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택광, 그리고 문화평론

조회 수 1104 추천 수 0 2008.01.02 02:11:24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 - 8점
이택광 지음/로크미디어
 

문화평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 단어의 정의에 적합한 텍스트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중문화평론 전문 기자들이란 사람들은 표피적인 문제에서 참신한(?) 착상을 이끌어 내어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차피 그 이상의 글은 팔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도 상품일진대 이걸 소비해줄 독자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걸까?”(p133)라는 저자의 물음이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분야별로 따져보자면, 문학평론과 영화평론은 다른 분야에 비해 여전히 건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별 텍스트를 넘어서는 문화 현상을 조망하는 높이에 이른 평론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적당히 얼버무린 것은 내가 이 분야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분야에선 아예 비평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



비평의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보니 외국에서 유행한 문화평론가들의 이론을 수입할 때에도 모종의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내가 읽은 지젝의 글에서 영화평론은 언제나 라캉의 (물론 지젝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한) 이론을 소개하는 용도로, 혹은 정치평론의 일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지젝의 영화평론은 그 자체로 이론적 작업이면서, 또한 정치평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젝을 수입한 우리의 영화평론가들(존중받아 마땅할 정성일을 포함하더라도)에게서 그러한 자세를 발견할 수는 없다. 애초에 우리 사회의 ‘영화평론’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2004년 즈음의 나를 비롯해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뒤지면 몇몇 나오는 것처럼, 지젝을 활용해서 정치평론을 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이며, 가끔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관념적 언어의 숲 속에서 헤매느라 스스로도 정신이 없다. 



학계로 들어가더라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지식이 짧기 때문에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문화평론을 위해 필요한 방법론으로 “마르크스, 루카치, 벤야민, 제임슨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과 프로이트, 라이히, 라캉, 지젝에 이르는 정신분석학적 전통, 그리고 푸코, 드보르, 가라타니 고진 등과 같은 ‘탈근대적’ 사상가들의 방법론들”(p137-8)이 있다고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론들을 활용해서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에 대한 ‘문화평론’이란 것을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저자 이외의 다른 사람을 거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각 학자에 대한 전문가들은 있겠지만, (혹은 그것도 부족하거나) 혹은 개별 학자에 대한 전문가 수준을 넘어서는 인문학자도 있겠지만 문화평론가는 없는 것이다. 가령 철학자 김상환은 가라타니 고진보다 떨어질 것이 없는 학자이겠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문화에 대해 하는 것처럼 폭넓은 문화평론을 하진 않는다. 김상환의 텍스트를 인용하여 문화평론을 하는 것은 물론 가능할 것이나, 그 스스로가 문화평론가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없는 공간에서 아무나 다 문화평론가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지금의 실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디 워> 사태 때 우리를 수준높은 코미디로 웃겨주신 ‘문화평론가’ 김휘영씨를 떠올리면 상황이 정리가 될까?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훌륭한 문화평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있다. 저자 자신도 말미에서 저서를 통해 언급하는 김영민과 진중권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준높은 인문학적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이지만, 정석적인 문화평론가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마이크로적인 문제에서 빛나는 김영민의 시적 통찰과 매크로적인 문제에서 빛나는 진중권의 정치적 감수성은 앞서 언급했던 저자의 ‘방법론’에 비하면, 직관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김영민 진중권 두 사람에 비한다면 이택광은 범용한 문화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범용한 사람이 오직 한 사람이라고 다시 말한다면, 이 범용함은 어느새 비범함이 된다.



사실 이런 식의 비범함은 그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노정태가 강유원을 비평하면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공부는 혼자 할 수 있지만 학문은 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포지션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 오바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는 어렵다. 그 어려운 작업을, 지금 이택광은 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세계시민주의의 맥락과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 동시적으로 접속하면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젊은이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저자는 문화연구에 관한 방법론을 전공했으면서, 실제로 한국의 문화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만일 당신이 비평가라는 건 천하에 쓸데없는 기생충에 불과한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이택광의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욕해야 할 평론가의 전형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수준에 맞춰서 놀아주는 ‘친절한 중권씨’가 아니라.) 만일 당신이 한국 사회에서 비평이라는 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역시 그의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지향에 대한 학적 방법론의 대강에 대해 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배움은 한국 사회에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감상주의적 자기 연민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인들이 모두 대중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의 반지성주의가 노리는 목표물은 어디일까? 바로 자본주의의 규율 속으로 포섭되지 않는 약자들이다.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이런 약자에 대한 공격이 드러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이 책은 문화 비평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점에서 집필된 것이다. 나름대로 나는 이 문제가 효용성의 차원을 넘어선 분석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충실하게 루카치의 방법론을 따랐다. 가장 치열했던 정치의 시절에 루카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에 대한 장르 비평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실천’의 행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여전히 소중하다. 루카치처럼 나는 형식의 분석이 곧 내용의 논리를 밝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비평은 이제 분석의 차원으로 내려앉아야 한다. 전지적 비평가의 자리는 사라졌어도, 대중의 분석을 도와줄 분석가의 욕망은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은 상징 형식 자체의 논리를 해명하는 게 아니라, 이런 형식을 만들어낸 그 발생론적 구조를 탐색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지금 쓰는 글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 중요하다. 이런 현실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교환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실천의 길을 열어줄 거라고 나는 아직 믿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믿음이 빚어낸 중간 결산이다.(p133-4)



