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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출간

조회 수 4580 추천 수 0 2011.04.18 12:10:54

여러분들이 <안티조선 운동사>를 구입하지 않고 우물쭈물 하시는 사이에 공저가 하나 더 나왔습니다. 3인 공저이구요. 경향신문 2030콘서트란을 같이 쓰는 최태섭 님과 스타리그 팬덤에서 'pain'이란 아이디로 유명한 김정근 님과 함께 쓴 책입니다. 


무슨 책인지에 대한 설명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이신 엄기호 선생님의 추천사를 공개하면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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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 고픈 소크라테스는 불가능한가?

 
달빛요정 만루홈런님과 최고은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청년노동의 현실에 대한 조명탄이었다. 창의성이니 열정이니 청춘이니 하는 화려한 말 뒤에 감추어져 있던 추악한 현실이 대낮보다 더 밝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영화에서부터 만화 문화생에 이르기까지, 홍대 앞에서 배를 굶어가며 자기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뮤지션에서부터 돈 안 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청년들은 그들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봤다. 그리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을 왜 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에 이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내놓는 답은 간단하다. 네가 원한 일이잖아. 그렇다. 청춘은 쫄쫄 굶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노동을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야망을 성취하는 도전으로 여겨야한다. 열정은 청춘만이 가지고 있는 땔감이며, 창의성은 청춘의 기관차이다. 창의적이 되라,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부어라. 쫀쫀하게 돈 따위에 연연하지마라.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러나 이에 대해 달빛요정님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도토리 싫어, 라면도 싫어, 다람쥐 반찬 싫어, 고기반찬 좋아.’


여기 이제 20대와 작별을 고하는 3명의 젊은 작가들이 작정을 하고 달라붙어 청년들에게 들씌워져 있는 이 열정과 창의 노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들은 파티쉐부터 프로 게이머들, 그리고 네일 아티스트와 고시생들까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같은 나이 또래 ‘동료’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세상을 뒤집어엎겠다는 혁명적 꿈도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겠다는 ‘소박한’ 꿈이 어떻게 처참하게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자본주의는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에 다름없는 가격으로 착취한다. 꿈은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놓은 가장 잔인한 덫이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자신이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 계속 사는 것을 꿈꾸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달짝지근하게 약속하는 그 미래, 그 미래에서 이들이 바라는 것은 ‘장인’이고 ‘사장님’이다. 그런데 노동자라니. 그것이야말로 이들이 가장 거부하는 이름이다. 아니, 자본주의가 거부하여야한다고 이들에게 속삭이는 이름이다. 너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마. 곧 너는 사장이 될꺼야. 이 책의 작은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사장님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노동하는 이가 자신의 현실 모습인 노동자를 거부하고 부정한다. 그것은 노동자를 통해서는 생존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자아실현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되더라도 최소한 장인이 되어야하고, 장인이 된 다음 자기 숍을 차려야하며, 자기 숍을 차린 다음에 그 공간은 자신의 왕국이 된다.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네일아티스트인 은주는 현재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공간에서 그들을 분할하고 착취하는 ‘인센티브’ 제도에 대해서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이 사장이 된 다음에 제도를 바꿀 것을 꿈꾼다.


배고프더라도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강요하고 그 삶을 갈망하는 사회, 사실 이것은 이미 서구에서는 68년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된 청년들의 요구였다. 적어도 서구사회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전후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통하여 해결하였던 자본주의는 국민 모두를 배부른 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코제브는 이런 인간의 미래를 미국의 대중소비사회에서 만났다.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대형마트로 차를 몰고 나가 식품이며 가전제품을 산더미처럼 사고 미친듯이 소비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을 꿈꾸기 보다는 자기 앞에 있는 상품, 오로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만족하는 ‘동물’들이었다. 그래서 코제브가 미국에서 만난 인간의 미래는 ‘동물’이었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다만 욕구만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불만’이 인생의 동력이 아니라 ‘만족’이 삶의 동력이 된 존재, 그것이 바로 동물이 아니던가?


68혁명은 이에 대한 반기였다. 왜 우리가 동물처럼 살아야하는가. 프랑스 68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우는 <일상생활의 혁명>을 쓴 라울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을 해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만에 대한 자본의 화답이었다. 노동자가 되어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오로지 소비로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모두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자. 이 글에 등장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바라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하고 싶은 일에서 장인이 되자. 장인은 예술가이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장인은 자신의 생산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사람이지 노동자처럼 자기가 만든 물건에서 소외되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 숍을 가진, 자기 이름을 걸고 리그를 펼치는 프로게이머들처럼 자, 이제 우리 모두 장인이 되자. 여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노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착취하기 위해 내건 슬로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노동의 미학화이다.


미학화된 노동을 실천하는 존재, 그들이 바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이 글에 등장하는 청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듣는 그 이야기. 네가 원한 일이잖아. 바로 그것이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에 비록 배는 좀 고프더라도 당당해야하고 기뻐해야한다. 그럴수록 더 창의적이 되고 열정을 바쳐야한다. 비록 지금 세상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인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지시켜야한다. 이 책에 나오는 일화로 이야기한다면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 같으면 병원 응급실에 가서라도 정신을 각성시켜야한다. 그것이 배부른 돼지이기를 거부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로 작정한 ‘예술가’들이 걸어야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고발한다. 배고픈 돼지이기를 거부한 소크라테스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배고픈 돼지의 삶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유토피아처럼 아름답게 약속한 그 미학적인 세상은 배고픈 돼지들이 울부짖는 지옥이었다. 도토리가 아니라 고기반찬을 달라고 노래했던 달빛요정처럼. 일하는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악덕기업주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진보정당과 시민단체의 현실처럼. 밤새 야근을 하고 코피를 쏟더라도 탓해야하는 것은 노동구조가 아니라 약해빠진 자신의 ‘간’인 것처럼.


