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프로이트의 아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세운 터전 위에 자신이 미래를 세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일상적인 전투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만, 그 패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홍길동과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살해하지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슬쩍 제사상의 조상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부자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떠났던 것은 일견 남자답고 씩씩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일상적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 비겁함은 내가 ‘새로운 율도국’을 건설해봤자 나의 위치가 아버지로 변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결국 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겁함이었다.


작고한 정치학자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구절. 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무력한지에 대해 반성하면서, 한 아이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한국 남성의 의식을 추적했다는 이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적이면서 또한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한국 남성들이 한번쯤은 읽어야할 책으로 감히 추천할 수 있다. 특히 이 구절은 한국남성들이 전통을 부인하는 고아의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재산은 상속하고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권위적으로 굴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수영은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전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왜 남루한 것이라도 필요한 걸까? 설령 도려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김없이 기억하고 반성할 때 근절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망각의 저편으로 떠내 보낸 나쁜 관습은 필히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어느 역사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대저 우리의 정치사에도 고아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 대선만큼 심한 경우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만 욕하면서 해소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깨달았을 때, 문어체 소년의 우울은 깊어간다.
 

-한윤형 (드라마틱 30호, 2008년 1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81 레비나스라는 지젝주의자와의 덧글 논쟁 [18] 하뉴녕 2008-02-05 1119
580 [펌] 3단 논법 [3] 하뉴녕 2008-02-05 956
579 책 정보넣기 플러그인 오픈 하뉴녕 2008-02-04 641
578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 [8] 하뉴녕 2008-02-03 745
577 현문우답 : 이 모든 것이 다 영어 때문이다. [8] [1] 하뉴녕 2008-02-02 849
576 [펌]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 06년 통계 [1] 하뉴녕 2008-02-01 790
575 "엄마의 늪"? 먼저 경제적 문제로 접근해 보자. [16] 하뉴녕 2008-02-01 1060
574 에반게리온 서 : 그 소년이 돌아왔다! [8] [1] 하뉴녕 2008-01-31 1031
573 사다리 걷어차기 외 [14] 하뉴녕 2008-01-27 822
572 씨네21에 "스타리그 예찬"을... [5] 하뉴녕 2008-01-27 861
571 매개의 욕망, 욕망의 매개 [18] 하뉴녕 2008-01-26 929
570 미연시 개론 [15] 하뉴녕 2008-01-25 1056
569 25만 히트 돌파 자축 - [17] 하뉴녕 2008-01-24 918
568 '일반과목 영어수업'론과 교육정책의 기조에 대해 [12] 하뉴녕 2008-01-24 2011
567 판타스틱 새해맞이 이벤트 file 하뉴녕 2008-01-23 742
566 [대학내일] 우려되는 외국인 혐오증 [1] [1] 하뉴녕 2008-01-23 886
565 헛소리에 관하여 (1) - 철학적 헛소리 [11] 하뉴녕 2008-01-22 947
»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 7 어떤 고아의식 하뉴녕 2008-01-21 1060
563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작품별 별점평 [3] 하뉴녕 2008-01-20 925
562 20대 부자되는 14가지 방법? 나에게 대입해 보니...... [17] 하뉴녕 2008-01-20 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