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릴레이 인터뷰의 한 주자로 선정되어 인터뷰를 했을 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인터뷰 외적인 얘기라 반영되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에게’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진보적입네 하는 '어른들'과 기존의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있는 젊은이들 우르르 데려다가 훈수를 늘어놓는 것이 보통의 20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일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말하는 것인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없다면 그런 것을 이끌어내는 기획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오히려 언론의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가령 고시나 자격증 시험,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이들, 입사 원서를 수십 개씩 내는 이들을 그들끼리 불러내어 대담(혹은 잡담) 같은 것을 시킨다거나, 학벌이나 학력에 따라 다양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을 유형별로 불러내어 인터뷰 하거나 얘기를 나누게 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그나마 이런 것에 근접했던 것은 경향신문에서 언젠가 했던 “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 시리즈의 몇몇 인터뷰 정도였던 것 같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이런 기획을 지속적으로 하기에 쉬운 위치에 있는데도 그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찌됐건 누구나 20대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 그들에게서 그들의 처지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다음 인터뷰 주자를 추천해 달라는 기자님의 말에 나는 주호민 등 웹툰 작가들을 뽑았는데, 그 이유는 20대 글쟁이들에 비해서는 오히려 이 웹툰 작가들이 20대들의 삶과 정서를 더욱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웹툰 시장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글쟁이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관심사에 대해 발언하기 때문에 세대와 엮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엮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88만원 세대” 담론의 유행 이후에 자신의 모든 글을 “나는 88만원 세대다.”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글쟁이나 블로거들이 있는데, 예외도 있겠지만 그렇게 써서는 결국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얘기를 돌려 왜 다들 20대를 운운하면서 실제로 뻔히 눈에 보이는 평범한 20대들의 목소리를 수집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비정규직 현장에 뛰어든 20대나,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분투하는 대학생활을 보내는 지방대생 정도를 제외하면, 부모의 자산을 축내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20대들 일반을 여전히 ‘팔자 좋은데 무능한 놈들’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그들의 학벌이 ‘인 서울’ 정도라도 된다면, 더 이상 말을 들을 것도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애써 ‘말’할 만큼 시간도 없는 그들인데 분위기도 이렇다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였던 ‘학벌 사회’가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했거나, 가졌더라도 정교화시키지 못한 것이 현재의 담론상황이라 볼 수 있다. 세대론은 비교적 이것을 ‘나이브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정교하게 표현해야 할 시점에 어떤 이들은 세대론 자체가 오류라고 비난하는 형국이다.
프레시안에 88만원 세대론을 둘러싼 논쟁을 두고 장문의 글을 올렸건만 그 글의 논점이 무엇인지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하편의 경우 이택광이 직접 “20대 자질론 비판”으로 논점을 잡아주는 수고를 했지만, 상편의 경우에는 거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세대론에 계급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박권일의 말에 “그럼 그걸 계급이라 불러야지, 왜 세대라고 부르냐?”고 반응했던 자칭 좌파 몇 명과 변희재 등 빅뉴스 멤버들의 반응이 비판되지 않는다면 세대론을 조선일보스럽게 활용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물론 ‘그 좌파’들의 말은 “당연히 세대론이란 건 조선일보 쪽으로 가기 마련이고, 애초에 그렇게 쓴 게 잘못이었다.”라는 것일 게다. 그들이야 그렇게 말하면 논리적으로 일관되기나 하지 일부 우석훈 지지자들은 내 글을 비판하면 우석훈을 도대체 어떻게 방어할 셈인가. 논점은 다 날려버리고, “변희재를 진지하게 상대해준 네가 더 잘못했다. 그래서 세대론이 조선일보 흙탕물에 빠진 거다.”라고 우기면 만사형통인가? 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우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줬다는 이유로 비판한 것도 아니다.
박권일의 말을 빌리자면 “'불안정노동이 세대문제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건 주장도 아니고 그냥 사실명제”다. 불안정노동의 확산이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끼친다는 의미다. 세대론이란 것은 그런 현상들의 다발을 모아 구체적인 피해자 집단을 상정한 것이다. 이것을 죽어도 세대론이라고 칭하면 안 되고 계급문제라고 칭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내가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비판했던 것과 같은 난센스가 생겨난다. 모든 사회문제가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을 갖지 못하고 무조건 계급문제라고 불려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 한심한 논의를 보다가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아마도 2002년, 개혁국민정당의 창당 전후일 것이다. 훗날 노빠들과 척지게 되는 강준만도 이때는 개혁당 창당을 위한 지방순회 강연의 연사로 나왔고 그 강연 내용은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때 강준만은 너스레를 떨며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이가 좌파들이랑 불화가 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는데... 사실 그런 불화 없습니다. 가령 학벌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게 계급문제가 아닙니까? 이거 계급문제에요.” 2009년의 변희재가 타임머신을 타고 이 시대로 돌아간다면, “서울대 망국론이 계급문제라는 사실을 폭로한 강준만”이란 제목으로 그가 386 세대의 계급투쟁의 일환으로 학벌사회 문제를 제기했다고 규탄했어야 할 게다. 그리고 어떤 좌파들은 또 여기다 대고 “역시 학벌이라는 범주는 분석의 대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강준만 스스로 실토했다. 계급!!!! 계급!!!!!!!! 계급!!!!!!!!!” 3창하며 DDR을 쳤어야 할 게다.
