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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예수 해석에 관해

조회 수 1650 추천 수 0 2007.06.22 16:58:13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니체전집 15) 상세보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책세상 펴냄
독일에서 출간된 <니체전집>을 완역한 책. 1888년 초에 니체가 집중하고 있던 문제 중의 하나인 데카당스,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는 작품 <바그너의 경우>,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과제를 염두에 둔 <우상의 황혼> 등이 수록되어 있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기독교에 대한 당대의 모든 비판을 니체 자신의 사상체계에 의거하여 집대성한 것이지만, 그리고 그 어떤 이보다도 강경한 어조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본인은 비판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 그러나, ‘비판받지 않는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사실 이 지점 역시 토론의 대상이 된다. 이 문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니체의 철학체계에 의거하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니체가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지막지하게 칭찬한다.



물론 예수에 대한 그의 칭찬에는 맥락도 있고, 이유도 있다. 니체는 복음(=기쁜 소식)에 대한 해설을 통해, 그리스도 자신은 그리스도교와 구별된다고 말한다. 복음은 내적 진실이며, 특정한 종류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의 본능의 결과”다. “ ‘복음’의 심리 전체에는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 보상이라는 개념도 없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가 없어졌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 기쁜 소식’이다.” 니체는 예수를 ‘백치’라고 부르면서, 그의 특성이 ‘적대하지 않음’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원수마저 사랑하는 그 순간 마음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기쁨, 그 기쁨에 대한 경험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 안에 있는 이가 그리스도교인이다. “오로지 복음적인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 복음의 실천이 가져다주는 지복의 경험이 ‘신적’인 것이다. ‘죄’, ‘죄의 사함’, ‘신앙’, ‘신앙을 통한 구원’ 등의 유대교의 개념은 부정된다. (<안티크리스트> 33번)



‘신의 나라’, ‘천국’, ‘신의 자식’ 등의 표현은 마음에서 느껴지는 그 희열, 내적 사실, 진리를 표현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인간 아들’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구체적인 개인을 넘어서 누구나가 그 체험에 언제든지 동참할 수 있다는 “ ‘영원한’ 사실, 시간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하나의 심적인 상징인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 ‘아들’이라는 말로는 만사가 총체적으로-변용하는-느낌(지복)으로의 진입이 표현되고 있고, ‘아버지’라는 말로는 이런 감정 자체가, 영원과-완성의-느낌이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나아가는 자가 아들이라 불리며, 그 나아가는 곳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버지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의인화하여 하나의 신화로 만든 것이 바로 교회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 ‘천국’은 마음의 특정한 상태이다.” “신의 나라는 마음속의 특정한 경험이다 ; 그것은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다.” (<안티크리스트> 34번)  



니체에 따르면 그의 죽음조차 그러한 삶의 실천이었을 뿐이다. “네가 그것을 느끼면-구세주가 답하기를-그러면 너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너 역시 신의 자식인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 또한 악한 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그를 사랑하라......” 법정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죽었다. (<안티크리스트> 35번) 니체는 대속론을 강하게 부정한다. 그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는 지극히 비정치적인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정치범으로써, 그 자신의 죄에 의해 죽었다. (<안티크리스트> 27번) 니체는 그의 교리가 교회를 위협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으로 몰려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중에는, 어떻게 이러한 예수의 교리를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왜곡했으며, 그 행위의 심리적 요인은 무엇인지를 서술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글의 논지와는 약간 동떨어진 것이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예수와 그리스도교를 분리하는 것, 한마디로 “예수 좋아, 바울 싫어.”의 8글자로 요약될 수 있다. 니체의 예수에 대한 찬양은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사실 나는 이것이 굉장히 개신교적인 감수성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철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질문을 돌린다. 니체의 예수 찬양은 니체의 철학 체계에 비추어 합당한가?



일단 <안티크리스트>의 특정 부분이 아무리 예수를 찬양하고 있을지라도, 이 텍스트의 전체적인 논리 전개에서는 예수 역시도 ‘데카당’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니체는 큰 틀에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예수 모두 동일한 정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중 가장 고급한 것으로 취급되는 예수의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접촉을 너무 심도 있게 느끼기에 더 이상의 ‘접촉’을 전혀 원하지 않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그것을 “모든 저항이나 저항하지-않으면-안 됨-을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불쾌로 (즉 해로우며, 자기 보존 본능을 말리는 것으로) 느끼고, 지복(기쁨)은 누구에게든, 악이든 악인에게든 더 이상은 저항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으로 알며-사랑을 삶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가능성으로 알고 있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사랑의 종교’가 수립된다. 니체는 이것을 “병든 토대를 갖고 있는 쾌락주의가 고상하게 발전된 것이라 부”르며, 이교도의 종교인 에피쿠로스처럼 전형적인 데카당이라 칭한다. (<안티크리스트> 30번)