아마 이 책을 읽고 부모는 자식에게 ‘엄마는 다 준비가 되어 있어. 괜찮아. 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면 된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일이 뭐야?’ 이 따위의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그렇게 자아를 실현하며 열정을 바치며 사는 것이 배가 고프더라도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식을 굶겨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테니 말이다. 배부른 돼지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배고프더라도 소크라테스로 살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그냥 배고픈 돼지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런 교훈을 얻는다.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구조라는 것을. 그것이 배불렀던 돼지와 배고픈 돼지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이 청년들의 미래가 적어도 배는 고프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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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

2011.04.18 13:03:00
*.212.193.137

엄기호님의 추천사를 읽고 든 감상입니다. 저자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자발적 가난)와 소수의 배부른 소크라테스(보보스, 창조적 계급)의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 그리고 유일한 해결책은 좌파질(노동 구조의 개선)이라고 말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딴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세상에 배고픈 소크라테스(자발적 가난)나 배부른 소크라테스(창조적 계급)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까지 노동 구조가 유일한 문제라고, 좌파질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뭐 저들이 좌파이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현재 배고픈 소크라테스(자발적 가난)로 살고 있고 앞으로는 배부른 소크라테스(보보스, 창조적 계급)가 되려고 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거부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저 글에서 나는 현재 존재하지도 않고(왜냐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사실 배고픈 돼지일 뿐이라고 하니까)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왜냐하면 배부른 소크라테스로서의 보보스, 창조적 계급의 꿈은 저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놓은 가장 잔인한 덫일 뿐이라고 말하니까)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노동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물론 있다. 하지만 그건 유일한 문제도 아니고 유일한 해결책도 아니다. 왜 배고픈 소크라테스나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까지 외면할 정도로 노동문제를 유일한 문제로 유일한 해결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알고 있다. 하지만 좌파가 아무리 저런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을 해도, 존재하는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걸로 취급해도 현실엔 엄연히 배고픈 소크라테스(자발적 가난)도 있고 배부른 소크라테스(창조적 계급)도 있다.

좌파들에겐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만 보이나 보다. 우파들에겐 성공 신화만 보이는 것과 같다. 근데 어느 쪽도 서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둘 다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노동문제의 해결은 배고픈 돼지를 배부른 돼지로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돼지를 소크라테스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돼지가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동문제의 개선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자발적 가난이나 창조적 계급이라는 게 필요한 것이다. 그점을 저들이 간과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라울 바네겜의 말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하뉴녕

2011.04.18 14:00:00
*.171.69.149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열정노동' 종사자들을 편의상 일곱 부류로 정리하고 있는데요. 마지막 부류로 운동권 상근자들이 등장합니다. 노둥구조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일종의 답없는 열정노동이라는 얘기에요. 퀀텀 님처럼 이 얘기를 단순하게 정리해 버리면 우리는 제 발등을 찍고 있는 거죠. 답이 없는 노동들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거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 보라고 권유할 수도 없는 (사실 이미 그런 종류의 시험들도 계층화되고 있고 그 시험에서 성공 못할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투입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난감한 실정에 대한 설명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인터뷰 도중의 단상들에서도 등장하고, 책의 결론부에서도 등장하죠.


이 얘기가 성립하려면 '배부른 소크라테스'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구체적으로 파보자면 그보다도 더 어렵고 복잡한 얘기입니다. 한국에선 각 영역의 컨텐츠 생산자 업계 탑들도 대기업 월급쟁이만큼 못 버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바우만 <새로운 빈곤> 같은 책을 보면 화이트칼라 창의노동자들이 꽤 고소득자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책 한권 내면 수십 만부 내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도 있고 최고은씨와 엇비슷하게 살다가 드라마 한 편 원고 줄 때마다 수천만원씩 받는 작가도 있죠. 그 사람들 쳐다보면서, 혹은 그 사람들만큼은 안 되더라도 어느 정도 자기 작품에 가치를 평가받기를 원하면서 다들 노력하는 것일텐데, 당연히 그런 노력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탑'이 너무 적다거나, 그 '탑'의 대우도 부실하다거나, 업계에 뛰어들기 위해 준비하는 이들은 준비과정 도와준다는 핑계로 최저임금 레벨에도 못 미치는 착취를 당하는 현실을 드러낼려고 하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제가 옛날부터 술자리에서 가끔 글쟁이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로또하는 사람들 왜 비웃나요? 로또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명은 당첨자가 생기죠. 우린 뭐 일주일에 한명씩 새 베스트셀러 작가가 나오나요?"


그리고 보보스 문제와 별도로 이 책에 등장하는 열정노동 종사자를 '자발적 가난'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발적 가난'이란 말은 가령 300만원 벌 수 있는 사람이 소비도 줄이고 노동시간도 줄이고 어찌저찌 하여 100만원 벌면서 정신적 여유 가지고 사는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런 상황이 되어야 '배고픈 소크라테스'란 말도 성립하겠습니다만...매일 10시간 이상씩 노동하면서 한 60만원 받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좀 아귀가 안 맞죠...이건 좀 극단적인 경우일 수 있지만 (물론 이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꽤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 연봉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불만족을 '하고 싶은 일', '꿈', '미래에 대한 희망'이란 단어를 통해 극복해 내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책인데 '자발적 가난'에 대한 애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내용과는 좀 별도의 맥락에서, 만약 남한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이 평균적으로 살아온 일개인에게 하나의 선택지로 가능하다면, 저는 김규항의 정치평론이 꽤 의미있다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규항의 정치평론의 대부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듣보

2011.04.18 13:04:20
*.219.108.158

추천사를 보니 서동진 선생 책 생각이 나네요..그거랑 어느 정도 맥이 통하는건가요?

하뉴녕

2011.04.18 13:52:11
*.171.69.149

맥이 통하는 부분이 있고 본문에서 필요할 때 실제로 서동진 선생님 책이 인용이 됩니다...