부자 부모를 둔 어느 20대가 다소 학벌이 딸린다 해도 서민 부모를 둔 명문대생보다 잘 먹고 잘 살 가능성이 크다는 식의 반례가 ‘학벌사회’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지 않듯, 세대 문제라는 문제제기는 가능하며 타당하다. 물론 학벌사회에 비하면 세대라는 규정은 훨씬 더 느슨한 것이며 계층별로 구분된 더 세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좌파들의 계급성이란 것은 이런 분석을 수행하면서 드러나야지,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세대론이란 건 원래 우파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날 일이 아니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뭐 이런 얘긴가. 부르주아에게서 물질을 뺏어야 한다고 생각할 좌익들이 담론 영역에서는 모든 개념을 부르주아에게 갖다 바치고 우리는 ‘계급’이란 단어 하나만 지키면 족하다고 믿는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담론 시장에서 몸소 안분지족을 실천하는 그들의 청빈한 자세는 일견 고고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선에서 대립하는 이의 입장에는 짜증이 난다. 가끔 뒷통수나 치고 말이지.
박권일은 88만원 세대 담론에 한없이 가까운 이들이 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부 좌파들은 ‘그건 원래 우파 담론이니까 당연하지.’라고 반응했다. 사기치고 자빠졌네. 그럼 계급 담론은 경향적으로 ‘명문대생’이 많이 보지, 고졸이 더 많이 보나? 21세기 초 잠깐 대학가를 주름잡다 사라진 어느 극좌 학생정치조직은 명문대의 치의대생들을 구성원의 축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여하간 나는 88만원 세대 담론을 소위 명문대생들이 주도적으로 접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고졸 20대 블루칼라들이야 책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만, 88만원 세대론은 “너희들도 뛰어봤자 대다수가 비정규직이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학벌사회라는 것은 균질화된 학벌 엘리트들의 대다수를 대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고용해줄 때에나 성립하는 개념인데, IMF 이후 이 체제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삶도 더욱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은 사실상 ‘의자’로의 신규진입이 동결되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명문대생들조차도 몇 학번 선배나 그냥 졸업하자마자 아싸리 취직해버린 자신의 동기들에 비할 때 자신의 삶이 하늘과 땅 차이의 레벨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흔히 경험하고 있다. 이전에는 인문대가, 경제위기 이후에는 경제/경영대 출신들까지도. 말하자면 그들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이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어쨌든 니들은 좀 나은 편 아니냐고 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선배들’에 대한 이들의 열패감이야말로 세대 문제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사회문제가 만들어지는 문맥에서 이들이 겪는 사소한(?) 고난은 몹시 중요하다. 더구나 이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문맥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그래서 경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희망이 없는 그런 열패자들이다. 학벌사회의 승자이면서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물론 이 잉여인간들 밑에는 부속품 취급을 받게 된 사람들이 있다. 동희오토를 다녀온 박권일의 말에 의하면, 기대수준과 현실수준 사이의 괴리가 제일 크고 좌절감도 큰 집단은 명문대생도 고졸 블루컬러 20대도 아닌 지방대 출신 20대들인 것 같다고 한다. 괜찮은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지역에 원래 존재하던 괜찮은 소수의 일자리에 수도권 명문대 출신들이 상당히 유입되는 현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이 집단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가 되었다. 동희오토의 20대들 상당수가 사실 대졸 또는 대학 중퇴인데, 입사할 때 학력을 많이 속이고 있다. 회사측에서 지방대 졸업생을 고졸보다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라 한다. 과거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규직'같은 블루컬러라면 중간계급의 생활수준이 보장됐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모델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정된 학벌사회’에서 ‘혼란스러운 학벌사회’의 이러한 이행을 한국적인 맥락에서의 포디즘에서 포스트 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상의 생각은 박권일의 얘기를 대충 내 식으로 정리한 것이고, 내 기억으로도 그는 과거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짧은 글을 남긴 적도 있었는데,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88만원 세대>에서 이를 정밀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고 한다.
