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내 생각으론, 아테네 사람들은 설령 누군가가 놀라운 (똑똑하며 유능한 : deinos) 사람이라 생각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려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다지 마음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기와 같은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경우에는, 그에게 화를 내는데, 그러니까 그건 당신 말대로 질시로 인해서일 수도 있겠고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서일 수도 있겠소.
-플라톤 <에우티프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지식인들은 대중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 대중들을 상대하는 것 그 자체에 무능하다는 비난을 인터넷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 그들은 언제나 가장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그러기 위해 가장 대중적인 언어를 구사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에게 그 비난을 퍼붓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저 자신의 영역에서 한정된 발언만 하고 있다면, 대중들은 그가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는 이들이 그 앎으로 현실을 설명하고자 할 때는, 자신의 견해를 지지했을 때는 '진정한 지식인'이 되고 자신의 견해를 반대했을 때엔 '상아탑밖에 모르는 무능한 지식분자'가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너희들은 왜 매개를 하지 않는 거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매개 그 자체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나나 노정태같은 젊은이들이 "한국 사회엔 지성계가 없어."라든지, "한국 사회에선 지성계가 작동을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이런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앞의 말은 노정태의 말이고 뒤의 말은 내 말이다. 이준구 교수가 있는데 지성계가 없다고 말하는 건 심하지 않은가? 공부하면서 앎을 축적해 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지성계가 없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운동권 경력을 극우정당에 팔아먹어 정치적 생명을 유지해 온 일개 국회의원 나부랑탱이가 새만금 사업과 경부고속철 사업 타당성 평가에 참여했던 학계의 중견 경제학자에게 "당신의 주장은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것이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말을 해도 경제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발끈하는 일도 없이 유야무야 지나간다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지식인이 대중과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꼭 바람직한 일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이준구 교수는 홈페이지에서 이제 다시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런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운하를 반대하고 싶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이가 좀더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유포해줄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준구 교수는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것을 보고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사실 그에 대한 인터넷 여론은 환호에 가까웠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이준구 교수는 사진에 취미가 있어 디시인사이드를 드나들면서 악플에 대한 내성을 키워왔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학자들 중에는 예민한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예민함을 존중하고 보호해야지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화초는 온실에서 재배해야지 바람의 쓴맛을 보여주겠다고 밖으로 내동댕이 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초도 잡초와 같이 밖에서 같이 뒹구는 그런 상황을 연모하는 것 같다.)
학자가 직접 역할을 할 수 없다면, 학자의 견해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똑똑하고 학자들보다는 좀 더 대중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욕먹는 일에도 내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이들이 필요할 듯 싶다. 오랫동안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나 자신이 그런 일에 흥미를 가질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과연 한국 사회에 그런 일이 필요한 것인지, 가능이나 한 것인지,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내가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돈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저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난 그 길에 전적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대학원을 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모든 것이 시시해졌다.
진중권이 빛나던 시절에는 일단 저 사람을 따라잡고 그 이후를 고민해보자, 는 식으로만 생각하면 됐다. 물론 지금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매개의 역할을 자임한 이들이 겪을 수 있는 딜레마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매개자는 학자에 대해서도 알고 대중에 대해서도 안다. (변희재나 김휘영, 김석수 등의 가짜 평론가들이 진중권더러 대중을 모른다고 호통을 칠 때 나는 실소했다. 만약 얼룩말 털에 붙어 있는 기생충들이 얼룩말의 동선을 교란하는 사자더러 "넌 우리 얼룩말 형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면 느끼게 되었을 황망함을 그들의 발언에서 느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는 학자도 모르고 대중도 몰라도 된다. 대중이 반발할 땐 학자 핑계를 대고, 학자들이 따질 땐 대중 핑계를 대면 되니까. 스스로를 인터넷 논객이라 자임하는 수많은 가짜들이 그 영역에서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공희준처럼 무식한 인간이 지가 뭐라고 되는 듯 민주노동당에게 호통친다. 말세다. 수많은 기자들이 그와 같은 사이비질을 하면서도 월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사이비질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환경에서 진중권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자신의 영역에서 철수했다.
올블로그에 키워드 챔피언이란 제도가 있길래 언젠가 심심풀이로 '진중권' 키워드 챔피언에 도전했더니 승인해 주었다. 며칠전에 다시 링크를 정돈했는데, 그 결과 현재 이 순간 진중권 키워드 챔피언이신 한윤형 님의 추천자료는 이렇다.