피노키오

2011.04.18 13:29:03
*.151.166.168

배부른 돼지중 일부가 배 안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고 그 중 아주 극소수가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겠죠.

피노키오

2011.04.18 14:30:37
*.151.166.168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4.18 14:33:12
*.171.69.149

예 감사합니다. :) 언제 연락드릴 일이 있을지도요 ^^;;

피노키오

2011.04.18 14:46:46
*.151.166.168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4.18 17:22:32
*.171.69.149

5월쯤 가야 시간이 날 것 같긴 한데 4월에 불현듯 연락드릴지도 모릅니다. ㅎㅎㅎ

파도소리

2011.04.18 15:37:10
*.41.254.193

목차를 보니, 1장이 윤형님이 쓰신 건가요? 아님 뒤에도 등장하시나요? 윤형님 저작이 차곡차곡 나오는게 보기 좋습니다 ^^

하뉴녕

2011.04.18 17:17:17
*.171.69.149

초고의 경우 1장과 3장을 최태섭 님이, 2장을 저와 김정근 님이, 4장을 제가 썼습니다. (2장의 분량의 다른 장의 두 배 정도 됩니다.) 그런 다음 서로 가필을 했기 때문에 초고 사이로 공저자의 생각이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

2011.04.18 16:32:14
*.133.228.209

항상 궁금한건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정작 그들은 왜 신자유주의에 속절없이 당하고 대중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야에 데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다른 애기를 하죠 그런 기회가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하거나 자본주의를 대체할 제대로된 학문,이론,제도를 개발하지 못한 좌파들 자신의 문제도 있으니까요. 이건 이책과 다른 애기인데요. 진보니 보수니 경제,정치를 공부할수록 우파들의 문제는 이전부터 보였는데 좌파가 무능력한지 집권 못하는지 공부할수록 보이더군요. 이러니까 정치에 관심을 같다가도 그놈이 그놈이군 하면서 냉소주의로 돌아서는건지도요.

하뉴녕

2011.04.18 17:15:35
*.171.69.149

뭐 학문적인 저술들로 눈을 돌려보면 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속절없이 당하는지, 기존의 좌파담론이 어떻게 무력해졌는지를 밝혀내는 작업들은 좌파 학자들 역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의 분석이 너무 설득력 있는 나머지 (그것이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0-;;; )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의 문제에 들어서면 어버버...어버버...가 됩니다.


제 글쓰기도 사실 그런 종류의 작업들을 미시적/실천적인 영역에서 반복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대안'을 좌파 이론가(? 그런게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한 두명이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보는 편입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야겠다는 인식의 합의가 있다면, 대안은 그 인식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의 갑론을박에 의해 생성될 수 있겠지요. (어차피 모든 대안은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게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몇 사람이 들고 와 봤자 시민들 스스로 절실하게 동의하지 않는 이상 현실세계에서 판판이 깨지고 약장수 약 팔았다는 소리나 들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경우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작업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치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입니다.

2011.04.18 19:11:02
*.133.228.209

네 좋은 말씀입니다. 88만원세대 같은경우가 대표적인 젊은이들에게 책 내용과 다르게 염세주의적인걸 느끼게 됐었습니다. 진보분들이 책쓰는 방식은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는것인데 이게 사람들이 모르는게 아니고 어렴풋이 알고 있지요.

이걸 확신하자 제 주위 사람들을 보면 아 세상이 잘못됐어 이책보고 세상을 바꿔야지가 아니라 음 역시 공무원이 되자 막차끊기기 전에 자기개발해서 나부터 살자 요렇게 변하더라구요 88만원세대 자기개발버전 ?

그런분들의 책들은 구조를 변해야 한다는게 결론인데 그건 한두사람이 할수 있는게 아니지요.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개인은 할수있는게 없구나 하면서 자포자기하거나 무기력에 빠지는걸 보았습니다. 개인이 할수 있는것도 말해주시면 즉 희망고문이라도^^; 말이죠 지금 20대들은 대부분 고립돼있습니다. 학교 안다니면 취업에 아니면 그냥 일자리 찾느라고 10대는 학교생활을 하니 소속되는곳이 있지만 20대 중반만되도 취업을 안하는이상 거의 혼자지요. 이들이 대부분 소리 소문없이 죽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 타살이지요.

하뉴녕

2011.04.18 18:06:12
*.171.69.149

<88만원 세대>는 그렇게도 수용되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지요. ^.^;; 저희 책에 대해서도 비슷한 지점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필자들끼리...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이 책의 뒷부분이 그런 문제제기들을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0-;;; 결국 한번 읽어봐 주시고 같이 한번 논의해 보자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ㅠㅠㅠㅠ

2011.04.18 18:28:53
*.133.228.209

네 한윤형님 책을 송구스럽게도 못봤는데 이책은 꼭 보겠습니다. 이건 전에 제가 쓴건데요. 88만원세대 애기하니 제가 비판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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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자기 모순된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단결적 저항이 유일한 것 같다는 것이 머리 나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가 아니라 21세기라는 200년의 시차를 내고 있다. 더이상 폭력은 체제를 바꿀 힘이 되진 않는다. 힘의 균형과 제어장치가 마련되어가면서 폭력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있고 상식과 명분이 가지는 힘은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결의 전제와 도구는 더 이상 폭력이어서는 안된다. 어디까니나 상식과 정당한 명분(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지는 차치하더라도)만이 유일한 힘이다. 그렇다면 비상식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단결의 전제와 도구를 상식과 명분에서 찾는다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환경은 '어느 정도(확실히가 아닌)' 갖춰진 셈이다.