이런 정밀함의 한계가 아마도 이 책을 386타도를 위한 팜플렛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나오도록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는 향후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돌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언급한 세태를 통째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 담론이 이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20대들의 집단적인 침묵을 강요하는 현재의 세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오늘날의 젊은이들 일반에게 어떤 시련이 닥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토양에서 “20대들이 이러이러하게 자신들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를 요지로 하는 ‘20대 자질론’이란 악성 잡초도 자라나게 되는 것일 게다.
나같은 사람은 ‘20대의 목소리’를 낼 처지가 아니고 (먹고 살 생각을 하면 아득하지만 그 고민의 양상이 일반적이진 않다.) 그것들을 수집할 만한 물질적/정신적인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20대 자질론’이나 ‘세대론 무용론’ 등의 잘못된 담론 지형을 비판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쥔장의 글을 읽게 된 게 2005년 말경부터인데, 프레시안에 올린 상편의 글만큼 거칠고 격한 어투로 내달린 글은 처음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글의 논조에 동감은 했지만 평소의 냉정하면서도 차분한 어조와는 너무 다른 어투라 이 양반이 제대로 비위가 뒤틀렸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참 분열증적인 지식분자랑 논쟁하는 건 윤형님 취미생활인가요? 저 위에 언급하신 박모님도 윤형님도 제가 참 좋아하는 글쟁이인데, 가끔 넷상에서 보면 두 분이 분열증적인 지식분자들과 논쟁을 하는 모습을 몇 번 보게 되네요. 저는 작년 여름에 '이명박도 싫고 전교조도 싫다, 그러니까 나는 중용이며 중도며 킹왕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손가락 끝이 아프게 논쟁을 했는데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혼자만의 다짐으로 끝나버리던데요. -.,-
'20대 자질론'이나 '세대론 무용론'의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음의 효과 때문에라도, 어쩌면 더더욱 20대 자신의 이야기를 더 뽑아내고 그걸 갖고 무언가를 다루는 것이 '개싸움'을 유도하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싶네요.
<88만원 세대> 이야기를 그나마 하는 20대가 결국은 'in 서울' 대학 졸업생 혹은 재학생이라는 사실. 그건 그냥 사실이긴 한데, 그것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피하기 위해서도 어쩌면 'the others'가 말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지 않는 자가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김원씨가 여공들의 구술사를 추적하는 것도 좀 그런 의미의 동형성이 느껴지지 않나 하는데. 물론 지금 당장의 임펙트와 전술로 얼마나 유효한 지는 여러가지 면에서 검토할 필요는 있겠는데. 그래도 그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변희재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우석훈/박권일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 누구의 말이 아닌 '우리 이야기'의 담화를 끌어내서 그걸 담론으로 만들어 내는 시도가 없으면 그냥 '죽은 세대'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책을 내려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또 단순히 '20대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말로는 좀 컨셉이 불분명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거듭 고민해 봐도 쉽지는 않더군요. -_-;; 가령 20대들을 향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엔 시장이 불분명하고 (특히 이런 종류의 출판시장에선 20대는 거의 없는 마켓으로 친다능) 윗세대를 겨냥하다보면 그들에게 이해가 가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다가 징징거림으로 이해될 우려도 있고 말이죠...쩝. ;
단지 이러한 기획들과 시도들이 기획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디레이블의 굶는 밴드들이 음반을 홈 레코딩해서 찍어내는 것 같이 계속적인 시도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준에서 최종적인 완성품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면, 좀 다른 지평에서, 다른 담론 구조에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다만 한윤형님의 글을 눈팅으로 오랫동안 본 입장에서는 가끔 '구조적' 논의를 할 때 결과적으로 '회의주의'의 입장에 서게된다는 '느낌'(이건 단정을 못하겠네요. 아직 정확한 물증이 없어요? ㅎㅎ)이 좀 있구요. 조금 더 '되지 않을 창조적 삽질'에 대해서 응원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사회적인 구조의 약한고리를 뚫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어요.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가 되긴 하겠죠. 아직 내공부족으로 허덕허덕하고 있긴 하지만...
세대장사치
키보드 워리어를 자칭한 2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의 몇몇 블로거들이 88만원 세대론에 빙의되어 20대만이 하위 주체인 양, 자신들이 그 목소리를 대변하는 양 목소리 높여, 변희재도 싫고, 바바리 좌파들도 싫고, 와 20대 세대론 킹왕짱을 선언하는 그 장사질의 맥락이 이곳 저곳 끼지 못한 채 블로그질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만 하는 어떤 박탈의 순간, 세대론의 존재론적 이유를 체현하는 것처럼 보여요. 슬픈 일이죠, 세대론을 외쳐야 비로소 자기 세대의 결여를 증명할 수 있는 그 역설이.
