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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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인생이 박복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할아버지 탓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얘기를 하기 이전에 '그'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사업가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온 동네 굶는 이들을 먹이는 것으로 모자라 마을 어귀에 "굶는 사람들은 내 집으로 오시오."라고 써붙여 놓을 정도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성격을 닮지는 않았던 것 같고, 다만 지인들에게 베푸는 건 좋아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에겐 그런 식의 씀씀이를 감당할 만한 돈 버는 능력, 혹은 재운이 있었다.
아버지(내겐 증조할아버지)와 큰형(내겐 큰할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을 때, 십대 후반의 할아버지는 만주에 가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었다. 경북의 베를 만주에 들고 가서 팔았다던가... 장사를 끝낸 후 이문으로 남은 엽전 다발을 배에 두르고 그 위에 옷을 껴입고, 돈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주로부터 경북 영천의 고향마을까지 빌어먹으면서 왔다고 한다. 그는 귀향하자마자 털썩 쓰러져 석달 동안 요양을 한다. 그후엔 벌어온 돈을 시드머니로 삼아 이런 저런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 농사짓던 집안은 아니었으니까. 그 당시의 사업이래봤자 별 게 없었고 축산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닭이 잘 커서 돼지를 키우고, 돼지가 잘 커서 소를 키우기 시작했단다. 한국전쟁 때는 잠깐 참전했다가 운좋게도 경미한 부상으로 전역했고, 피난의 와중에 들른 시골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 즉 할머니에게 청혼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에게 청혼을 한 게 아니라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결혼의사를 밝혔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당시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기와집을 지어놓고 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결혼을 승낙했다. 사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의 집에서 2-3년 가량의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친척들이 모두 사는 그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모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누나들에게 소원을 하나씩 말해보라고 한 후 가지고 싶다는 땅을 다 사주었다. 집안의 사업빚도 다 갚았겠다, 아마 자기 식구들끼리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재도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형제들에게 줘버려 할머니의 불만이 높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는 또 벌면 돼."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미군지프에다 가재도구만 챙겨서, 아내와 큰아들(내 아버지)만 태우고 새로운 동네로 이사했다.
이승만 시절, 할아버지가 새로운 동네에 이사와서 벌인 사업은 불법 벌목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두세달에 한번씩 일을 나가서 열흘 정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밤에 일어나 군복을 입고 워커힐을 신고, 고량주 한병을 뒷춤에 꽂아넣고 일행들을 소집해 "가자!"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군 지프 수십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선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반에서 일등했을 때 할아버지가 반 친구 모두들에게 햄버거와 콜라 -당시로는 비싼 음식이었을- 를 사준 적도 있다고 하니 "나는 또 벌면 돼."라는 말이 허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할아버지가 산에 갈 때는 공무원들이 잠을 자지 않고 깨서 기다렸는데, 물론 단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뇌물을 받기 위해서였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는 돈을 자루에 담아서 들고 왔다고 한다. 자루를 그냥 집구석 어딘가에 던져 버리고 다시 놀러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생활은 애정이 없었고, 대화도 별로 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는 냉담한 결혼생활이 십여 년간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삼형제를 낳았다.
할아버지의 여가생활은 대충 주색잡기, 라고 요약될 수 있었다. 따뜻한 정종을 좋아했고, 마작의 고수였다. 기생집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고 '작은집'도 차렸다고 한다. (훗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쥐어주며 그 여자를 보냈다고 한다.) 박정희가 집권하자 통제가 심해져서 벌목사업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말년의 몇 년 동안, 할아버지는 별다른 재미없이 여가생활만 즐겼다.
방탕한 생활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건강이 그랬던 것인지 할아버지는 20대 후반부터 위장이 좋지 않아 거의 죽밥을 드셨다고 한다.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돌아가신 것은 서른 여섯살 때의 일이었다. 뒤늦에 하느님을 찾고 '만일 살려주신다면 매주 애들 손잡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했지만 무소용이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번 돈을 다 쓰고 돌아가셨다. 훗날 할아버지가 집구석에 던져넣은 돈자루가 하나 발견되기는 했지만, 박정희의 화폐개혁이 단행된 다음이었다. 그 돈이었으면 그 동네 땅은 다 살 수 있었다고 아버지는 회고한다. 30대 초반의 할머니는 12살, 9살, 6살의 세 아들을 데리고 가진 것 없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랄까.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구두닦이를 찾아 갔다가, 아버지가 구두닦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여자가 따라주지 않은 술은 마시지 말고, 남이 닦아주지 않은 구두는 신지 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뭐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제 구두는 제가 닦아 신고 있죠."
정통고품격찌질찌질
아버지는 매우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지만, 배경은 별 볼일은 없는 자였으나, 어머니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지방 사업체의 외동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내가 공식 통계로 셋이었고, 어머니는 대략 첫째 외동딸로 태어나서 철없이 성장하시었다. 우선 돈관념이 없었고, 매우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에 물들어 있는 귀족적인 자녀였는데, 이 낭만소녀는 자기 생활 기반에도 관심이 없었던 듯.
어머니는 당시의 브나로드 운동의 여파로 남아있던 농촌의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매력에 이끌려 머리만 좋은 아버지와 결혼했고, 시집살이 첫날에 푸세식 화장실에 똥을 푸러 들어가야 했다. 일생에 막장식 서바이벌을 감내했던 초 여자 마초 시어머니와는 그 사상적, 계급적 세계와 완전히 달랐으니, 이 둘이 서로를 일생의 원수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어머니는 당시의 브나로드 운동의 여파로 남아있던 농촌의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매력에 이끌려 머리만 좋은 아버지와 결혼했고, 시집살이 첫날에 푸세식 화장실에 똥을 푸러 들어가야 했다. 일생에 막장식 서바이벌을 감내했던 초 여자 마초 시어머니와는 그 사상적, 계급적 세계와 완전히 달랐으니, 이 둘이 서로를 일생의 원수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고조할아버지가 남긴 도박빚 때문에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고생하신 것 정도;;?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셨다니,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영정사진 자세히 들여다볼 걸 그랬다;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