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분실된 책들

조회 수 856 추천 수 0 2007.03.19 21:16:19

 

솔직히 내가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 내 성격은 적게 읽고 많이 떠드는 편이다. 다만 중고등학교 때는 어차피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집에 붙잡아 놓고 있었으니 몰래 자습서나 문제지 말고 다른 책 보는 재미에 책을 읽었다. 중학교 때 읽던 책은 <은하영웅전설>이나 김용 무협지였고, 고등학교 때 내 교양이라 해봤자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나 이진경의 책 한 두권 읽고 무한한 감동을 받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철학사>는 윌 듀란트 걸로 한번 읽었고. 나는 그때 소위 '진빠'였는데 진중권이 당대비평에 실린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라는 글에서 데리다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보고, 그리고 (당시까지는) 판타지 소설 매니아로써 김상현이 <탐그루>에서 그 데리다를 패러디하는 걸 보고 (지금 생각하니 그 패러디는 수준이 낮았다.) 시공 로고스 총서의 <데리다>를 사서 읽다가 무던히도 노력했건만 20페이지도 견디지 못하고 집어 던졌다.


그래도 <월간 인물과 사상>이나 단행본 <인물과 사상>은 꼬박꼬박 사서 읽었는데,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첫째는 부모님이 내가 워낙에 책을 읽는다는 걸 알고 저녁식사비 3천원 이외엔 돈을 주지 않는 자금통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나는 저녁을 굶으면서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한창 나이에 아주 안 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야자 끝나고 열한 시쯤 집에 들어가면 나는 배고프다고 엄마에게 밤참을 요구하기에 바빴다. 너무너무 배고픈 날은 매점에서 천원짜리 라면을 사먹었다. 그 라면이 질이 나빠서 죽어도 못 먹겠다고 느낄 때엔 한솥도시락에 가서 2천원짜리 치킨도시락을 사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둘째는 그 책들을 둘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저녁값 아껴 몰래 산 책들을 집에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친구들의 묵인 하에 남는 사물함을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고3 말엽에는 담임선생님 몰래 사물함 세개를 쓰고 있었다. 그래도 넘치는 책들은 걸어서 통학하는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친구 집에 갖다놨다. 친구는 박스 안에 그 책들을 쌓아놨다. 그때부터 내 책들은 박스와 무한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중에 수능끝나고 각 사물함과 친구 집에서 그 책들을 취합하려고 찾아보니, 은하영웅전설(이때 가지고 있던 책들은 해적판이긴 했다.)이나 김용무협지들은 거의 친구들이 가지고 가 버리고 없었다. 나는 <슬레이어즈>도 소설 책으로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두 세권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슬레이어즈> 1권을 삼십여페이지 쯤 다시 읽어봤는데, 역시 일본오락물만큼 술술 읽히면서 사람 웃기는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외 많은 책들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다.


대학교 가서는 술마시고 사람만나고 가끔은 운동도 하느라 책을 지지리도 안 읽었다. 그래도 책을 빌려보기 보다는 사보는 편이었고, 워낙에 공부는 안 하면서도 대학은 오래 다녔던지라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책은 슬금 슬금 늘어났다. 나는 군대 가기 직전에 집과 싸우고 연락을 안 하고 지내고 있었다. 2004년 말에 나는 내 책들을 친구들의 관심분야에 따라 나눴고, 아무도 가져가고 싶어하지 않는 책들은 박스 세개 정도에 싸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형의 자취방에 두었다.


요새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때 흩어놓았던 책들을 수거하고 다닌다. 마침 부모님도 이사하셨기 때문에 부모님 집에 그냥 두고 왔던 '옛날 책'들도 다 내 책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박스에 넣어놨던 책들. 그 책들은 내가 군대에서 간부와 고참들에게 절절 맬 동안 습기에 절어서 반수 이상이 새카맣게 썩어 있었다. 그 모양은 흡사 내가 군대에서 '부대조달부식 수송'을 하던 시절 비온 다음날 가끔 볼 수 있었던 새카맣게 썩어버린 채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썩어버리는 책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나는 결정할 권한이 없다. 썩어버려도 그다지 마음 아프지 않은 책들은 썩지 않았고, 내가 군생활 내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책들은 썩어버렸다. 나는 시커멓게 썩어버린 <앰버연대기>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국에선, 무슨 책이 되었든 금세 품절되기 때문에 한번 날 떠나간 책들은 다시 살 수가 없다.


