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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파업과 정부 사이엔 아무도 없다

조회 수 876 추천 수 0 2004.11.16 14:56:00
대략 이 시기부터 (입대하기 직전) 실명으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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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노동조합과 기업가에게 가지는 태도는 이중적이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다."라는 명제를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어떤 '당위'라고까지 느끼는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보호한다."는 명제에서는 비윤리성을 느끼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어떤 선진국들의 경우에는 소비자들이 '기업가의 정치성'도 판별하여 '정치적 소비'를 하기 때문에, 각 기업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공익을 추구하는지를 광고에 구구절절 설명하고 또한 이를 준수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이런 짓 하자고 하면 복거일 같은 사람들이 튀어나와 이윤추구라는 신성명제를 더럽히고 있다고 펄펄 뛰지 않을까.


이전에 "노조의 정치성과 기업가의 정치성"이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과 상관없이 '갈등' 사이에 끼어드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 노동계의 큰 이슈는 공무원 노조와 비정규직 문제다. 전공노는 공무원에 대한 노동3권 보장을 주장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비정규직의 정규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들의 요구가 시기상조이거나 실현불가능한 것이고, 이들의 요구 이면의 욕망은 점심시간 확보나 임금인상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에도 전혀 일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전공노는 자신들의 요구가 부패척결 등 사회개혁의 요구와 부합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 공직사회 개혁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점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비정규직은 단순잡무 등 일부 영역에서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단순잡무가 아닌 부문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적용할 경우 직급에 대한 임금을 주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며, 그 경우 선차적으로 호봉제가 폐지 내지는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민주노총의 노동자들(특히 생산직 노동자들)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새로운 제도 때문에 임금이 깎인다고 생각하면 저항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회갈등의 상황에 있어 어느 한쪽이 공익을 대변하고 어느 한쪽이 사익을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정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역주민들과 대립할 때는 상대편을 '지역이기주의'라고 몰아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역에 타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지역주민들의 요구는 '공익적'인 성격을 띤 것도 사실이다. 반면 좌파들은 거시적인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모두 공익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큰 틀에서는 그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개별 사안에서는 그들의 '노조 지지'도 편향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공익성을 평가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안세력에게 100% 공익적인 세력이 되기를 주문하는 그 폭력성에 있다. 그 때문에, 노조들의 요구가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이 노조를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 좌파정당이나 노동조합은 체제 안에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들은 폭력혁명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는 방파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나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켜줄 어떤 위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그러지 못할 것이면 입을 다물어야 생각한다. 이는 허황된 얘기이며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징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더 큰 문제는 아무도 평가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파업과 정부 사이에 어떠한 완충지대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노조의 요구가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정부가 내세운 대안이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지 않는다. 선택은 양자택일일 뿐이며, 공무원은 등따습고 배부른 인간들이라는 감정이 먼저 불끈 솟는다. 판단 혹은 핑계는 그 이후에 이루어질 뿐이다.


정치영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물론 이 경우엔 그들의 감정이 이리저리 유동하기에 당하는 이들의 억울함이 노동조합만큼 심하지는 않다. 우리의 '민심'은 이편에게 힘을 주었다, 저편에게 힘을 주었다 하면서 정치가들을 제어하기 때문에 '천심'이라 불린다. 그들이 다음에 누구를 선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저들 정치인들이 우리를 소외시켰다고, 배반당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하나의 말을 선택하거나, 심지어 두 개의 말을 끝없이 갈아타는 과정에서도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갈등하는 양자 중 한편을 들고 반대편을 난자하는 수준의 '노예근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공익'을 말할 자격도 없다. 과거 강준만의 양비론 비판은 갈등의 원인을 보려 하지 않고 갈등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문제시했기에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들은 이제 갈등의 원인을 인격적/당파적인 대상에 종속시켜 그들을 제거하는데 그 이론을 활용한다. 그 이상을 말하려는 이들은 모두 '양비론자'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양비론 비판은 과거 강준만의 적수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것은 주체의 판단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는다.


갈등엔 원인제공자가 있고, 그 원인제공자를 박멸하면 갈등이 해소된다는 사고방식은 갈등 자체가 나쁘다는 생각만큼이나 원시적이다. 양자는 갈등은 비정상적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데, 사실 갈등은 일상적인 현상이며 더욱이 민주주의 사회는 그 갈등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섣부른 감정이입의 정치 -감정이입이 되면 지지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하는-를 벗어나 갈등을 대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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