그런데 폭력을 일으키기 이전에, 상식과 명분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이미 단결을 시킬 수 있는 방법도 현 시점에서는 난항을 겪고 있다. 지금은 포디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분화되면서 각 계층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 시대에 단결이란 말이 공허하다는 것 정도는 좌파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경제학 개론 수업을 듣는 대학교 학부생에게도 이미 낡은 언어가 될 정도로 뻔한 사실이다. 지금의 정권에서 벌이는 정말 비상식적 행위로 인해 촛불이란 형태로 잠시나마 이해관계 대립이 주춤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그 전망은 밝지 못하다. 역시 분화된 계급의 이해관계와 개인적 처지로 인해 단결이 점차 요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언론 플레이를 들지 않더라도 촛불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가 점차 커지는 것이나, 촛불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교육감 선거의 결과는 대표적인 예인 것 같다. 촛불이 사그러진 것 같이 보이는 이 상황에서 정치적 희망이 꺾인 뒤에 정치에 대한 환멸이나 더욱 더 깊은 무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이놈의 정권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을 목도하면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경험한 터라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단결하지 않는가?

원래 대중이라고 묶여진 집단은 사실 동일한 개체들의 합으로 이뤄져있지 않다. 그것은 포디즘 체제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노동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계급 대립 상에서 갈등의 초점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갈등이 아니었다면 본질적으로 대중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 포스트 포디즘 체제에서 이런 대중 해체적 상황은 더욱 심화된다. 애초에 동질적이지 않은 집단이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분화된 노동계급간의 이해관계 분리로 더욱 더 동질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계급의 분리는 집단의 규모를 작게 만든다. 작은 규모의 집단은 큰 덩치를 갖고 있는 지배계층에게 덤벼든다는 것이 겁이 난다. 유일한 방법은 단결이지만 여기서 작은 집단은 몇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첫째는 바로 이해관계 문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동계급의 분화로 한쪽 계층의 이익이 다른 한쪽에게는 심각한 손해로 작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경우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은 아주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단결하지 못한다.

둘째는 첫째 고민에서 연결된다. 바로 단결의 대상인 다른 작은 집단들이 연합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즉, 자신의 대척점에 선 반대편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배계층과 동조할 경우 승산이 낮아지는 것이다.

셋째는 마찬가지로 연결된다. 승산이 낮아지면 질수록 지배계층에게 당할 보복의 수위와 강도가 높아지고 그것이 자신에게 집중될 확률도 높아진다.

넷째는 목표와 성과물(인센티브)의 명확성이다. 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꿀이 눈 앞에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해야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정책이나 대안이 좋더라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이라거나 제대로 인지되지 못하게 된다면 공감을 불러일으키긴 어렵다. (88만원 세대를 읽은 많은 20대들 중 상당수가 - 물론 이 글을 쓰는 본햏조차도 제대로 행간을 읽어냈다고 할 순 없겠지만 - 그 행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우석훈 씨가 의도한 결과보다는, 도리어 세상에 대한 염세적 인식이 강화되는 등의 다양하고도 엉뚱한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따라서 집단의 생존에 아주 직접적인 손해를 미치지 않는 경우라면 이해관계의 침해 정도가 중간에 서 있는 집단은 대체로 참여와 단결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우석훈 씨가 아무리 사회 구조의 모순을 폭로하고 다안성이란 좋은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저항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꿀이 직접적으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한, 그 위협에 대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한은(얘기를 거꾸로 한다면 꿀을 '생존 위협'으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대중은 참여하지도 않고 따라서 단결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슬프지만 인간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행 방법에 대한 방향을 찾는다면 아주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가는 것 같아 김빠지지만 역시나 대량의 '꿀'을 눈 앞에 들이미는 서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생존 위협에 대한 폭로도 한 방법이지만 이미 우석훈씨가 쓴 방법이고 또한 20대의 일부에만 해당되는 폭로인지라 단결과는 거리가 있다. 그 20대들조차도 행간을 잘못 읽거나 염세적으로 빠진 부류가 많은 걸 생각해보면 그리 적당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글 남겨도 될지 모르겠지만

2011.04.18 17:23:22
*.143.149.200

"비밀글입니다."

:

Reznor

2011.04.19 04:07:19
*.37.109.203

좋은 책이 또 출간되었군요^^~
빠른 시일내 구입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만

2011.04.19 13:54:42
*.99.62.18

본문 중
[그러나 이 책은 고발한다. 배고픈 돼지이기를 거부한 소크라테스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배고픈 돼지의 삶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부분에서
앞의 "배고픈 돼지"는 "배부른 돼지"여야 하지 않은지요?

Rodaldo

2011.04.20 15:30:48
*.41.217.40

저도 이게 좀 이상한 것 같아 지적하려고 했는데... 문맥상 배부른 이 더 적절한 것 같아요.

하뉴녕

2011.04.21 02:30:22
*.171.69.149

그러네요...ㅎㅎㅎ

unknwon

2011.04.19 15:08:10
*.132.250.36

잘 읽겠습니다. 선물할 책을 찾고 있었는 데 좋네요. 이이 타이밍!

그람시

2011.04.19 18:51:56
*.133.228.209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4.20 01:53:37
*.171.69.149

낯가리는 편은 아닙니다만...ㅎㅎㅎ 5월은 되어야 시간이 날 거 같습니다. ㅠㅠㅠㅠ 5월에 한번 더 댓글 부탁드립니다. ㅎㅎㅎ

a_hriman@hotmail.com 메일 보내주셔도 되구요~

그람시

2011.04.20 19:58:22
*.133.228.209

"비밀글입니다."

