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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좀비들의 세계와 뒤집혀진 정상성

조회 수 2953 추천 수 0 2011.03.17 18:57:29


어느 단행본에 들어갈 원고 중에 있었으나 빠꾸를 먹은 부분입니다. 제가 초고를 쓰고 최태섭 님 http://invisibleleft.khan.kr/ 이 다듬고 일부를 추가했는데, 다른 데 갈 데도 없으니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한편의 완결된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사정 때문이니 양해하삼....그리고 책 컨셉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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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진술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아직도 널리 애용된다. 가령 조석 선생의 <마음의 소리>를 감상할 때 “이렇게 웃기다니. 조석은 분명 영혼을 팔았어!!”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 악마들은 영혼을 구매하는데 시들하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너무 많은 청년들이 내세에 대한 걱정 없이 영혼을 판매대에 올려놓아, 그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혹은 그렇게 영혼을 판매대에 올려놓은 친구들이 기껏 세상을 매혹시킬 불멸의 재능 같은 것을 탐하지 않고, 소소하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배우자 및 자녀와 알콩달콩사는 삶을 요구하여 악마들이 지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더라는 전언이 있다. <데스노트>의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의 옆에서 “인간은 역시 재밌어!!”라고 말하는 사신의 모습을 보며 실재의 악마들이 집단 열폭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전해진다. 더 악랄한 농담으로는 어른들의 버전으로 윤색된, “요즘 젊은이들은 영혼이 없다더라. 그래서 우리에겐 희망도 사라졌다더라.”는 소문이 있다.


‘영혼이 없는 육체’에 관한 얘기라면 좀비가 최고다. 좀비 영화의 거장인 조지 로메로는 그의 ‘좀비 3부작’(<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새벽의 저주>(1978),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1985))을 통해 ‘영혼이 없는 육체’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1편에서 핵무기 방사능 오염과 생체실험의 공포를 표현한 좀비의 모습은 2편인 <새벽의 저주>에서 저 유명한 쇼핑몰에 잠입해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좀비의 모습으로 현상한다. 숱한 평자들은 이것이 소비 대중사회의 대중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비평했다.


잭 스나이더가 리메이크한 동명의 영화 <새벽의 저주>(2004)는 상황이 다르다. 여기에서 좀비는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쇼핑몰을 질주한다. 먹물들은 이 장면을 보고 얼떨떨했지만 상황은 간단하다. 오늘날의 소비대중은 먹물들보다 훨씬 빠르다. 잭 스나이더는 그 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영혼이 없는 육체’의 상징인 좀비가 점점 더 경멸의 대상에서 벗어나 인류를 대체하는 종족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지 로메로가 2005년에 발표한 <랜드 오브 더 데드>에선 이제 좀비가 지능을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된다. 확산되는 것은 인류가 아니라 좀비고, 세상을 점령해 나가는 것도 좀비다.