세상이 많이 심심해져서, 혹은 내가 세상을 너무 알아버려서 앞으로는 예전보다는 책을 더 읽을 것 같다. 이젠 책들을 분실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져도 큰 일이다. 비싼 책값보다 더 무서운 것은 책을 수납할 공간의 부족이기 때문이다.




P.S 얼마전 비나리 님 블로그에서 소개되었던 헤드윅 앨범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헤드윅은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어느날 어느 고참이 (하루키 소설 어딘가에 얘기가 나온다고) 플라톤 <향연>의 내용을 물었고, 그날 갑자기 (나는 원래 "Angry Inch"를 더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The Origin of love"가 무척 듣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에서 주문해서 산 CD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CD는 영화 OST가 아니라 원작 뮤지컬 OST라서 내가 영화에선 들은 적이 없는 "Random Number Generation"이란 노래가 있는데 있는데 이 노래도 들을만 하다.






태공망

2007.03.19 23:20:11
*.109.202.16

ㅎㅎ [앰버연대기] 저는 깨끗하게 가지고 있습죠. 염장질입니다 :)
그나저나 말씀하신대로 우리나라는 책이 너무 금새 품절됩니다. 가끔 죽었다가 되살아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적의 작품들도 있는데 (요즘 [향수]가 그렇죠.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더군요. 예전에는 품절이었는데 말이죠) 그건 거의 드문 일이죠. 여하튼 책 다 찾으시길 바랍니다. ^^

kritiker

2007.03.20 13:35:56
*.128.23.186

수납할 공간 부족. 요즘 아주 뼈아프게 느끼고 있어.
지금 내 방 문 거의 안 열린다오. 책 박스에 막혀서...--;
여기서 뱃살이 1인치만 더 증가하면 정말 뱃살 때문에 문 사이에 껴서 오도가도 못할 것 같아. 덕분에 아무도 내 방에 안 들어오고 있으니 나야 좋긴 한데..그러다보니 그 사이에 책이고 잡지고 만화고 하여간 종이란 종이는 더 늘어가고...;;;
날 잡아서 분양해야 하려나...ㅠㅠ<-그런데 누가 가져가지;ㅇ;?

corwin

2007.03.27 09:12:39
*.106.22.131

썩어버린 앰버 연대기. 제 마음이 다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아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1 무료 [2] 하뉴녕 2007-04-10 866
320 드디어 발동이 걸린 <마왕> [4] 하뉴녕 2007-04-07 842
319 FTA 체결과 민주적 리더십의 문제 [6] 하뉴녕 2007-04-05 1402
318 조중동과 철학자 대통령 [5] 하뉴녕 2007-04-04 1093
317 달리기와 술 하뉴녕 2007-04-04 850
316 사병의 입장에서 본 파병 [3] 하뉴녕 2007-04-03 882
315 평범한 주말 [1] 하뉴녕 2007-04-01 831
314 술자리 사담 [1] [2] 하뉴녕 2007-03-30 1226
313 보라! [2] 하뉴녕 2007-03-29 951
312 명계남, 조선바보 노무현? [9] 하뉴녕 2007-03-29 876
311 비극의 탄생 : 어쩌면 ‘성숙한’ 니체 철학보다 더 납득하기 쉬운 [3] 하뉴녕 2007-03-27 1421
310 한미 FTA, 통속심리학, 그리고 무협지 [9] [1] 하뉴녕 2007-03-25 1040
309 장쯔이 광고 논란 [5] 하뉴녕 2007-03-24 1233
308 절개 하뉴녕 2007-03-24 869
307 PGR, 고 며칠을 못 참아서... [4] 하뉴녕 2007-03-22 950
306 스타크래프트 테란 연주 하뉴녕 2007-03-22 782
305 손학규 vs 대통령 [3] 하뉴녕 2007-03-21 1912
304 뒷풀이, 그리고 다른 소식들 [7] 하뉴녕 2007-03-21 946
303 "팬심으로 대동단결"은 없다. 하뉴녕 2007-03-20 825
» 분실된 책들 [3] 하뉴녕 2007-03-19 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