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씨네21/유토디토] 스타리그 예찬

조회 수 901 추천 수 0 2008.02.15 09:10:02

드디어 씨네21 홈피에 이 글이 올라와서 블로그에도 공개합니다. :)

-------------------------------------------------------------------------------------------------------

김연아 선수 때문에 피겨를 배우는 소녀들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뿐이고, 나머지 선수들에게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박태환, 김연아 그리고 비보이들을 기성세대가 아무리 찬양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비보이들은 그다지 높은 소득을 올리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한정된 자원을 투자하고는 선수들에게 ‘세계 최고’가 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만, 그 요구를 충실히 따랐을 때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임 방송을 보면서 스타크래프트 리그(이하 스타 리그)의 팬이 되었을 때, 내가 처음 느꼈던 것은 이 새로 생긴 취미가 주는 즐거움이 다른 것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취미에는 ‘강대국 따라잡기’의 열망이 없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인 축구나 야구에서조차 우리의 욕망은 항상 우리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따라잡기’의 욕망이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에서 붉은악마는 저 유명한 CU@K리그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것은 좀더 강한 국가대표 축구팀을 만들기 위해선 우리가 평소에도 클럽 축구를 즐겨야 한다는, 물구나무선 당위 명제를 웅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 리그는 온게임넷 엄재경 해설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자체로 축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맥락과 프로게이머들의 맥락, 그리고 그 맥락에 기대어 창작되는 수많은 팬들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즐기고 있노라면 우울함은 증발하고 하루는 짧다. 지금은 군복무 중인 ‘노동8호’라는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의 짤방(‘짤림 방지용’의 준말로, 디시인사이드의 각종 갤러리에 올라가는 이미지를 가리킨다)들은 한동안 스타 리그를 안 보다가도 그의 예술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다시 보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이 작은 영역에선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메이저리그. 그러다 보니 이런 문화 전체를 같이 향유하려는 외국인들도 있다. 종종 영어권 스타 리그 팬들의 반응을 번역한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러나 그런 번역글 밑에는 대개 “한류 사이트엔 퍼 나르지 말 것”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그걸 번역한 이들이 특별히 덜 국가주의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스타 리그를 같이 즐기는 외국인들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한류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기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취미라는 것이 본래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관심이 없다면 약해지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감동적이지만, 나는 이 감동을 “그러므로 핸드볼 실업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따위의 결론에 귀속시키는 것에 찬동하지 않는다. 관심은 당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국가에 더 많은 메달을 안기기 위해 관심도 없는 스포츠에서 세계적인 선수를 키우는 비극을 양산했다는 거다. 스타 리그는 자연스러운 관심이 어떻게 시장을 만드는지에 대한 적절한 예시를 제공한다.



산업적 시각에선 흔히 ‘e스포츠’란 이름으로 스타 리그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타 리그의 특수성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외국에도 프로게이머는 있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여러 종류의 게임에 대한 프로게이머다. 외국의 유명 프로게이머는 몇몇 종류의 게임 대회에서 우승한 이들이다. 그런 식의 ‘e스포츠’와 스타 리그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처럼 하나의 게임에 대한 리그에 관심이 집중되면, 게임 회사는 재미없다. 스타크래프트2를 발매하는 블리자드의 고민도 이에 있을 것 같고, 그 발매에 즈음해서 스타 리그의 장래를 불안해하는 일부 팬들의 시각도 그래서 일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 리그는 보통의 e스포츠에 비해 좀더 게임 산업에 독립적인 어떤 상징성을 구현한다. 게임 산업과 관련한 경제적 분석을 넘어선 별도의 문화적인 비평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스타 리그는 한국 사회에서 ‘소년 로망’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 소년들은 누군가의 우상이지만, 적어도 홀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도발하는 그런 귀여운 친구들이다. <H2>나 <슬램덩크> 등 일본 소년만화들이 제공하던 그 로망을 나는 이제 그들에게서 느낀다. 자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건설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공평한 경쟁’의 로망을. 20대 중반이면 전성기가 끝나는 불안정한 직업인 프로게이머에게 10대 소년들이 몰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이 ‘공평한 경쟁’의 공간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소년들이 승리하고 응원하던 부모님들이 눈물을 흘릴 때면, 나도 눈물이 난다.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polarbird

2008.02.15 10:06:49
*.65.211.98

"비밀글입니다."

:

수학선생

2008.02.15 12:43:37
*.252.144.214

아아, 그렇군요. 답답하던 무언가가 확 뚫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벌써 15년 전인데, 체육교육의 현장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지요. 그 때부터 "엘리트체육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주장해 왔지만, 저 스스로도 어떤 종류의 "본말전도"가 문제인 것인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았었나봐요.
요즘 감독들의 성폭력 문제가 밝혀지면서 시끄럽지만, 항상 그렇듯이 결론은 비본질적인 것만 긁다가 끝나겠지요. 아무튼 좋은 글 또 감사드립니다.

kritiker

2008.02.15 14:27:22
*.50.194.71

잘 봤습니다. 히히히.

lust

2008.02.15 17:27:08
*.126.102.147

축구 같은 것도 예를들면 디워처럼 통틀어서 '따라잡기'가 없었다면 이렇게 관심을 받았을까 싶네요. 실제로 과거에는 스타판에도 '따라잡기'가 있었는데, 따라잡기가 없어진 지금도 스타판이 오히려 더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워요.