사실 이런 반전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조지 로메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리처드 매드슨의 전설적인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가 벌써부터 이것이니 말이다. 헐리우드에서 결말을 바꿔 영화화한 <나는 전설이다> 원작소설(1954)의 진정한 결말을 보자. 오랫동안 흡혈귀들을 살해하며 자신의 집을 지켜왔던 주인공 네빌은 마지막 순간에 흡혈귀들이 새로운 인류가 되어 하나의 사회를 구성한 것을 발견한다. ‘정상’과 ‘비정상’은 ‘다수’와 ‘소수’를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고, 오늘날의 ‘정상’은 그가 아니라 흡혈귀일 것이다. 네빌은 흡혈귀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면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가하면 에드가 라이트의 패러디 좀비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원 제목은 <숀 오브 데드>다. 참고로 숀은 주인공의 이름이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로 변해버린 수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스포일러를 하자면 이 좀비들은 사태가 진압되고 난 마지막 장면에서 단순 노동자로, TV쇼의 출연자이자 소재거리로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게다가 이 장면은 같은 장소에서 좀비처럼 활기 없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이 영화 첫 장면의 ‘정상인’들과 만난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좀비들이고, 영혼 따위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불금’으로 지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또 다른 패러디 좀비영화인 <좀비랜드>(2009)를 보라. 주인공은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족도 연고도 없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과거를 반추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좀비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전에도 주인공은 혼자 집에 쳐박혀 와우(WOW)나 하는 찌질이(혹은 긍지 높은 아제로스대륙의 얼라이언스 이거나 호드)였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빌 머레이가 주연했단 왕년의 <고스트버스터즈>(1984)에 나오는 트윙키라는 과자를 추억한다. 사회 시스템의 결함을 보여주는 ‘유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출동하던 이 유쾌한 민간인들의 전설은, 소련과 적대하던 시절의 국가, 여전히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던 한 시대를 증언한다. 그렇다면 좀비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이전에도 이미 우리의 ‘사회’는 붕괴해버린 것이 아닌가? 현실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소련)이라는 명확한 적대자가 있던 시절, 자본주의 세계의 국가들은 ‘아버지’가 되어 인민들의 삶을 직접 억압하고 보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벌이 사라지자 이제 인민의 삶은 그들 각자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된다. 변질된 스탈린주의의 유산이 핵과 재래식 무기로 무장하고 안보를 위협하는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한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북한은 삶의 수준에서 남한의 경쟁자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노상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북한으로 가버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고, 생존은 권리가 아니라(생존권 같은 건 없다.) 홀로 지켜내야 하는 질곡이 되었다. 더 이상 사회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영혼의 유무를 판별하겠노라며 나섰던 영혼감별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늘날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이미 뒤집어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이러스”에 있는 것이지만, 이 바이러스마저도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더 이상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가 된다. 이것을 보지 않고 좀비들에게 “왜 너는 좀비냐?”라며 설교를 하는 것은 소귀에, 아니 좀비 귀에 경 읽기다. 정이나 좀비들에게 경을 읽어주고 싶다면 우선 좀비 말부터 배우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너를 잡아먹겠다.”가 “아아아” 인지 “우우우” 인지 정도는 알아야 도망이라도 제때에 갈 텐데 말이다.




mah0140

2011.03.17 20:27:12
*.38.62.105

영혼 따위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불금’으로 지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ㄴ 이 표현 좋네요.

하뉴녕

2011.03.18 01:20:05
*.149.153.7

감사합니다...근데 그 문장은 최태섭씨가 가필한 문장임....ㅋㅋㅋㅋ

다시다

2011.03.18 10:45:31
*.124.106.137

자본가들은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노상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북한으로 가버려!”
- 독점이 만악의 근원이고 경쟁이 마법의 주문이라면 국가체제가 독점적으로 자본주의 하나인 사회체제 시장은 필연적으로 소비자를 우롱하겠군요.

하뉴녕

2011.03.18 11:19:47
*.149.153.7

음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고 경제체제가 자본주의인 건데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자본주의도 내부에 이질적인 요소를 품을 수 있죠. 뭐 이건 복수의 사회체제가 경쟁해서 개선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인위적으로 외부에 소비에트 연방같은 걸 만들 수는 없으니까) 체제의 룰을 구성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겠죠.

...물론 그와 별개로 한국의 기업 숫자 (인구 대비 기업수)가 적은 편이고 그 대부분이 몇몇 재벌기업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이 '개혁세력'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한 요인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으흐흥

2011.03.19 01:37:35
*.205.71.41

나는 전설이다의 오리지날 엔딩은 흠좀무...

조갑제의회개

2011.03.21 14:15:55
*.17.103.184

천안함 1주년을 맞이(?) 하여 일간지들이 관련 기사/사설을 내보냈는데 이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일을 재정리해달라고 하면 (뭔가 유의미하지 않을까..요) 하하.. 음.. 무리군요..ㅠ

하뉴녕

2011.03.21 14:27:45
*.46.33.167

으흑 또 뭘 시켜먹으려고....안해! 못해!!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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