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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추격자>를 보았다.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세간의 평에 동의할 만했고, 무엇보다 외국의 영화광들이 보더라도 Made in South Korea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 같은 작품이란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캐릭터가 죽어버린 뒤엔 약간 심경이 복잡해졌다. <괴물>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미국 관객의 반응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매우 좋다고 했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로웠다. 그토록 똑똑하게 처신한 어린 소녀를 기어이 죽여버리다니 대중영화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었다. 똑똑하게 처신했는데도 죽은 사람- 이 말에는 <추격자>의 그녀도 포함될 듯싶다. 세상엔 한국영화보다 사람을 잘 죽이는 영화도 많지만 확실히 할리우드의 대중영화들은 상황에 잘 대처한 주요 등장인물들을 굳이 죽이지는 않는 것 같다.


섣부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현대사가 남긴 어떤 종류의 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한말의 ‘의병 학살극’인 일제의 남한 대토벌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았다. 어찌나 학살을 당했는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전세계, 모든 역사를 통틀어 우리가 분개하는 학살은 단 두개, 일제의 난징대학살과 북한 인민군의 민간인 학살 정도인 것 같다. 죽고 사는 건 애초에 운수에 달린 것이지 똑똑함이나 상황에 잘 대처하는 능력만으로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최선의 행동을 한 이들이라도 재수가 없으면 죽었다. ‘그토록 똑똑하게 처신한 어린 소녀’가 죽는 것이, 한국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잘 처신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우리는 집요하게 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격자>의 그녀는 당연히 살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정말로 기막힌 우연 때문에 죽어야 했다.


그래도 영화의 경우 다른 나라의 작품과의 간극이 덜한 편이다. 어떤 미국 관객은 <괴물>에서 소녀의 죽음을 할리우드의 정석적인 문법을 파괴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력이 더욱 자유로운 대중소설로 오면 더욱 증상이 심해진다. 가령 신무협의 총아인 좌백의 소설을 생각해보자. 나는 그가 세계적으로 널리 인기를 누리는 홍콩 출신 무협소설가인 김용에 버금갈 만큼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더 유명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언제나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중국 무협소설에서 무림인들은 설령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앞 열의 동료들이 모두 죽으면 바람에 흩날리는 들풀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좌백을 비롯한 한국 무협소설에서 조직인들은 눈앞의 고수가 그들 모두의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마지막 한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 전진한다. 이것은 무협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근대 사회의 인간의 행동일 수는 없고, 거대한 병영사회를 경험한 어떤 근대국가의 리얼리티를 드러낸다. 만약 내가 중화권에서 태어난 독자였다면, 그의 무협소설에서 특유한 형태의 육중한 리얼리즘을 느끼고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아, 그래, 이 나라는 20세기에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었어. 그리고 아직 모든 성인 남성이 군대를 가고 있고”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인 나로서는 대중소설을 읽을 때조차 저 기억하기 싫은 진실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서술이 정서적으로 무척 버겁다.


내 생각에 한국인의 무의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중문화 텍스트는 좌백의 소설보다 훨씬 많이 팔렸을 ‘판협지’의 시조 <묵향>이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묵향은 이름도 없는 고아로 마교에 납치되어 와서, 동료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환경에서 수련에 매진한다. 묵향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해 한번도 묻지 않는다. 묵향은 동료들이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범상하게 기억하며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법도 없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한국인들 역시 사라져가는 이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심지어 사라지는 이들 덕분에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는 그런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특정한 이들을 죽이는 정책이 다른 모든 이들에겐 조금씩 이득이 된다고 믿어왔다. FTA가 농업을 말아먹을 거라는 세간의 예측은 그러므로 그들을 낙담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흥분시킨다. 우리의 합리성은 마치 러시안룰렛 게임의 합리성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 대해 말하지만 실은 살아남은 자들은 무감각해질 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진다.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lust

2008.04.05 23:31:38
*.47.180.4

4번째 문단에서 5번째 문단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금 비약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연결고리인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심지어 사라지는 이들 덕분에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부터 다소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4번째 문단 읽을때까지 FTA에 대해 언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FTA에 대해 언급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_-;

도르

2008.04.08 15:16:41
*.92.72.252

불펌해여~

학인

2008.04.16 03:51:10
*.168.179.164

제가 평소에 느끼던 바를 잘 써주셨네요...한국 대중문화에서 이런 '죽임의 재현들'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문제들...따라서 무감각해지는 문제들...이 배후의 역사적 트라우마...이런 것들이 맞물렸다는 인상을 가졌는데...어쨌든 슬픈일이저...고리를 끊기는 커녕 요즘 국내 영화들 너무 막 간다는 인상입니다....또 쏠리는게 특징이라...살인으로 가기로 했는지...80년대 캠퍼스에 80년 광주학살로 훼손된 시신들 사진들이 자주 내걸리곤 했는데 토악질이 나는 사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리곤 했저...적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죽음에 익숙해진 정서도 함께 부작용처럼...이래저래 병으로 죽고, 총질로 죽고, 흉기로 죽고, 사고로 죽고...자살해 죽고...죽는 일들이 우리 대중문화 재현에 너무 자주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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