 구성과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가?(p120)



이 명료한 문장들엔 더 덧붙일 것도 없다. 니체 철학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겐 이러한 서술들이 ‘데카당스’라는 개념으로 타 문화를 몰아붙이고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방식보다 훨씬 명료해 보인다.


여기서 칸트는 긍정적인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있으면 니체는 칸트를, 독일철학 전체를 “간교한 신학”이라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칸트 자체보다는 오히려 칸트의 후학들을 (피히테, 셸링에서 헤겔까지) 칸트와 함께 엮은 평가인 것 같다. 칸트는 순수사변이성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을 획정지음으로써 니체가 말한대로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의 “토대인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위 부분들에 대해,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희망해도 좋을 부분”이라고 서술하며 그것을 이념(Idee)의 영역이라 칭한다. 칸트 이후로는 칸트가 그 이념의 영역까지 나아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일색이지만, 칸트에게서 멈춘다면 어찌 그 이념이 하나만 가능하겠는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시인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다.)



시인들은 하나같이 믿는다. 풀밭에, 그리고 외딴 산허리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있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기라도 하면 그들은 자연 자체가 그들을 연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연이 은밀한, 그리고 아첨 섞인 연모의 말을 하기 위해 그들의 귓속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이에 그들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뭇 인간 앞에서 가슴을 펴고 거만을 떤다!


아, 하늘과 땅 사이에는 시인들만이 꿈꿀 수 있는 것이 그토록 많이 있구나!


특히 하늘 위에는. 신들은 하나같이 시인의 비유이며 시인의 궤변이기 때문이다!


정녕, 우리는 언제나 위로 끌려 올라간다. 구름 나라로. 우리는 구름 위에 형형색색의 껍데기들을 앉혀놓고는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위버멘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들은 구름 위에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저들 모든 신과 위버멘쉬는.


아,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저 터무니없는 것 모두에게 얼마나 지쳐 있는가! 아, 나 어찌 그토록 시인들에게 지쳐 있는가!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답니다.”라는 제자의 말에 “믿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지. 특히 나에 대한 믿음은.”이라고 대꾸한 후 설파된 이 연설은, 한때 그가 비난했던 시인들을, 그와 동류의 위인들로 엮고 있다. 그러니까 차라투스트라, 니체 자신도 한 명의 시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순진한 믿음도 시적인 것이고. 여기서 니체는 ‘신’이라는 환상과 자신의 ‘위버멘쉬’ 사이에 어떠한 존재론적인 등급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것이 나의 편견을 용인한다면, 유일한 이성론자인 칸트의 순수사변이성의 체계 위에 올라설 수 있는 이념(Idee) 간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선 대개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기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인간이 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는 세계관이라 설파하기도 하고, 만물은 힘에의 의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공리주의적(?)인 설명이나 스콜라 철학적인 설명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신존재증명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보다는 이성의 위에 위치한, 이성의 영역으로 포괄되지 않는 세계관에 대한 통찰이란 서술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포스트모던이 니체의 자식이며, 그것이 이성의 한계를 지시했다면, 도대체 이성이 어디서부터 한계 상황인지는 인지하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무턱대고 이성은 정답이 아니라는 서술만으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니체와 칸트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지 않을까?



노정태

2007.03.27 02: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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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니체와 칸트가 저 명목으로 만나고 있으면, 그 까페에는 다른 철학자들도 많이 와서 앉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의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원시종교시대부터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어쩌면 그 '사실'에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 철학자들을 분류해보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저는 이 발상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철학을 연구하시는 분이 흥미가 동하신다면 논문이나 책을 거리낌없이 써주시길. 혹은, 관련 서적이 있다면, 아시는 분은 추가 리플로 가르쳐 주세요. 카피레프트 합시다.)

하뉴녕

2007.03.27 03: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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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하지만 대개 '인간의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 위에는 대개 '자연 이성'이나 '신 이성'과 같은 새로운 차원이 있었던 것 같거든. 한계가 있다는 걸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 한계 위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자율성이 가능한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일인 것 같다.

꼭 니체와 칸트만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아니고, 그들도 결과적으로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단을 주장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고 그렇게 많은 철학자가 얽히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구나. 그리고 니체 이후로 이성의 한계를 얘기한 이들은, 대개 니체의 자식이기도 하고 말야.

이상한 모자

2007.03.27 1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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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윤형이었다면 이 글자들이 뒷 배경 스킨의 줄에 알맞도록 뭔가 수정을 했을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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