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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에반게리온 서 : 그 소년이 돌아왔다!

조회 수 1031 추천 수 0 2008.01.31 18:00:18



부산으로 내려갔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 왜 에반게리온 덕후가 아닌 척, 무심한 척 하고 있었을까. 평일 낮시간 극장을 반쯤 채운 이들은 바로 내 또래의 남성들이었다. 커플이 셋, 억지로 끌려온 조카인 듯한 꼬맹이가 둘. 그들은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전에 극장을 떠났다. 나머지 남성들은 미사토 상의 서비스가 올라오는 순간까지 극장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극장에서 나갈 때 두명의 남성이 "카오루가 몇번째 사도였지?"라는 토픽으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건 잊어버렸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본 적은 많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체험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TV판의 내용과 똑같은 장면들이, 템포가 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발진하고, 미묘하게 편곡된 "엔젤즈 어택"이 흘러나오는 순간, 내 정신줄이 요단강을 건너갔다.


십년 전에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 자체가 우리와 함께 사춘기였다. 규정되기 힘든 불명료함과 멋있어 보이려는 강박 같은 것이 작품에 있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 그를 더욱 사랑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는 그때의 인간관계를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한다. 대사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는 훨씬 깔끔하다. 겐도우와 신지, 신지와 미사토, 겐도우와 레이, 그리고 레이와 신지......


미사토의 비중이 커진 것이 마음이 든다. 대위 미사토는 중령 미사토로 승진(?)도 했고, 겐도우와 신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자신은 초호기 파일럿을 믿고 있으니, 사령관님도 아들을 믿어 달라고 요구하는 미사토의 모습은 십 년전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믿음에 부응하여, 에바 초호기가 다시 양전자포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갈 때, 눈물이 났다.


미사토의 어른스러운 지원을 받은 신지는 더 차분해졌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소년은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곤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가령 가출하는 장면은 예전에는 그야말로 가출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바람 좀 쐬러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 "이제 됐어. 미사토 상 옆으로 데려다줘!" 그렇게 외치자 네르프의 직원들이 나타난다. 님아 좀 짱인듯......


2,3,4편 모두 기대가 된다. 제작진들은 드라마와 영화의 문법의 차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초호기와 영호기가 같이 출격하는 장면을 1편의 클라이맥스로 설정한 것은 탁월했다. 레이와 신지가 가까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대사 몇 개로 잘 추려서 정서적인 느낌을 전달했다. 훗날 "보꾸와 보꾸다." "와따시와 와따시..."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며 긴 사색(?)에 빠지는 신지와 레이의 내면세계를 영화는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가 된다.


담배피는 리츠코 상의 모습 하악하악. TV판 한화에 등장한 주제에 팬이 많으셨던 카오루 사마가 마지막에 등장해 주시니 포만감 충족. 근데 제레 영감탱이들은 좀 비중이 떨어진 것 같지 않아? 겐도우의 계획을 처음부터 암시해 버리니, 제레가 겐도우의 상사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가 않는단 말이지. 영상의 진전이 만들어낸 에바와 사도의 전투씬만으로도 이 시리즈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고, 무언가 훨씬 더 깔끔하게 이해되는 결론을 줄 거라는 -에바에게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기대마저 들게 만든다.


알몸의 레이가 신지로부터 몸을 돌려 팬티를 입는 순간, 같이 본 친구는 자신의 사이키가 소년 시절로 존트해 버리는 줄 알았다고 낄낄거렸다. 나는 레이빠가 아니므로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2편에서 아스카짱의 노란 원피스가 바람에 넘어가 버리는 장면을 본다면, 흠좀무...... 퇴행이 시작될 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런 것이다. 90년대 소년들의 자살을 만류했던 거대한 자기 위안의 판타지다. 우타다 히카루의 OST가 그렇게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에바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얘기해 주고 있다. 이카리 신지 14세, 내가 사랑했던, 죽어버리고 싶을 때 나 대신 찌질거려줬던 고마운 그 소년이 돌아왔다. 살아서 청년이 된 우리에게, 여전히 신화로 살아 있는 그 소년이.






P.S 일본에서 잠깐이나마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그 결과 수입단가가 높아져서, 현재 에반게리온은 1편만 계약이 된 상태. 2편부터는 극장에서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불안하다. 다시 극장에 가서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야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에반게리온을 다운로드 받아 보는 것은 배신이다. 자 일단 CGV로 가시라니까. 제발 2편도 극장에서 보자구요.


노지아

2008.01.31 18:41:56
*.149.21.179

이 자식! 내가 했던 멘트들이 그대로 있어!

그나저나 자살을 만류했던.. 이라니 너무 거창한데.
너무나 찌질한 나머지 자살도 못한거 아냐?
외려 이 캐릭터가 찌질의 롤모델이 되어주진 않았나 싶은데..

하뉴녕

2008.01.31 19:18:33
*.176.49.134

당신 말 인용은 제레 얘기밖에 없는데?

신지를 우리 시대의 찌질이들과 비교하지는 말자구. 그리고 감정이입하는 건 그들의 자유지.

sylphion

2008.01.31 18:41:45
*.248.137.197

저도 2편 수입이 걱정인지라.. CGV를 3번 다녀왔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걱정입니다.
그나마 주말 관객 4만이었다니 다행입니다만..

서쪽하늘

2008.01.31 20:35:48
*.200.67.93

저는 내일 아침에 보러 갑니다... 벌써부터 예전 에바를 봤을 때의 떨림이....

임계질량

2008.01.31 21:35:35
*.173.22.177

허걱 윤형님도 에바 덕후셨구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상한 모자

2008.01.31 22:57:49
*.107.32.169

다운받어야지..

ssy

2008.02.01 03:17:56
*.109.165.92

동세대의 소년들이 나이가 든 뒤, 평일 오후의 극장을 반이나 채우는 광경이 무척 놀라웠네.
우선 그것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네.
영화란 역시 극장에서 같이 즐길 때, 그 맛이 진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네.
다운받아서 보는 건 마치, 괜찮은 정식을 놔두고, 그걸 식판에다 받아 먹는 것 같다는 걸 새삼 느꼈네.

(실은 다시 다운받아서 봤는데, 정말 존트하는 줄 알았다네. 허허-그런면에서 고맙군-)

수입업자들은.. 글쎄 내가 수입업자라도, 다른 개봉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상, 쉽진 않을 것 같군.
(결국 부산을 가야 하나?)

trotzky

2008.02.01 03:16:03
*.237.95.139

저도 한 번 더 볼까 싶어요. 10년 전에 TV판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 비교하는데 글쓰신 대로 묘한 위화감이 있었는데 중간중간 전투 씬과 막판 야시마 작전의 리테이크 장면 등에 위압되어 그런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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