그럼 그것들은 왜 데카당스(하강)라고 불리는가? 니체 철학 전체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이것은 크게 보아 고통의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도덕의 계보>)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고통이 존재한다. 니체는 그 문제에 굉장히 천착한 철학자 중 하나다. 그런데 문제는 고통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것이다. 니체는 ‘무엇을 위해 고통이?’라는 질문에 대해 ‘이것을 위해 고통이’라는 답으로서 변화가 없는 세계,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존재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심리적 근거라고 본다.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p125-128) 여기서 기독교의 ‘죄’ 이론도 나온다. 신에 대해 형벌을 받기 때문에 우리 삶의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근원을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동일한 것으로 판별했기 때문에, 니체는 기독교를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 외엔 무엇이 있는가? 니체는 기독교인과 상반되는 인간유형으로 고통을 긍정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인간은 항상 고통받는 인간이며 고통에 대한 긍정은 삶의 기본 특성이다. 삶에 대한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창조력의 긍정성을 보증한다.”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p112) 그런 맥락에서 니체는 <군주론>의 마키아밸리가 이상적 군주로 내세운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찬양도 아끼지 않는다. 들뢰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게다. 이 부분에서 들뢰즈는 분명 니체를 계승하고 있으니까. 사실 ‘고통에 대한 긍정’이란 말이 좀 애매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비판도 듣는다. “보다 더 알기 쉽게 말한다면 니체의 영웅이란 싸우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시빗거리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어슬렁거리는 이소룡이나 김두한,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의 극장이나 TV에서 넘쳐나는 조폭 영화에서나 찾으면 딱 알맞은 그런 인간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경탄의 감정을 품고 말하는 그리스적 명랑성이라는 것도 니체에게 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감각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p297)



이 두 인간 유형 사이에 예수가 있다. 불교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불교를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데카당 종교라고 칭하지만, 그리스도교보다는 백배는 더 실증적이라고 칭찬한다.(<안티크리스트> 20-23번) 그리고 예수의 복음이 사도들의 해석에 의해 ‘화음’이 된 역사를 추적하면서 ‘불교적 평화운동의 단초’가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한다. 그것들은 고통을 긍정하지 않고 탈피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데카당이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가상적인 원인을 제시하지 않고 그것을 탈피하기 위한 실증적인 원인을 제시한다는 점에선, 삶에 대해 원한감정을 쏟아내는 그리스도교와 다르다. 가령 불교는 신 개념도 없고, 죄 개념도 없이 단지 ‘고통에 대한 싸움’만을 말한다고 해석된다.(<안티크리스트> 20번) 예수의 복음은 고통에 대해 거리를 두는 실천이 얼마나 희열에 찬 것인지를 묘사한다.(<안티크리스트> 33-35번) 데카당이라는 것이 고통을 괴로워하는 감수성의 결과이며 허약함의 징후라면, 이들의 선택은 적어도 그 징후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는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생긴다. 위와 같은 해석을 한다면, 아무리 봐도 예수가 니체 철학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위인일 수는 없다. 단순화시켜 세 가지 종류의 인물을 상상해 보자.


1)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고통마저 삶의 일부분으로 긍정하고 힘에의 의지를 행사하는 사람.


2) 예수나 불교도처럼,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사람.


3) 형이상학자들이나 그리스도교도들처럼, 무언가 고통의 의미를 가상적으로 창조해내며 그를 통해 삶에 대한 원한을 퍼붓는 사람.




간단히 말하면, 니체는 1) > 2) > 3) 이라고 생각하기가 제일 쉬웠을 것이다. 어찌보면 1) ≥ 2) > 3) 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굉장히 독창적으로 생각하면 1) = 2) > 3) 까지도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예수와 불교가 비슷한 감수성에서 나온 대응일지라도, 불교는 사람을 ‘空’으로 보지만 예수는 사람을 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적어도 니체는 그렇게 봤다. 그 점에 착안하면 예수와 위버맨쉬의 동질성에 대해 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예수의 방식이 위버맨쉬가 되는 유일한 방편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려면 니체 철학을 싸그리 다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현실태는 그렇다. 니체가 체사레 보르자를 아무리 칭찬했다 하더라도, 그가 예수에게 가졌던 애정(혹은 애증?)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역사상 단 한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있었고, 그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유고집에선 역사상 단 두 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있었고, 그것은 예수와 니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니체가 예수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인물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밖에 없을 게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역사상의) 조로아스터와는 상관없는 가상적인 인물이요, 니체 자신의 이상적 자아다. 그러므로 니체는 오직 자신만을 제외하고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크나큰 사랑의 이유를 끝끝내 자신의 철학 체계 내에서 정합적으로 서술해 내지는 못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예수는, 니체의 ‘강자’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철학 체계 -비록 우호적인 입장에 선다면 그의 ‘강자’ 개념이 천박한 다윈주의는 넘어서 있다고 쉽사리 논술할 수 있겠지만- 가 붙잡을 수 없었던 니체 본인의 고귀한 품성의 귀환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백승영 선생님 수업 때 <안티크리스트> 발제를 맡게 된 경험을 통해 쓰게 된 글인데, 그래서 이 글에는 백승영 선생님의 인도를 받아 독해한 맥락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분의 견해와는 다릅니다. 아마 다를 겁니다. 구체적으로 확인은 안 해봐서...;;;


ghistory

2007.06.22 17:18:30
*.146.21.162

초보적 질문입니다. 니체전집을 번역하면서 '초인' 대신 '위버멘쉬' 라고 표기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하뉴녕

2007.06.22 17:23:04
*.176.49.134

니체철학의 그 개념이 '초인'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여러가지 대안을 검토해 보다가 한시적으로 원음표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대안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하더군요. 가령 '극복인'과 같은 조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이 역시 한 측면만을 말하는 거라서요.

미국에서도 '슈퍼맨'이나 '오버맨'으로 표기하다가 최근에는 그저 '위버맨쉬'라고 쓰고 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

2007.06.22 19:33:51
*.176.44.54

저랑 같은 학교이신것 같은데;; 좋은 수업 추천좀해주세요-헤헤헤

정통고품격서비스

2007.06.26 21:54:17
*.216.114.61

좋은 술집을 추천해 달라는 게 생산적이겠죠.

ghistory

2007.06.23 00:59:37
*.140.27.151

친절한 설명에 감사합니다.

sp butters

2010.05.31 16:03:37
*.252.203.19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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