그건 그렇고 '관심이 없다면 약해지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라는 말은 저도 동의합니다만, 예전에 '한국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인문학을 부흥시켜야 하는가'라면서 필요(≒관심)없는 것은 굳이 억지로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셨는데, 이런식으로 동기가 따라잡기와는 별 상관이 없는(인문학은 따라잡기와 좀 상관이 있긴 하네요-_-, 그러니까 꼭 인문학이나 메달따기 체육이 아니더라도) '필요(≒관심)없는 것'은 그냥 망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허헐 쓰고보니 말이 이상하네요. 알아서 해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뉴녕

2008.02.15 17:42:42
*.176.49.134

냉정하게 말하면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억지로 진작시켜봤자... 그게 인문학 종사자들을 위한 사회복지정책이 되지 인문학이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길은 못 됩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허위의식을 느끼고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도 않을 것인만큼, 결국 인문학을 부흥시키려면 인문학자들이 인문적인 비평활동을 통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외에 다른 길이 있지도 않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와넬

2008.02.15 18:38:06
*.185.30.6

'키보드 워리어'라고 소개되진 않았군요.

하뉴녕

2008.02.16 01:59:18
*.176.49.134

'인터넷 논객'이란 단어가 사라진다면 모를까...그전엔 매체에서 그렇게 소개하진 않겠죠 ㅎㅎㅎ

여울바람

2008.02.16 10:30:44
*.143.20.238

"관심은 당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이 말이 쏙 들어오는데요.

2008.02.22 19:07:03
*.120.97.149

잘 봤습니다.

한윤형님 블로그 알게 된 계기가 이런 스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인데..

요즘들어 스타이야기가 좀 뜸한거 같아서 아쉽다는..ㅜㅡ

잭필드스포츠닷컴

2008.05.11 00:13:30
*.236.10.184

일전에 노동8호님이 휴가를 나왔었습니다. 그때 낙지볶음 회동(??)을 가지면서, 이 글에 대한 언급을 했었는데 그분도 잘 찾아서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리플 타이밍이 좀 많이 늦었습니다만.. 성지순례(??) 찍고 갑니다.

하뉴녕

2008.05.11 02:27:07
*.176.49.134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 그래도 해당글이 실린 잡지를 노동8호님 부대주소로 한권 보내드리려고도 생각했었니다만...... 생각만 하고 있다가 좀 시간이 지나버리는 바람에 그냥 포기했었랬죠. ( ;;; ) 언급을 해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성지순례라니 과찬의 말씀을 ㅎㅎㅎ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01 [펌] 사랑했던 우리들의 당, 민주노동당을 떠납니다. [3] 하뉴녕 2008-02-18 1231
600 뭐?? 군생활을 보상하라고 날뛰는, 한국 예비역들이??? file [8] 하뉴녕 2008-02-18 876
599 뭐?? 쥐뿔 보상도 안 되는 군가산점 따위가??? [3] 하뉴녕 2008-02-18 979
598 [프레시안] 새로운 진보정당, 이렇게 만들자 [5] 하뉴녕 2008-02-18 1075
597 뭐?? 베이징 올림픽의 개최국, 공한증을 탈피하겠다는 중국이?? [4] 하뉴녕 2008-02-17 745
596 민주노동당과 나 [15] 하뉴녕 2008-02-16 1613
» [씨네21/유토디토] 스타리그 예찬 [11] 하뉴녕 2008-02-15 901
594 [펌] 이중등록, 魂의 전쟁 - 魂의 시대를 추억하며 / Raight [9] 하뉴녕 2008-02-14 1331
593 [펌] '잿더미 숭례문'에 눈시울 붉힌 외국인의 쓴소리 하뉴녕 2008-02-14 1294
592 왜 학생 운동 조직은 20대로부터 멀어졌나? [10] [1] 하뉴녕 2008-02-14 1020
591 시사in 사진 나머지 것들 file [23] 하뉴녕 2008-02-13 1229
590 그곳에 숭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file [15] [4] 하뉴녕 2008-02-12 1121
589 징병제 사병들이 사용하는 사회적 방언의 사례 [11] 하뉴녕 2008-02-11 2963
588 [시사in] 내 인생의 책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36] 하뉴녕 2008-02-11 1004
587 손석춘의 민주노동당 옹호에 대해 [8] 하뉴녕 2008-02-11 1063
586 사람을 부려먹는 탁월한 재주 外 [9] 하뉴녕 2008-02-10 835
585 한윤형의 블로그 방문자 리스트 (연휴 기념 작성) [65] 하뉴녕 2008-02-08 990
584 군대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17] 하뉴녕 2008-02-07 4278
583 설날 맞이 단체문자 [5] 하뉴녕 2008-02-07 782
582 차가운 물은 싫어 [5] 하뉴녕 2008-02-06 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