이 글에서 내가 인용한 문구는 모두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나온 것. 권해주는 입장에서 책의 본문에 대한 프리뷰를 하자면, 설령 2장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마라. 뒤로 갈수록 이 책은 재미있어 지고, 더 잘 읽힌다.



pinacolada

2008.01.02 15:49:40
*.148.59.108

"비평도 상품일진대 이걸 소비해줄 독자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걸까?” 정말 그래요. 문학 전공자로서 정말 이 문제에 관해서 불만이 엄청 많았는데, 이 책 읽고 싶네요. 근데 요새는 이게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토론을 할 때도 비슷한 생각이 자주 듭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문제에 관해 토론을 할 때, 이 문제들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 수준이 너무 낮아서 대중과 대화를 나누는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양보(?)하거나 퇴보한 수준에서 논의를 진행하게 되는 거지요. 훨씬 깊이 있고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할 수가 없어요. 토론 대상자의 수준에 따라 토론의 질이 완전 달라지게 됩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윤형님이 젤 잘 아실거라고 생각하지만-.-a)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네요.

하뉴녕

2008.01.03 16:45:00
*.176.49.134

가르치는 것까지도 문제는 아닌데 상대편이 자신이 가르침을 당할 처지라는 것을 완강히 부인하면 아주 짜증 이빠이죠. 기대 소득은 쥐꼬리인데 요구되는 능력은 너무 많아요. ㅎㅎㅎ

김대영

2008.01.21 16:57:03
*.138.147.134

이 글을 못봤었네... ㅋㅋ 나는 어린 대중으로써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는 마음 속의 충만함을 갖고 있지...^^ 맞아,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고 다소 쉬운 문장이 많아지는 책이라는 거 인정~!ㅎㅎ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 [링크] 진보신당 진중권 방송 27일 촛불시위 현장 파트별 특집 [10] [2] 하뉴녕 2008-05-27 967
74 어떻게 한 사람을 지칭할 것인가. [6] 하뉴녕 2008-05-22 918
73 홍정욱 인터뷰와 무릎팍 도사 [9] 하뉴녕 2008-04-20 1223
72 진중권과 함께하는 진보신당 인터넷방송 다시보기(3월30일) [1] 하뉴녕 2008-03-31 875
71 백색의 진중권 file [8] [1] 하뉴녕 2008-03-22 1081
70 디 워는 어떻게 ‘애국주의 동맹’을 해체시켰나? [22] [1] 하뉴녕 2008-03-01 2954
69 지존 키워 진중권의 전투일지 [20] [2] 하뉴녕 2008-02-28 2860
68 드라마틱 소사이어티 : 중산층의 복수 [5] 하뉴녕 2008-02-27 1098
67 30만 히트 자축 [3] 하뉴녕 2008-02-26 841
66 민주노동당과 나 [15] 하뉴녕 2008-02-16 1613
65 [시사in] 내 인생의 책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36] 하뉴녕 2008-02-11 1004
64 손석춘의 민주노동당 옹호에 대해 [8] 하뉴녕 2008-02-11 1063
63 군대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17] 하뉴녕 2008-02-07 4278
62 매개의 욕망, 욕망의 매개 [18] 하뉴녕 2008-01-26 929
61 지역주의 뒤집어보기 하뉴녕 2008-01-17 2551
60 민주노동당 : 이건 분당이 아니라 파당이다. [15] [6] 하뉴녕 2008-01-02 1495
» 이택광, 그리고 문화평론 [3] [1] 하뉴녕 2008-01-02 1104
58 [프레시안] 이회창은 왜 돌아왔는가? [14] 하뉴녕 2007-11-12 980
57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4 - 쾌락, 그리고 취향 하뉴녕 2007-10-21 1069
56 세대론과 X세대 키보드 워리어들 [32] 하뉴녕 2007-09-29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