'20대 문제'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잣대로 "1980년생부터 1990년생까지가 가장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건 아니죠. 그렇게 해서야 말도 안 될 것이고.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결방법을 강구하다보면 그 아래 세대도 혜택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봅니다만. 말하자면 20대 이하 세대는 (바꾸지 않는다면) 동일한 룰에 제약받는 이들인 거죠.
물론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하나의 담론이 개인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S 그리고 "변희재도 싫고, 바바리 좌파들도 싫고,"라고 말한 사람은 저 하나인데다가, 저는 "세대론 킹왕짱"이라 말하지도 않았으니 누구를 비판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이런 공짜글 블로그에 올려서 무슨 '장사'를 하는 것 같은지 한번 지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이쪽은 뻘밭이에요. 그나마 소소한 이득이라도 챙기려면 이글에서 비판했던 이들처럼 자신이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에세이를 쓰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 사회도 점차 고령화 사회가 돼가고 있지만, 젊은 세대가 뼈빠지게 일해 나이든 세대 먹여살리는 구조로 가기 마련이고 이게 어쩌면 소위 ‘복지사회’를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기도 한데요, 문제는 젊은 세대가 ‘뼈빠지게 일할’ 무대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닭과 달걀의 문제겠지만 그런 복지망이 제대로 안 돼 있기 때문에 돈이 좀 있는 기득권은 그걸 놓지 않으려 하며 20대들을 소외시켜 88만원 세대 문제를 가중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88만원 세대 문제가 심해지면서 결국 돈없는 나이든 층은 더욱 살기가 힘들어지고, 지금의 20대들 역시 나이가 들어서 결국 부모의 빈부 차이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부자를 제외하고 세대를 막론한 공멸이고... 결국 이게 문제이지 싶은데. ‘세대론’이 제기한 문제를 얼마나 더 발전적으로 확장시키느냐, 의 문제에 있어 지금은 좀 답보 상태로 보이기도 해서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요.
말씀하신 바엔 공감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더 이상 논의 진전에 힘든 상황이기도 하겠죠. 진보 쪽에서야 기존의 담론 플러스 청년들에 대해 다소 안배하는 정책을 얘기할 수밖에 없겠고, 사실 보수 쪽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야 하는데 (실행력이 있으니까) 그들은 변희재를 내세워 물타기를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죠.
그렇다고 20대들이 '당사자 운동'이란 걸 벌일 수 있는 형편도 아닌 것 같구요. 공감대 형성은 둘째치더라도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끼리도 운동에 대해서는 합의를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논의가 후퇴하는 정도만 막으면서 문제가 더욱 터져나올 때 사람들이 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언제나 '버티는 것이 진보'! -_-;;; )
조그만실천
근본적으로는 부동산 등 자산의 재분배 문제, 교육시스템의 재구성,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대책 -- 이 세가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이건 어차피 하루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최소한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동안에 고통받을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지만 -.-). 이른바 사회적 경제나 네트워크 경제의 이름으로 몇 가지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은 있지만, 이것조차도 '당사자운동'의 형식으로선 별 답이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일종의 멘토링시스템 같은 것들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부모한테 기대는 것보다는 사회적 멘토링이 그나마 약간은 나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사회적 경제나 네트워크 경제가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은 어차피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사회복지 등의 공공부문이나 디자인, 소프트웨어, 부품소재 등 혁신주도형 민간부문에서 작더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이게 한국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우파들이 기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한국 우파들은 정말 무능하지요... (좌파가 무능하다지만, 진짜 무능한 건 우파들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들이 기본적으로는 우파의 고민이라고 해서 저같은 좌파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좌파적 관점에서 원론적으로야 '피억압자의 단결'이 최우선이겠지만, 그 '단결'을 위해서도 억압받는 자로서의 자기각성을 위한 계기와 일정한 시간이 필수적이지요. 한국에서 좌파가 지리멸렬한 것도, 한국에서는 이른바 '계급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노동자라도 자식은 좋은 대학 보내서 신분상승을 이루겠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소망이거니와 그건 과거의 경험에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나와 똑같은 처지였던 초등학교 동창녀석이 집이나 땅 좀 사놓더니 어느새 떼부자가 되는 판이니 '부자에 대항해서 단결'하기보다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지요. 결국 계급적 단결이라는 좌파적 해법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적 경험의 축적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계급적 단결 만세'만 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한국자본주의를 혁신할 방법을 고민해야겠지요. 다만, 우파들이 자신의 본분에 더 충실하기를 바랄 뿐.
나도진빠
정해찬
즐겨찾기가 또 하나 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