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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용산에서 술 얻어먹은 이야기

조회 수 1098 추천 수 0 2007.01.25 17:57:51

어제, 갑자기 혼자 저녁식사를 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 밥먹는 건 옛날부터 내 일상이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생각 이후에 내 빈약한 인간관계와,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오늘 저녁 나와 밥을 먹을 수 없는 이유가 차례차례로 떠올랐다. 두어 차례 통화를 통해 그 이유를 또 확인받고 보니, 싫은 짓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그 때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보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용산에서 자기 컴퓨터 매장을 가지고 있는 아저씨였다. 나이는 아마 나보다 20살쯤 많을 것이다. "저녁 먹으러 갈게요-"라고 하자, "와라-"는 답변이 왔고, 나는 길치답게 적절한 시간을 헤맨 후 그의 매장에 도착했다.

그 사람은 매장 옆 휴게실에서 OSL 16강전 전상욱 vs 마재윤 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아저씨가 스타리그를 보는 사람이었는지, 안 보는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슬쩍 확인질문을 던졌다. "누가 이기고 있어요?" "첫경기야. 가만있어봐, 아직 몰라. 이거 끝나고 먹으러 가자."

경기를 보는 그의 식견은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았다. 그는 김태형 해설위원이 "전상욱 선수가 좋죠."라고 말하기 3분쯤 전에 "이건 테란이 이겨. 저건 (마재의 드랍병력) 사베가 있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막아. 근데 저건 (곰상욱의 주력병력) 해쳐리 다 깨고 돌아다닐거야."라고 말했다. (해설자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대개 해설자보다 훨씬 빨리 판단을 내린다.) 나는 김태형이 "전상욱 선수가 좋죠."라고 말하기 십초쯤 전에 '에구, 이건 저그가 못 이기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인물론으로 스타리그를 보는 허접한 시청자답게 '그래도 마틀러니까 아직 몰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재윤의 럴커가 전상욱의 탱크를 다 잡아버리는 묘한 모습이 연출되었고, 두 사람은 엘리전을 가다가 섬멀티라는 보험을 들어놓은 마재윤의 선택이 빛을 발해 결과는 마재윤의 승리로 끝났다. "탱크가 잡혀서 그래. 그래도 하이브를 깼어야 했는데." 이 아저씨는 이 정도의 멘트로 상황의 변화를 설명했다. "에휴. 아깐 이창호가 창하오에게 0 대 2로 졌는데." 내가 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아, 우리 3, 40대는 스타와 바둑을 다 보잖니."라고 말했다. 나는 바둑은 두는 법도 모르지만 한마디 참견해 보았다. "중국, 요새 구리가 날라다니지 않아요?" "구리는 영웅 대접받고 난 후 침묵하고 있고 요새 창하오가 다시 부활했다."

우리는 갈매기살을 구워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우선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민주노동당 내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과 민주노동당 내 몇몇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소재였다. 그는 5년 동안 중앙위원이었고, 작년에는 재정위원장을 맡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민주노동당도 뜯어먹을 게 있는 정당이기 때문에, NL 조직이 계속해서 좌지우지를 못해. 하지만 출세주의자들이 많이 들어오니 재미가 없다. 슬슬 손을 떼야지."라는 말로 우리의 '민주노동당 뒷담화'를 마무리지었다.

예전에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인상은, '매우 느낌좋은, 수다스러운 아저씨'라는 것이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맺지를 못하는 편이었는데,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사람이 편했다. 나도 꽤 말이 많은 편이니 서로 말을 끊어가며 적절한 대화를 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몰라도 서로 자기 얘기를 길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다큐멘터리에 관한 얘기를 했고, 그는 최근에 본 러시아 혁명에 관한 다큐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 소재가 혁명에 이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혁명정국이란 게 좋았는데... 왜 우리 시대는 혁명정국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일단 우익 파시즘 혁명이 일어나면 당연히 반대할 거고... 좌익혁명도... 왠지 그게 일어나도 나는 반대하고 있을 것 같다. -_-;;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뭐 어쨌든 혁명 안 일어나는 시대가 좋은 시대지."

