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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쇼트트랙 순위조작 사건을 보며

조회 수 3293 추천 수 0 2010.12.24 11:56:11

쇼트트랙 순위조작 사건이 또 터졌다. 이번에는 중고교 대회에서의 순위조작이었다고 한다. 공정한 경쟁으로 실력을 양성해야할 청소년 대회에서 순위조작을 감행하고, 그 조작을 위해 코치가 챙기지 않은 선수는 대회를 포기시키고, 순위조작에 참여하지 않는 코치들을 배제하려 한 이들의 행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윤리적으로도 그렇고,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면 쇼트트랙 선수들의 실력향상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점에서 실용적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쇼트트랙 순위조작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진 국가대표 선발전을 생각해보면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나의 좁은 세계가 있다. '판'이라고 불러보자. 이 판의 구성원들은 그 판에 거주하기 위해 하루종일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은 그 바깥과는 거의 소통하지 않는 폐쇄된 세계다. 이 판에 일정한 량의 자본이 유입된다. 바깥 세계가 이 좁은 판을 지탱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한 한정된 양의 자본이다. 그 유일한 목적이란 '국제대회 입상'이다. 바깥세계는 오직 그 목적에 대해서만 이 판에 관심을 가진다. 국제대회가 없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 판의 구성원들은 바깥 세계 사람들에게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다. 말이 좋아 '국제대회 입상'이지 실상은 '세계선수권'조차도 대개는 '올림픽'을 위한 연습일 뿐이다. 4년에 한번 정도 바깥 세계 사람들은 이들에게 '국가'의 의무를 지우고 이들의 활동에 열광한다.


한정된 양의 투입되는 자본이 있다. 그리고 그걸로 먹고 살아야 하는 어느 정도 숫자의 선수가 있다. 이들이 그 자본을 타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국가대표가 되는 길 뿐이다. 그 '기회'를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 먹자는게 순위조작을 둘러싼 욕망의 핵심이고 이 욕망으로부터 스포츠계의 승부조작의 피라미드가 내려오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공정한 경쟁'이란 스포츠의 로망이나 '거짓에 대한 규탄'이란 윤리의 원칙으로만 접근하는 건 그들에 대해 너무 폭력적인 일일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는 e스포츠 승부조작과는 또 상황이 다른 면이 있다. 물론 나는 스타리그 승부조작 당시에도 프로게이머들의 여건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지만, 스타리그에는 그 게이머와 그의 경기를 보고 열광하는 '팬'이 존재한다. 제 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팬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은 플레이어의 의무라고 여겨진다. 단순히 "거짓말 하지 말고 차카게 살자."라고 되뇌이는 것 이상의 윤리적 의무가 덧씌워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팬을 통해 지탱되는 스포츠라면, 팬에 대한 신의를 계속해서 배반해서는 판이 지탱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대체 우리 중 누구가 쇼트트랙 국내경기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개인차는 있겠지만, 크게 보아 그 경기는 선수들, 코치들, 그들의 가족들과 같은 그 '판'의 구성원들에게만 의미를 가진다고 봐야 한다. 바깥 세계는 사실 그들의 승부조작으로 기량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국제대회 성적에 지장이 올까봐 신경을 쓰는 것이지, 그들의 경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어떤 코치가 이렇게 항변한다면 어떨까. "솔직히 우리가 무슨 공정한 경쟁시켜서 성적 향상시켰느냐. 태릉에서 존나 굴려서 세계레벨 성적 만들었는데. 사실 국내 1등에서 10등까지는 고만고만하다. 근데 국대선발전에서 재수가 없으면 그중 몇몇은 평생 올림픽 무대 못 밟을 수도 있다. 올림픽 나가면 동메달이라도 하나 따올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다. 얼마나 잔인한 룰인가. 걔 인생 당신들이 책임질 수 있나? 국제대회 못 나가도 국내에서 기량 발휘해서 인정받고 먹고 살 수 있느냔 말이다." 물론 중고교 대회까지 만연한 승부조작은 그 판의 존재의의까지 흔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 세태는 우리가 평소에 열광하지 않는 스포츠의 선수들을 국제대회를 위해 '상비군'으로 유지시키는 엘리트 스포츠 체제의 그림자다.


동계든 하계든 올림픽에서 10위 안에 들고 아시안게임에서 2위하며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이런 구조를 가진 수많은 '판'들이 존재하는 거다. 그리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와 같이, 그렇게 지원을 받지 않고 혹독한 훈련을 받은 상비군들이 천 수백개 실업팀에서 육성된 프로선수들과 만나서 대등하게 싸우면 우리는 그 '로망'에 눈물을 흘린다. 물론 나도 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로망으로 점철되어 있을까. 애초에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란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는 걸까?