:

NeoPool

2011.04.21 01:10:51
*.152.3.31

정말이지 꼭 필요한 작업을 해주셨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

전 보수

2011.04.21 13:10:24
*.133.228.209

전 보수에 가까운데 진보분들의 책을 보면서 공통점이 있는거 같습니다. 여기에 데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0. 얼마 전 이오공감에 이글루스의 우경화를 논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었다. 한 편에서는 이글루스의 우경화가 심각해졌다며 우려하고, 다른 편에서는 과거 좌글루스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조롱하였다. 일단 모두들 이글루스가 과거의 좌글루스 리즈시절(2008년 여름 ~ 노무현 대통령 조문 정국)에 비해서 우경화되었다는 현상에는 동의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을 한 쪽에서는 개탄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글루스의 우경화라는 사실판단을 전제로 하고, 이 우경화의 성격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진보-좌파들이 철저하게 '스스로의 옳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신만 유포하며 상대방을 모욕한 덕에, 1. 보수파들로 부터 필요 이상의 반감을 사서 반동을 야기했고 2. 논리적, 경험적으로 허술한 주장들을 남발하고, 3. 현실에 와닿는 구체적인 의제를 제시하지 못해 보수의 역습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고 생각한다.




1. 혁명의 시기 뒤에는 필연적으로 반동이 찾아온다. 급격한 열정의 동원은, 상대방에 대한 모욕, 멸시를 동반한다. 하지만 혁명 세력 내부에서 열정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그들 내부의 차이가 제기될 떄, 즉, 혁명 세력의 응집력이 약해질 때, 반동세력의 역습이 시작됐다. 숨죽이며 혁명의 시기를 보냈던 반동 세력들은 조용히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그간 받은 멸시와 수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혁명세력이 열정의 동원 이후, 동원된 열정의 제도화를 성공시키지 못할 때, 이들은 필시 반동세력의 역습에 무너지고 만다. (여기서 혁명과 반동이라는 말은 어떠한 가치평가도 담고 있지 않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셨으면 한다.)


2008년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한 일련의 열정의 동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들이 '쥐박이', '2MB' 라고 멸시했던 이명박은 득표율 50%에 달하고, 투표율 까지 감안해도 성인 유권자 중 30% 이상이 표를 던져, 법적-합리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당성 있는 대통령이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에 따라 당선된 대통령이 당하는 멸시는, 자신에 대한 모욕과 멸시로도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촛불집회 시기 열정이 최고조로 동원되었을 때는, 미처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점차 열정들이 흩어지자, 서서히 반격에 나섰다. 앞서 말했듯이 반동 세력의 반격의 시기에 혁명세력이 동원된 열정을 제도화시키지 못했다면, 그들은 반동 세력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소위 이글루스를 비롯한 인터넷의 진보 내지 좌파들이 열정을 동원하는 것 이상으로 동원된 열정을 일상적인 힘으로 제도화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글루스의 진보들이 우파들의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졌던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2. 나는 진보가 열정의 동원에만 능하고, 이를 지켜낼 수 없었던 이유가 그들의 글 쓰기 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경우 진보 좌파들은 자신들의 "절대적 정당성"을 강변하고, 자신들이 정당한 이유는 자신들이 "진보" (역사의 대의를 담보하고 있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입장을 따르지 않는 저들은 "나쁜 놈"이다.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은 정당성이라는 틀에 채워넣기 위한 양념으로서 이용될 뿐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진보좌파들의 글은 많은 경우 이렇게 가치판단이 앞서고, 그를 통해서 현실을 재단한다. 그들은 대체로 이러한 삼단 논법을 따른다.


1. 진보는 옳다.

2. 나는 진보다.

3. 따라서 나는 옳다.


이러한 무적의 삼단 논법의 변형으로 진보 좌파는 현실을 재단한다. 예를 들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나쁜 이유는


1. 보수는 나쁘다.

2. 이명박 대통령은 보수다.

3.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은 나쁘다.


가 된다. 물론 실제의 글들은 이보다 훨씬 화려한 수사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논리적 뼈대는 이와 같은 삼단논법인 경우가 열에 아홉이다. 이 글쓰기의 장점은 자신과 입장을 함께하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감과 상대방의 도덕적 결함을 확신하게 만들어, 열정의 동원을 쉽고, 급속하게 확산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단점은, 현실과의 정합성이 떨어지며 (진보파들의 '인식왕'으로서의 지위는 대체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상대방에게 극도의 모욕감을 주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단점은 바로 열정이 식은 뒤에 (after the revolution) 진보파들이 우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3. 보통 진보는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한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적합하며(사실판단), 그것이 도덕적으로 부당(가치판단)하다는 이중의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는다. 반면 보수는 세상의 불의가 있건, 없건, 현 상태를 옹호한다. 어차피 세상은 더러운 것이고, 더러운 걸 고치려고 해봤자 소용도 없고, 오히려 더 더러워질 뿐이며, 그 과정에서 이전의 성취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시만은 이를 역효과, 무용, 위험 명제로 정리했다.) 이들은 '상식'에 호소하며 이들에게 현실이 문제가 있건, 없건 (사실판단) 이는 별로 중요치 않다.


하지만 진보, 좌파에게 사실판단이 옳으냐, 그르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들이 지적하며, 이를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회문제가 만약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이들의 주장은 철저하게 무력해진다. 그들의 주장이 철저하게 근거없는 것이었을 때, 그들의 대의는 '재수없는 허세'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혁명의 시기에는 '사실판단'의 부재가 큰 흠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누렸던 '사실판단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혁명이 끝났을 때, 더이상 그러한 호사는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 혁명에 취해있는 진보파들은 이러한 사실을 비교적 늦게 깨닫는다. (20년 이상 혁명의 마법에 취해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혁명에 취해 보수파들의 반동에 팔과 다리가 잘려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머리가 잘릴 지경에 가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꼬리를 내리거나, 팔, 다리, 심지어 머리까지 잘린 채로 변방으로 밀려나서도 "나=진보=정의" 도식을 되풀이 하며 자아도취할 뿐이다.


또한 진보파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정의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머지 너무나 근본적인 해결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현실의 자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따라서 열정이 사라진 후에 지속적으로 대중적 지지의 기반이 될 수 없다. 대학을 예로 들면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를 만들자 거나, 대학을 평준화하자는 식의 대안이 나오고, 복지의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기본소득을 들이대는 경우이고, 사교육 얘기가 나오면 사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의 부도덕성을 논하며, 사교육을 철폐하자는 식이다.. 이렇게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는 기준들을 들이밀게 될 때, 대중들은 이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 진보는 현실적인 개혁의 기반을 가질 수 없게 된다.