거의 5년에 걸쳐서 쓰여진 글들이다. 어떤 의미에선, 최근으로 올수록 평가가 점점 박해지고 있다. 내가 진중권 책 중 최고로 치는 건 <폭력과 상스러움>인데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없다. 지금 나에겐 이 책이 없는데, 다시 구하면 제대로 된 리뷰를 해봐야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폭력과 상스러움>의 진중권이 탁월한 매개자이면서 한국 사회에 적합한 이데올로기 비판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지만, 지금의 진중권은 출판시장의 교양도서 포멧에 흡수되었다고 본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많지도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코 그의 잘못도 아니다.
진중권은 매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던져줬는데, 그건 진중권의 글이 너무 쉽다는 사실이었다. 이택광은 언젠가 자기도 <미학 오딧세이>와 같은 책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나오는 순간 책을 보고 그냥 때려쳤다고 말했다. 이것보다 더 쉽게는 못 쓰겠더라는 거다. 그 정도로 쉽게 쓸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탁월한 재능인데, 사람들이 너도 진중권처럼 쉽게 써야 된다고 말하면 암담하다. 그리고 쉽게 쓴다는 건 모종의 생략을 수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왜 <미학 오딧세이>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고, 그리하여 이 책이 여전히 진중권의 연금보험으로 남아 있겠는가. 학자로선 그렇게 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개정판 서문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대학원생 진중권은 미학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젊은이 특유의 새파란 무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말대로, "책은 적당히 무식할 때 써야 한다. 너무 무식하면 책을 쓸 수가 없고, 너무 유식하면 책이 영원히 안 나온다."
내 글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내가 글을 어렵게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 "요새 글이 더 어려워졌어."라고 충고하던데 속으로 "그럼 키보드 워리어질 할 때 글이랑, '제 글 좀 사주세요 굽신굽신-' 모드에 있는 사람의 글이랑, 호흡이 다른게 당연하지-"하고 말았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글을 잘 쓴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적게 읽고 빨리 이해하는 재능과 읽는 이들에게 살인적으로 친절한 성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매개가 적성이 맞다느니 그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다. 나보고 글 어렵다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이택광의 책을 선물해주는 게 해법인듯 싶다.
이택광 역시 매개를 추구하는 이가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학계는 그가 공부를 안 한다고 비방한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기 어려워 한다. 그래도 그 역시 에세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택광 선배가 하는 일중 한국 사회에 꽤 쓸모있는 일 중 하나는 나에게 술을 사는 것이다.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는, 매개의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한국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말과 같다. 요새들어 이 한 몸 누일 곳은 어디인가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중이다.
nobam
흠 게다가 챕터 9의 소제목은 주인장님의 관심분야에 딱 맞아떨어져 보이는군요.
"9. 명령하거나 명령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중재자가 되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잘 해나가시라 생각합니다. 아예 전공을 바꿔 대학원 진학을 하시면 한 1-2년 정도는 무지막지한 긴장감 때문에 딴생각이 날 틈이 절대로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MW
자기혐오를 극복할 수 있다면, 아마 윤형님이 지금 고민하는 많은 부분이 적절하게 타협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문제는 자기혐오극복은 평생을 거쳐서 행해야 할 과제이고,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부정적인 인간.)
제가 어제 누군가에게 "새롭게 깨달은 건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게 아니냐"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사랑의 지혜"를 권해주던데요. 그 분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타인,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 책임을 과하게 설정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또 그만큼 괴로워할 것이라는 생각이 요새 부쩍 드네요.
매개를 포기하느냐, 계속하느냐의 문제로 귀결할 게 아니고, 내가 좀 더 개인적으로 행복해져도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빠져버린다면, 그 누가 함부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매개이든, 아니든 윤형님의 글은 재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특정 현상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서도.
심판관은 진중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 있도록 진중권 구명운동에 나선 안티조선 5인(강준만 교수, 우석훈 박사, 홍기빈, 김규항 등), 서울대 미학과 선배들인 심광훈, 황지우 前 한예종 총장, 유홍준 전 문화부 장관, 그리고 진중권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있는 시사in의 독설닷컴 고재열씨, 공공미디어연구소 도형래 기자, 게다가 진중권씨를 중앙대 독문과에 임용했고 또 진중권의 재임용 탈락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노무현 정권의 실세 정치인 김한길의 친동생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학과장) 등 이렇게 11인으로 구성해도 불만 없다. 단 전 국민이 볼 수 있고 판결 근거와 그 근거가 기록되는 공개판결이면 된다.
한국 사회의 정상화와 발전을 원하는 네티즌들은 이 ‘30억 원의 내기‘를 널리 퍼뜨려 주기를 바란다. 누가 이기든 간에 이 돈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금에 보태기로 하자. 제랄드 프랭스, 롤랑 바르트 등의 학설에 의거한 ’서사구조론‘을 일반인들이 매우 알기 쉽게 쓴 칼럼은 차후 시리즈에 연재한다.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는 자신이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이 내기를 절대로 회피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출처: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