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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 과학자의 독백에 대해

조회 수 5794 추천 수 0 2011.01.19 17:03:05


http://heterosis.tistory.com/281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은 ‘신념’에 의존하는 것과 ‘근거’에 의존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방법도 항상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신념은 근거에 의존할 때 타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이고, 근거는 필연적으로 신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두 가지 입장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은 그대로 둔 채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 과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속화되어 왔다.”


이 과학자의 진술은 이대로만 두면 뻔한 소리를 힘주어 하는 시시한 잠언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이 그 뒤에 이어지는 “따라서 과학적 방법에 대비되는 인문학적 사유 따위는 없다.”란 ‘신념’의 ‘근거’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도무지가 타당성이 확보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내세운 진술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기는커녕, 학문적인 활동과 나머지 지적인 활동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은 외계인이다,”라는 주장 역시 저 과학자가 말하는 종류의 활동이다. 그들은 그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참으로 여러 가지 근거들을 꺼내온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사례로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유사역사학 역시 저 과학자가 말한 종류의 활동이다. 9천년 전에 한민족이 유라시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신념’이 있고, 그 ‘신념을 그대로 둔 채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유사역사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속화되어 왔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학문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역사학자들은 그게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엔 여러 가지 ‘근거’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내세운 ‘근거’의 출처가 미심쩍다든지, 그들이 ‘근거’를 활용하는 방식이 해괴하다든지, 다른 ‘근거’를 배제한다든지 등등.


어쨌든 여기에서 이미 ‘신념’과 ‘근거’의 문제를 넘어 그 과학자가 독백의 후반부에서 말하는바 ‘방법론’의 문제가 발생한다. 방법론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뭐가 뭔지 구별이 갈 게 아닌가. 그래서 역사학은 유사역사학과는 달리 자신이 학문임을 주장할 수 있다. 윤리학도 저잣거리 할아버지의 인생강론에 대해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을 거다. (그 경계선이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인 언어활동에서 역사학이나 윤리학 같은 것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이 물리학이나 화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근거들을 취급하여 신념들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방법론들을 가족유사성에 따라 ‘인문학적 사유’로 혹은 ‘과학적 사유’로 변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념과 근거를 다룬다는 점에선 모두 같다고 항변해봐야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그래가지고서야 ‘환빠’들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니까.


그래서 여기엔 적어도 세 가지의 경계선이 있다. 지적인 활동 일반, 학문적인 활동 일반, 그리고 과학적인 활동. 물론 이렇게 경계를 나눌 때 ‘과학’이란 말은 우리가 일상언어에서 사용하는 ‘과학’이란 말보다는 좀 더 엄밀한 정의일 것 같다. 학문들 일반을 펼쳐놓고 무엇이 과학인지,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를 고민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사회과학이 이 경계선들 중에 어느 지점까지 포함될지 우리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학문적인 활동 일반에 들어갈 뿐이라 생각할 수 있고, 그것 자체가 과학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과학적인 세계인식’이란 말을 쓸 때의 ‘과학’은 이보다는 넓은 의미일 것 같다.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과학적 인식’이 ‘과학적인 세계인식’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학이나 사회학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비과학적인 세계인식’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과학자는 분명히 내가 ‘과학적인 세계인식’이란 말을 그릇되게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흔히 과학자가 그런 비판을 할 때, 그는 일상언어의 화자에 비해 ‘과학’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요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위 독백에서 보이는 것은, 그가 스스로 비판하는 햇병아리 정치평론가들의 설익은 용어사용에 비해서도, ‘과학’의 정의를 끝간 데 없이 확장하여 아무것도 구별해내지 못하는 황망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선의를 가지고 상식적으로 읽는다면 그가 "신념에 대한 근거를 '잘' 대야 과학이다."라는 하나마나한 언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과학'이란 말만 등장하면 무조건 시비를 걸 준비가 된 저 과학자의 악의를 응대하는 자세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과학도들의 주장은, 흔히 “그것은 과학이 아닌 다른 학문이다.”라거나 “그것은 과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지적 활동이다.”라는 차원을 넘어 “그것은 이성적이지 못한 주장이며 사이비다.”란 주장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낱말의 다의성을 활용한 폭력적인 질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네,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래서요?”가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도 ‘과학’이란 말을 ‘학문적인 활동 일반’이란 말과 비슷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사실 ‘과학적인 세계인식’이란 단어에서도 ‘과학’이란 말은 거의 그 비슷하게 쓰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용어사용을 그대로 가지고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인문학적 사유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야바위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변별단어들이 등장하면, ‘과학’이란 용어의 의미는 당연히 훨씬 더 축소되어야 한다. 맥락에 따른 낱말의 다의성을 무시한 채 같은 말을 여기저기 갖다 붙여서 전개되는 논증(?)만큼 혼란스러운 것은 없다. 신념과 근거를 논하기 이전에 정명(正名)부터 할 일이다. 고작 이런 수준의 소리를 하면서 인문학적 사유를 말하는 이들을 ‘소피스트’로 매도하고 싶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그는 소피스트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소피스트는 언어의 다의성을 활용하여 ‘남’을 속이지만, 그는 남을 속인다는 의식도 없이 스스로도 속고 있는 듯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제 신념만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는 끝났다. 그것이 경제학자들이 여러 사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이유다.”


과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런 ‘상식’을 가지고 햇병아리의 ‘초월적 논증’과 ‘과학적인 세계인식’의 대립을 이해했다면, 그는 차라리 이 대립항의 예시로 ‘경제정책가의 판단’과 ‘경제학자의 이론’을 추출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정책가의 판단이 초월적 논증에 기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택이 순수한 학적 활동은 아닐 것이고, 그 판단에 (본문에서 예시된 것과 비슷한) 초월적 논증이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가 이 대립항의 예시로 ‘(라캉주의?) 인문학자의 정치평론’과 ‘과학자의 연구활동’을 추출해낸 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글의 취지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왠지 본인의 머릿속에서 그 대립항이 너무도 중요하여 삼라만상을 그 틀에 짜맞추어 해석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해석을 감내해 줘야 할 이유가 없다.


원래는 칸트 인용에 대한 그의 시비에 대해서까지 쓰려고 했지만, 쓰다 보니 조금 결이 다른 논점을 포함하는 것 같아 다음 글로 미루도록 한다.  


 


장각

2011.01.19 17:09:57
*.176.128.193

와우 짝짝짝

라캉주의자

2011.01.19 23:28:39
*.183.15.122

'과학적'이라는 표현은 '스포츠맨쉽'과 비슷한 단어죠. 엄격한 규칙으로 통제된 좁은 경기장 밖을 벗어나는 순간 수사로서의 용도밖에 가치를 가지지 않는. 그나저나 저는 항상 김우x의 장광설과 지젝의 장광설이 묘한 거울대칭을 이룬다는 인상을 받아요.

nishi

2011.01.21 20:14:35
*.184.240.133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1.22 07:21:32
*.95.239.141

감사합니다 :)

올디

2011.01.23 20:49:32
*.100.184.193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1.23 22:07:12
*.149.153.7

아이고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있을 것을 알지만 나름 노력한 책이니 천천히 봐주세요. 말씀하신 내용은 만일 재판찍게 되면 꼭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파도소리

2011.01.25 12:49:35
*.41.254.117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1.25 14:06:22
*.149.153.7

요즘 하는 비판들은 비판이라기보단 꼬투리 잡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라캉주의자

2011.01.29 18:37:38
*.183.15.96

링크된 김우x씨 글 깨졌네요. 더이상 해당 글의 공개를 원치 않으시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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