그 말에 연관지어 나는 한홍구의 <대한민국사>에서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홍구가 "북한은 그래도 하층민이 권력을 쥐었던 나라다."라는 식의 설명을, 뭔가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하더라는 얘기를 하자 그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지주를 다 죽여버린 토지개혁 말하는 거잖아." 그는 대한민국 예비역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자세, 총검술의 '찔러'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죽창으로 찔렀단 말야. 근데 머슴이라고 해서, 주인에게 인간적인 정이 없었으리라는 법은 없어. 좋아했던 사람도 있을 수 있단 말야. 그런데 뒤엔 총이 있어. 그럼 어떻게 되냐." 그는 '찔러' 자세에서, 고개만 뒤로 돌렸다. "이렇게 찔렀단 얘기가 되겠지." 우리는 바로 소주를 한잔 비웠다. "게다가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이 대거 남하해서, 남한의 극우파가 형성되었죠. 최장집 교수도 그런 관점에서 북한에서만 잘(?) 했다고 그게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오류라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소주 세병을 비운 후 맥주집으로 갔다. 맥주집에서는 주로 그의 회사 이야기를 했다. 고용인들과 갈등을 겪은 얘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의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회사에서는, 본봉에서는 직급별로 차이가 있지만 성과급을 줄 때는 같은 돈을 준다. 이 대목에서 내가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으앗, 그거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 "하지만 성과급도 차등을 주면, 너무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생각하는걸."

문제의 핵심은, 그가 결코 다른 매장에 비해 월급을 덜 주는 편이 아닌데도, (오히려 더 주는 편이다.) 직원들은 이런 그의 조치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른 직원 두 세명을 선동해서 같이 퇴직했다고도 했다. "지금 제가 얘기할 수 있는 사례는 군대 사례밖에 없으니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상대방 반응을 보며 '잘해주는' 건 오래가지 못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말이, '잘해주면 기어오른다.', '잘해줄 때 알아서 기어라.'라는 것이거든요." 그가 말을 끊었다. "말도 안 돼지. 기어오르라고 잘해주는 건데." "맞아요. 그렇죠." 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잘해준다, 잘 못해준다, 이런 관점이 아닌 거죠. XXX님은 자기 원칙대로 행동하는 거고, 그걸 다른 이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주면 좋은 거지만, 그럴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안 하는게 좋아요.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쪽으로 행동하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나는 1차도 2차도 모두 얻어먹었다. 덧붙여 택시비까지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윤형아'.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취하자 '아흐리만!'이라고도 부르고 '아흐!'라고도 부르고 '흐리만군!'이라고도 부르는 등 옛날 호칭으로 거슬러갔다.

"그래 흐리만! 니가 나보다 술은 세다." 그게 약간 취한 그가 말똥말똥한 상태의 나를 보고 내뱉은, 어제 술자리의 결론이었다. 그는 오늘 점심 때 '어제 잘 들어갔냐'고 먼저 전화를 할만큼 친절한 아저씨이기도 하다.

 

kritiker

2007.01.25 19:59:23
*.238.97.206

거봐요. 술 안 센 게 아니었다니까(...)

한윤형

2007.01.25 20:01:31
*.60.168.151

얼마 안 먹었어.;; 요새 주변에 술 잘먹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긁적긁적

이상한 모자

2007.01.26 18:43:55
*.63.208.236

그 아저씨 술 약해. 볼때마다 취해. 근데 둘이 만났는데 내 욕은 안 했나.. 쩝.

하뉴녕

2007.01.27 11:43:30
*.78.68.194

나보다 니가 더 좋다는 얘긴 하더라. ㅋㅋ (니 위에 누가또 없다는 얘긴 아니다.)

2013.02.02 09:17:54
*.113.106.17

왜 이런 시시한 얘기 읽는데 이렇게 심하게 감동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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