4. 이글루스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촛불집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국면까지 진보파들은 항상 스스로의 정의를 강변하며, 상대방을 모욕주는 수준에만 머물러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현실적 정합성을 갖는지, 이론적 근거는 있는지, 최소한 내적 정합성은 존재하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심했다. 마침내 혁명적 시기가 끝나고, 일상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논리를 갖추지 못했고, 보수파들의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져내렸다. 이런 진보파의 허약함을 적절히 공격한 사람이 바로 아리아리랑 님이나, 트윈드릴 님 같은 분들이었다. 그들은 진보파들의 글 속에 존재하는 논리적 모순이나, 현실과의 부정합성(주로 아리아리랑 님), 이론적 허약함(주로 트윈드릴 님)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줬고, 이에 진보좌파들은 하나 둘 씩 무장해제됐다. 이 때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강변'은 철저히 무력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글루스의 우경화, 더 넓게 볼 때 한국사회의 우경화 (물론 촛불 때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는 그 시작에서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좌파가 단순히 혁명적 시기에 분출하는 열정의 분출에만 편승하는 대신에, 지속적으로 안정된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에 신경을 썼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험적 자료들에 기반해, 논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입장을 펼쳐나가는 진보적 이글루스 블로거들(ex) 노정태 님, socio 님, 들꽃향기t 님, 검은달빛 님 등등)이 반동의 시기에도 별 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5. 나는 진보파들이 우경화가 심각하다고 진단하고, 이에 대해 개탄한다면 그 원인을 딴데서 찾지 말고 스스로에게서 찾아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먼저,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모욕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하
게 반감을 사지 않았으면 한다. 진보나 보수나 똑같이 가치의 문제고, 가치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조절될 뿐이지, 어느 한쪽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강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째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인식왕'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경험적 자료, 논리에 기반한 주장을 펴나갔으면 한다. 셋째로 너무 근본적인 이야기(ex) 혁명에 준하는 광범위한 개혁, 기본소득 etc)에 집착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현실을 개혁해나갈 수 있는 가깝고, 구체적인 얘기를 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고, 우경화된 이글루스의 더러움을 탓하고, 대중들의 천박한 물질적 욕망들을 규탄하며, 스스로의 '인식왕', '성인군자왕'의 지위를 강변할 때, 진보-좌파는 영원히 보수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변방의 위치에서 벌거벗은 임금 놀이를 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지만, 진보적 열정이 사회개혁으로 이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p.s 물론 이글루스 특유의 '이오공감'이라는 즉각적 반응이 쏟아지게 하는 시스템 덕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글들이 인기가 많고, 이에 따라 사람 골로 보내기가 아주 쉽다는 점도 고려해야하겠다. 하지만 어쨌든 이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경화를 탓하는 진보-좌파들이 애초에 '이오공감'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급성장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할 필요가 있다.

하뉴녕

2011.04.22 13:21:19
*.171.69.149

대략 무슨 말인지 알겠고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일부분은 제 문제의식이기도 합니다. 열정과 탈진의 반복이란 문제의식도 촛불시위 부터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이글루스의 우경화라든가 좌경화라든가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서...-0-;;; 이오공감을 가끔 보긴 봅니다만... 그리고 촛불시위 지지가 좌경화라고는...;;; 저는 촛불시위를 무작정 예찬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는지라...


여하튼 종종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학교회장

2011.04.21 22:49:38
*.133.228.209

20대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한 좋은글이 있군요

학부 때 과 학생회장을 비롯해서 과업무를 2년 넘게 맡아 본 일이 있다. 이때 경험은 내게 대학생들, 변화와 양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예컨대 이러한 양태적 분류를 가능하게 해줬다. 최근의 대학생의 단계는 남녀 구분할 것 없이 대체로 3개 정도의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무계획적으로 입학해서 끝도 없이 좌절하는 신입생 기간. 이 기간은 한국의 무차별적이고 권위적인 제도의 폭력이 이완의 감각으로 후유증을 남기는 기간이다. 남학생들은 군대, 여학생들은 2학년이나 3학년을 앞두고 한 번 휴학을 하는데 이때가 두번째 단계다. 이 단계에서 대학생들은 처음으로 대학생에 가까운 모습을 찾는다. 연애도 하고 자신의 젊은이로서의 가치관도 성립한다. 그리고 마지막 3기. 이 취업을 앞둔 대학생활 마지막 단계로 대체로 파편화돼 있어서 집단적인 술자리 같은 관습들이 대체로 붕괴되고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지위'에 의해 개별 권위들이 위치 지어지는 때다. 무엇이 현실적인가 하는 판단을 하는 때도,자신의 영어 점수와 학점을 기반으로 끝도 없는 입사 구애 작전과 끝도 없는 실패를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때다. 대학 입시가 한국 젊은 남녀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면 이 단계는 이들의 자존 그 자체에 상처를 주는 시기다. 요컨대 이러한 변화와 구분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가 오늘날의 대학에서 주변이자 중심인 대단히 괴상한 위치의 과 회장 직을 맡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 회장을 맡았던 경험이 가르쳐 준 또다른 긍정적인 점은 수평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비교적 민감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줬다는 측면이다. 대체로 최근 과 회장이 맡는 일이란 신입생과 2학년을 위주로 그리고 과 주류 세력이 되는 복학생을 중심으로 과 행사를 통해 과를 통합해 가는 일들이고, 그 과정에서 부득이 신입생들과의 접촉이 비교적 많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이렇다. 나는 대학시절 대체로 오늘날 말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대학생에 가까웠다. 예컨대 사회과학 서적이나 뒤적거리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며 술자리 토론을 주도하는, 우습지 않게도 인생에 대한 성찰이나 통찰에 대한 교류를 중요하게 여겼고, 사회적 진보에 대한 담론이 대학의 공간에서 형성돼야 한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학생이 갖는 최고의 미덕인 스펙에 대한 예비는 도무지 돼있지 않았고 3.8정도는 찍어야 한다는 학점도 겨우 3.5 언저리에서 마감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러한 생활들은 내게 늘 아주 긍정적인 도움이 됐는데 독서와 술자리에서 얻은 지식들은 토익 책이나 토플 책에서 얻는 지식들 보다 훨씬 값지고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대화들을 통해서 요컨대 대학생들의 문제라고 하는 것의 핵심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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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기사가 말한다. 20대는 찌질이라고. 과연 그런가? 20대 개새끼론이 구체화된 계기로 돌아가 보자. 담론의 시작은 '88만원 세대'라는 수사였다. 요컨대 '88만원 세대' 담론은 오늘날 20대가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88만원 세대 담론은 오늘날 대학생들이, 구체적으로는 서울권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대학생들이 예전 엘리트들이 그랬던 순수성과 결진 마음으로 단호하고 혁명적인 '실천'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역됐다. 오늘날 20대 대학생들이 살아가야할 세상, 사실은 다분히 정파적인 야망의 의해서 구획된 미래상을 참아내는 것이 타당하냐는 질문이었다. 최초 이 수사의 목표가 20대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조롱이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상에 대한 폭로의 전술에도 불구하고 20대는 그저 침묵했다. 88만원 세대의 수사는 결론적으로 20대를 조롱하기에 좀 더 적합한 용례를 갖게 됐다.