2002년 겨울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김동성은 안톤 오노의 헐리웃 액션에 넘어간 부당한 심판 때문에 올림픽 금메달을 강탈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운동권'을 넘어 '대중'에게 반미정서를 전파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안톤 오노가 없었다면 2002년 여름의 촛불시위도, 그해 겨울 노무현의 승리도 없었을 수도 있다. 올림픽 이후 세계선수권에서 출중한 기량의 김동성은 모든 경쟁자들을 박살내고 여러 종목에서 금메달을 쓸어갔다. 아마 안톤 오노에 대한 한풀이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졌던 세계선수권으로 기억될는지도 모르겠다. 2006년 올림픽 때는 토리노의 영웅 안현수가 한국에게 여러개의 금메달을 가져다 주었다. 김동성과 안현수는 은퇴했다. 그러나 안톤오노는 2010년 벤쿠버에도 출전하여 미국에 메달을 가져다 주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미국 쇼트트랙이 약해서일수도 있겠지. 그러나 핵심은 김동성이나 안현수가 십년 가량 세계수준의 기량을 유지하고 분투할 수 있는 선수였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그런 백전노장의 '로망'을 실현한다는 건 후배들의 밥그릇을 대놓고 걷어차는 일이었단 것, 적어도 그런 구조가 그들의 이른 은퇴를 강요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은퇴는 윤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결단이란 점에서 승부조작과는 물론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은퇴가 코치들의 임의적인 승부조작과 비슷한 종류의 '배려'를 반영하고 있단 것도 사실이다. 자력구제. 공동대처. 적발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담합들은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모두가 참여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럴리가 없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할 수밖에 없으니 순위조작이 욕먹어 마땅한 일이지만) 이들의 담합이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그들의 국내경기를 보면서 가슴이 뛰었을 '팬'이나, 더 빠르게 달리고 싶단 욕망만으로 그들을 존경한 '선수 지망생'에게나 있다.


예전같으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유지되었을 이런 종류의 담합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데에는 인터넷이란 매체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평소엔 아무도 보지 않는 국가대표 선발전이라도, 누리꾼들은 경기동영상을 보면서 순위조작의 의혹을 제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선 2010/02/16 - [문화/기타] - 쇼트트랙, 그리고 '사이버 민중주의' 과 2010/03/13 - [문화/용어] - [경향신문] 사이버 민중주의 를 참조할 것.) 그리고 그러한 담합이 계파를 만들어내고, 그 계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결국 스포츠의 발전을 가로막는 악성 종양이란 사실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발 더 나가서 생각한다면 어떨까. 우리에겐 금메달만이 필요할까. 금메달 말고 다른 것은 필요없을까. 만일 '국가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유지해야 한다는데 모두들 동의한다면, 그들에게 무언가를 더 줘야 하지 않을까.  
  


 

음..

2010.12.24 12:41:28
*.214.245.154

역시 좋은 글. 그러나 이정도 관점은 일반 기자들도 기사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만 있다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부분인 거 같은데... 좀처럼 이런 글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죠?...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

따로

2010.12.24 14:58:25
*.149.153.7

고겡님 품평응 슈스케에서나 하시구여~

메버릭꾸랑

2010.12.24 19:23:49
*.142.120.173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공성을 띤 이 공간에서 느낀 점 정도 이야기 할수 있는거 아닌가요?

글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 하는걸 왜 비아냥 거리는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이 공간이

한윤형씨 의 활동에 특별한 도움이 되는것 같지 않다고 본인도 판단하는것 같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도움이 될수도 있는데..... 그리고 슈스케 옛날에 끝났거든요 --

고도리

2010.12.24 21:55:11
*.30.45.128

아....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태꿘브이

2010.12.25 17:54:07
*.47.222.119

메리 크리스마스

조갑제의한라산등반

2010.12.28 17:03:04
*.253.194.46

오 이건 스포츠 승부 조작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들 -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속적으로 유지가 불가능한 판- 에
적용될수도 있을 거 같네요.

음..

2010.12.30 21:42:04
*.214.245.154

한윤형// 요즘 개인이 공공장송에서 몰카한 자료들이 인터넷에서 이슈화 되는 경우가 많잖습니까.. 개똥녀사건부터해서.. 오늘 뉴스에서도 떠들던데, 지하철녀사건까지..

이런 현상이 좋은 걸까요?? 분명 순기능도 있고 부정적인 기능도 있어보이는데... 어떤게 답인지 잘모르겠습니다...

감시기능을 통해서 겉으로 들어나는 효과가 분명 있는 거 같긴합니다만.. 어차피 몰카를 찍는 인간들부터해서 거기에 악플을 다는 인간들이 정말 정의감이 투철해서 그런 거 같지는 않거든요.. 우선 지속적인 실천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구요.. 사실 그들은 정의감을 가장한 자신의 스트레스 푸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나 역시 아무튼간에 순기능도 있을 거 같긴한데...

혹자는 미디어가 발달해서 그렇지 예전에도 똑같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까요... 적어도 지하철녀 사건은 그렇게 보기 힘들거 같은데요(예전같으면(20년전만해도) 바로 기싸데기 날리는 어른들이 있었을거 같은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sk하청업체 사건같은 건 예전에도 있었을거 같으나..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던 면이 크지 않는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저런 몰카식으로 피의자를 공격하는 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단기적인) 경제(?) 측면만 따지자면 이로운 걸까요??

하뉴녕

2010.12.30 22:40:38
*.149.153.7

저 역시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한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요. 최근에 그런 문제의식에서 쓴 게시물이 바로 이것입니다.

http://yhhan.tistory.com/1277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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