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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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술자리에서 노정태와 잠깐 얘기하던 것인데, 그때 모종의 사정으로 논의를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겸 하나의 글을 쓴다. 우리는 아마도 장르소설 창작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쩌면 영화 시나리오였는지도 모르겠고, 기타 다른 종류의 것이었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으리라.) 발달된 외국의 맥락을 모두 소화한 다음에 창작에 임해야 할 것이라는 노정태의 주장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긍정을 했으나, 가령 "그것이 한국에서 창작을 하는 길이다."라는 식의 단언이 이루어질 경우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일단 실천적으로 볼 때, 특정한 종류의 무지가 오히려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많다. 비평하는 이들이 아무리 아 이러이러한 부분을 고려하신 거로군요, 라고 말해봤자 "예? 그냥 썼는데요."라는 대답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고 비평적 접근이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입장이 그런 시각과 반대된다는 것은 이 블로그에 종종 들르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맥락을 소화한 후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당위는 일단 그냥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특정해서 SF라고 생각해 보자. SF라는 장르의 맥락을 충실히 탐구하고 해외의 SF 잡지에 실릴 정도의 중단편소설을 써낼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작업은 찬사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탐구하지 못했거나, 혹은 탐구할 의사 자체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창작하여 그 소설이 설령 1950년대에 나온 어느 미국 SF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릇된(?) 일은 아니다. 그 작품은 그 작품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창작에 대한 욕망은 한국 사회의 문화사적 맥락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발달양식이 50년전의 미국 SF와 비슷하다면, 물론 쪽팔려 할 수도 있겠지만, 양 시대의 유사성에 대해 고찰해 볼 수도 있다. 그건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리얼리티이지 마치 선진공업국의 기술을 따라잡는다는 식으로 극복되어야 할 오점은 아니다. 게다가 비슷한 양식의 소설도 언제나 다른 시공간에서 조금씩 다른 맥락으로 계속 생산되어야 한다. <오만과 편견> 이후에도 연애소설은 계속 나오듯이. 이 이야기는 노정태 역시 언젠가 다른 포스트에서 했던 말인 것 같다.
따라서 저 규정은 아무래도 보편적인 창작자들에게 적용하기에는 실천적인 규제력도 없고 의의도 없는 것이 될 터인데, 그러므로 나에게만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삶의 태도가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점도 검토해야겠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창작에 유능한 사람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다. 맥락을 파악한다는 것은 창작자에겐 지적인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로망을 찾아가는 작업이라야 한다. 전작들에 자신의 로망을 투영하다가, 그것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욕망이 펼쳐지는 과정이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올바른 창작'에 대한 당위적 인식이 규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당위적 인식을 피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직까지 창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높다. "넌 왜 소설을 쓰지 않는데?"라는 질문에 "아직 맥락을 다 파악하지 못해서."라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걸작을 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실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아니라, 일단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
일단 실천적으로 볼 때, 특정한 종류의 무지가 오히려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많다. 비평하는 이들이 아무리 아 이러이러한 부분을 고려하신 거로군요, 라고 말해봤자 "예? 그냥 썼는데요."라는 대답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고 비평적 접근이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입장이 그런 시각과 반대된다는 것은 이 블로그에 종종 들르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맥락을 소화한 후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당위는 일단 그냥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특정해서 SF라고 생각해 보자. SF라는 장르의 맥락을 충실히 탐구하고 해외의 SF 잡지에 실릴 정도의 중단편소설을 써낼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작업은 찬사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탐구하지 못했거나, 혹은 탐구할 의사 자체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창작하여 그 소설이 설령 1950년대에 나온 어느 미국 SF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릇된(?) 일은 아니다. 그 작품은 그 작품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창작에 대한 욕망은 한국 사회의 문화사적 맥락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발달양식이 50년전의 미국 SF와 비슷하다면, 물론 쪽팔려 할 수도 있겠지만, 양 시대의 유사성에 대해 고찰해 볼 수도 있다. 그건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리얼리티이지 마치 선진공업국의 기술을 따라잡는다는 식으로 극복되어야 할 오점은 아니다. 게다가 비슷한 양식의 소설도 언제나 다른 시공간에서 조금씩 다른 맥락으로 계속 생산되어야 한다. <오만과 편견> 이후에도 연애소설은 계속 나오듯이. 이 이야기는 노정태 역시 언젠가 다른 포스트에서 했던 말인 것 같다.
따라서 저 규정은 아무래도 보편적인 창작자들에게 적용하기에는 실천적인 규제력도 없고 의의도 없는 것이 될 터인데, 그러므로 나에게만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삶의 태도가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점도 검토해야겠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창작에 유능한 사람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다. 맥락을 파악한다는 것은 창작자에겐 지적인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로망을 찾아가는 작업이라야 한다. 전작들에 자신의 로망을 투영하다가, 그것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욕망이 펼쳐지는 과정이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올바른 창작'에 대한 당위적 인식이 규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당위적 인식을 피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직까지 창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높다. "넌 왜 소설을 쓰지 않는데?"라는 질문에 "아직 맥락을 다 파악하지 못해서."라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걸작을 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실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아니라, 일단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