이 순간 20대는 찌질이가 됐다. 대체로 70년대 후반생에서 부터 90년대 초반생까지를 의미하는 오늘날의 88만원 세대 담론은 20대에 대한 고양 담론에서 20대를 향한 조롱 담론으로 변신했다. 시큰둥했던 왕년의 운동권 그러면서 이제는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소위 전직 386은 이러한 조롱의 발화점이었다. 비판의 방향은 구슬프게도 늘 단일했다. "우리땐 안 그랬다." 심지어 모 교수는 오늘날 20대는 안된다 아예 포기하라며 '20대 개새끼'론을 내놓았다. 조롱을 넘어서 혐오나 경멸, 아니 그마저도 넘어선 한심함의 정도로 감정의 밀도는 변화했다. 그래도 20대는 침묵했다.


마지막은 '고대생 김예슬'이었다. 보통 명사가 된 고대생 김예슬은 대체로 운동권 스러운 격정적인 격문을 붙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어마어마한' 실천으로 오늘날 20대의 전체 집합에서 자신을 분리 시키는 시도를 했다. 나는 이 사건이 오늘날 20대들의 분노나 절박함에 불을 짚이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20대는 또 조루였다. 보통 명사가 된 고대생 김예슬은 책을 한 권 남겼고 더 많은 냉소 만을 남긴채 무수한 사건들 속으로 사라졌다. 20대는 또다시 담론의 대상, 언급의 대상에서 잊혀졌다. 20대를 중심에 둔 언어들은 더는 무의미한 것 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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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꽤나 적절한 변곡점이라고 할 만했다. 기존 담론이 오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변증법적 조응 없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이해하기' 담론은 이에 대응하는 안티테제라고 할 만했기 때문이다. 20대를 둘러싼 담론들이 철저하게 주변인의 주변적인 시선임을 발견한 저자는 이러한 시선들을 거둬내야 비로소 20대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 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20대라고 하는 '인종' 안으로 들어간 시도, 그리고 기존 88만원 세대 담론의 구체적 주어들이 사실상 20대 기득권이라고 할 만한 소수 엘리트 대학생만을 준거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 점 까지가 이 담론이 만든 실효 였다. 그의 시도는 분명 기존 담론에 비해서 진일보 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발견 역시 고작 '너희를 보듬어 줘야겠다'는 시혜적인 측면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는게 내 판단이다. 다름을 발견하는 방식은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궁극적으로는 대자를 상정하는 전략이고 마침내는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언어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의 말대로 믿음이나 의심은 방향의 차이지 비판적 사유를 배제한 불성실한 힘의 흐름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20대를 비판하든 20대를 껴안자고 하는 시도이든 간에 내가 보기엔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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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내 경험을 말해 보고 싶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한 스무살 남짓한 어린 성인들이 겪는 가장 큰 혼란은 대학이 그들이 최초에 추구했던 대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내 관찰에 의하면 스무살 남짓한 대학 신입생들이 겪는 요컨대 아노미는 많은 부분 입시 과정과 대학 입학 이후에 생긴 갭으로 인해 발생한다. 대입에 투자되는 에너지가 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큰 만큼 이러한 혼란은 이 어린 대학생들을 더욱 큰 좌절감으로 이끈다는 것이다.한국의 입시 구조상 절대 다수의 학생들은 자신 입학하게 되는 '학벌'에 대해서 불만족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형성해야할 강박에 더 쉽게 놓이게 된다. 또 이러한 강박 속에서 이들이 마주하는 대다수의 선배 대학생들은 취업난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존 대학의 정서란 좀 더 도전적이고 좀 더 학구적이거나, 좀 더 자유롭거나 좀 더 방임적일 거라는 기대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기대했던 활발한 토론과 수준있는 책을 읽을 것 같은 환상적인 기대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학교일수록 더더욱 쉽게 붕괴된다. 학생들은 고등학교 같은 질낮은 수업과 나쁜 수업 분위기,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들로 가득한 수업에 실망한다. 신입생들은 끊임없이 강박에 노출 된다.


