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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승리자'에 대한 해석의 문제

조회 수 1640 추천 수 0 2007.04.12 13:19:31
철학자들의 투쟁을 순전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따져 보는 것은 그들 이론의 맥락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와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 그리고 트라시마코스의 승리자를 추인하는 성격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매우 잘 어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설파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니었고, '이기는 법을 가르친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오늘날의 직업에 비유하자면 변호사나 논술강사가 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는데, 아테네에선 누구나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으므로, '스스로를 잘 변호하는 법을 알려주는 구술강사'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이다.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미움을 산 까닭은 저 '이기는 법' 이외에 다른 인생의 기술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그런 주장의 필연적인 귀결로 자신들을 '지혜로운 이'(소피스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먼저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자신을 변호한다고 했을 때, 그 변호의 유능함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변호사의 역할은 유능한 형사의 역할과는 아예 범주가 다르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변호하는 능력'과 별도의 진실을 캐는 능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법'과 '진실'은 어쨌든 상식적으로는 별도의 영역에 속한다는 소크라테스의 통찰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이 시인의 추방을 말하게 된 상황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모든 발언은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알려지고 있으므로, 두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은 시인이 호메로스의 전쟁 시를 유창하게 낭송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하여, 그 시인이 유능한 장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선동의 능력은 필경 사람들에게 그의 자질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고유한 문제이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한 정당이 선거국면에서 정권을 잡는 능력과 임기에 정부를 운용하는 능력은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때에 정당이 후자의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전자의 능력을 키우는데 몰두하게 될 거라는 것.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법'과 '능력'이 어쨌든 상식적으로는 별도의 영역에 속한다는 그들의 통찰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대립항이 드러났다. 이기는 법과 진실의 대립항, 그리고 이기는 법과 능력의 대립항.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후자를 전자로 치환하는 이론이라 볼 수 있다. 즉, 그는 문제해결능력이나 여러 종류의 수행능력을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그에겐 전쟁의 진실을 파악하는 사람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이런 견해를 경험적으로, 또한 논리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 시대엔 논박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그의 '철인정치'론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다. 문제가 똑똑함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보다는 군주정을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수가 똑똑하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일개인이 똑똑하기를 원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건 지적 능력이 문제해결능력이나 여러 종류의 수행능력과는 별도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굉장히 논리적인 철학자는 하나의 거짓을 말할 경우 그 다음부턴 단 하나의 진실도 말할 수 없는데, 이런 이는 철학적으로는 굉장히 탁월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무능하다. 칸트는 일관성을 옹호하고 대중을 의식한 '관념들의 적당한 연합'을 비난했는데, 정치인은 일관된 이데올로기보다는 차라리 '관념들의 적당한 연합'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그렇다면 '똑똑함'의 문제는 끝난 것인가. 먼저 '이기는 법'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이 대립항에서,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된다."는 조선일보의 오만한 언명과, "홍보가 곧 정책"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홍보에 대한 철학은 분명 '이기는 법' 쪽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말들을 비판할지 몰라도 우리 역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나는 '이기는 자', 즉 '승리자'에 대한 관념이 이 말에서 지극히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저 말은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발화했던 곳, 즉 전쟁터에서나 쓸모 있는 말이다. 목숨을 담보로 승리와 패배를 명확히 가르는 투쟁의 공간에서라면 저 말이 쓸모가 있다. 문명 이전의 '이기적 유전자'들의 적자생존의 공간에서도 저 말은 쓸모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전쟁터'가 사회의 은유가 되어선 곤란하며, 사실 그런 은유는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라는 것은, 날 것 그대로의 폭력적 실재가 아니라, 특정한 이들을 '승리자'로 간택하는 하나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사회 제도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마저도 하나의 규칙이다. 가령 유럽의 기업들은 자국 내에서는 굉장히 친환경적이다. 그것은 그들이 한국의 기업인들보다 선량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친환경적 기업의 이미지를 높게 평가하는 '정치적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정치적 소비'가 없는 한국 땅에 와서는 그런 친환경성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발화에선 저런 규칙의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 여기서 그들은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어찌 그를 비난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어째서 다르게 말할 수는 없을까? "멍청한 자가 이긴다는 것은, 그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를 지지한 이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멍청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인 진실과 능력의 문제를 상기한다면, 우리는 옳은 것이나 강한 것을 가려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런 시스템을 갖추도록 견인해야 한다. 한 사람이 똑똑해지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면,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가 여전히 유지된다면,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는 여러 사람이 똑똑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일관성의 딜레마'를 손쉽게 넘어설 수 있다. 다수의 지성의 합의는 '관념들의 연합' 없이도 '관념들의 연합'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지성의 덫'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수의 멍청한 개인의 판단의 합이, 소수의 유능한 개인의 판단의 합보다 유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말일 수도 있으나, 부족하다. 우리는 "다수의 멍청한 개인의 판단의 합"에 만족하지 말고 다수를 똑똑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멍청함을 질타하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대중더러 똑똑해지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엘리트주의란 말인가. 엘리트주의자는 바로 대중이 멍청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인데. 그리고 여기서 똑똑함이란 건 분명 승리자와 다른 영역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의식에서 출발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승리자와 강자를 구별한 니체의 어법은 영원히 옳다. 비록 그가 현실세계의 승리자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전쟁터와 다윈주의를 호출하면서 강자를 찾으려 했던 것은 반문명적인 시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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