이러한 강박 속에서 신입생들은 '대한민국의 대학생'으로 양육된다. 대한민국 대학생의 특성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시적인 불안증에 시달린다. 장기적으로는 취업이라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지만 이 문제는 직면하기 전까지는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불안은 크고 중요하게 끊임없이 사방을 조여온다. 전혀 도움 될 것 없음에도 여름 방학 동안 토익 학원을 다니는 1학년 신입생의 마음을 떠올려 보라.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리적인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이 나이또래 전세계 모든 젊은이들 갖고 있는 특성이다. 연애와 섹스 그리고 향락에 대한 욕망 말이다. 그러나 이 욕망들은 잘 제어되지 못한다. 상시적인 불안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경쟁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다. 이는 체제와 구조가 개인을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스무살 어린 학생들이 하물며, 경쟁보다는 협동의 문화를 중시하는 지역 출신이라고 해도 이러한 특성들은 모두 사라진다. 이는 실제 사례를 들수도 있다. 내것과 네것을 구분하지 않던 지방 출신 1학년 학생이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면서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배양하게 된다. 이러한 경쟁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으로 냉소의 자양분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아 추구에 대한 오해를 들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아를 추구할 것은 요구하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추구되는 자아란 실제로 자아와는 거리가 멀고 많은 경우 가짜 자아고 집단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아다. 그간 대학 문화는 집단과 공동체 문화를 전승하는 기구 역할을 했다. 부정적인 면을 포함하지만 동아리는 대학 문화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보통명사였다. 그러나 최근 대학에서 동아리란 '찌질이들의 집합소' 혹은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됐다. 동아리 단위 행사는 대부분 무의미 해졌으며 공동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자아를 추구하려는 수단은 극대화 된다. 동아리가 자아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냐고? 단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최근 대학 문화는 대학 평가와 기업의 요구에 의해 '팀 프로젝트(이하 팀플)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그러나 이 팀플은 아주 많은 경우 대체로 조원틀의 합의를 구하지 못하고 '파탄' 나고 한 두명이 그 짐을 다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 팀플 조원이 약속을 깨뜨리고 간 곳은 자신의 배낭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이거나, 또다른 봉사활동 이다. 요컨대 자신이 추구하는 것 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과 무관하다면 철저하게 무책임해지는 것이다. 대학 공동체, 그리고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 단위에 대해 무감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이러한 네가지 특성을 가진 '대한민국의 대학생'은 대체로 대단히 이기적이고 아주 편협하고 더불어 무능해진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 말고 타인의 욕망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공동체적 책임감에 대한 민감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냉소가 자라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는 고작 정치적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88만원 세대 담론이나 20대 개새끼론은 철저하게 정파적인 이해를 위해 만들어진 담론이다. 내가 보기에 20대는 보수주의자가 될 권리도 있고 진보주의자가 될 권리도 있다. 문제는 20대가, 소위 배웠다는 지성인인 대학생이 비판적 성찰을 하지 못한 채 보수주의로만 경도된다는 점이다. 20대 개새끼론은 이들이 보수주의로 경도되는 게 옳지 않다는 점만을 말하고, 이것이 왜.. 는 20대가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을 이해한다는 점만을 놓고 사고 한다. 요컨대 무작정 진보주의라고 하는 것을 정답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정파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부조의 차원에 대한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 그리고 상시화된 불안들 속에서 명료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보수주의로의 경도는 그러한 점에서 20대가, 소위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기존 20대 담론들은 사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내가 과 회장이던 시절 과에서 벌였던 학술제의 이야기다. 그때 우리의 주제는 88만원세대 담론을 비롯한 20대에 대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시도였다. 결과는? 너무도 명료했다. 여덟 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20대는 스스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답에 도달한다. 그들이 사고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그 정도다. 20대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 개인, 아주 멀리 봐도 가족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20대가 취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취향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지 국가적 목적이나 공동체적 책임감 따위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있다고 해봐야 그저 대체로 허세스러운 '인식' 정도일 뿐이다. 취향으로써의 인식일 뿐이다. 20대의 문제란 결국 자신의 행복만을 경주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이것은 왜... 에서 공감이 20대의 중요한 감정이라고 서술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대는 그들 스스로를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개별적 공감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지금껏 어떤 평론가나 학자도 이 지점에 대해서, 20대가 고작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한다는 가장 중요하지만 아주 작은 사실인 이 지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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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찌질이라는 말을 생산하는 것은 오로지 386의, 전직 운동가들의 특징적인 운동에 비교했을 때 만이다. 20대는, 20대 대학생은 그 나름대로 자신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남 부러울것 없는 강남산 대학생이 홀로 돈을 벌어 남미로 배낭여행을 가고 서울대 출신들이 홍대에서 인디밴드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이러한 오늘의 대학생의 양태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그들의 투쟁의 방향이 오로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현명하고 또 냉철한 현실 감각을 갖고 있다. 20대는 그래서 학습 보다는 공감에 능한 것이다. 계단을 타고 한 단계씩 오르기 보다는 좌우로 날렵하게 그러면서 얇게 퍼지기를 익숙하게 여기는 것이다. 집단화되지 않고 전체화 되지 않았다고, 오로지 진보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들이 어리석은 찌질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보기에 20대가 찌질한 것은 그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고작 한 걸음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 멍청하거나 정치적 감각이 없어서 현실참여를 하지 않거나, 한나라당을 지지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지성

2011.04.22 17:21:04
*.238.57.215

윤형님께 질문 있습니다. 김규항님의 정치평론이 왜 무의미한 건가요? (김규항 팬 아닙니다. 몰라서 묻는 거에요)

unknown

2011.05.20 20:34:53
*.214.206.3

오타인가요?
60페이지 강민 박정석 쉼표가 없어요.
199페이지 주석116 4번째줄 응답라는 → 응답하는 이겠죠?

책 잘 읽었습니다.

하뉴녕

2011.05.21 12:28:46
*.171.69.149

제가 지금 책을 안 가지고 있는데...;;;

오타들이 좀 있죠.....2쇄에서 일단 오타 수정은 되어 나오고 내용이 약간 보강되어 2판도 나올 겁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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