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연주의적 오류와 규범 윤리학

조회 수 2320 추천 수 0 2009.07.06 14:10:59
이미 얘기했듯이 진화심리학도들이 '자연주의'를 '오류'라고 외우고 시작한다면 그건 자기네 학문의 중립성을 보증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김에녹시아가 적절히 지적했듯 "강간하는 이가 남아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한 남성들의 유전자가 살아남기에 유리해서 전승되었기 때문이라능!"이라고 설명했는데 거기에 대고 "님 지금 강간을 옹호하나요???!!!"라는 반박을 들으면 매우 귀찮지 않은가. 이건 사실 진화심리학만 겪는 곤경이 아니다. 가령 과학도들이 경멸하는 라캉이론도 반-여성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면 라캉주의자들은 "여성 차별이 옳다는 게 아니라 남여가 불평등하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이라는 식으로 반박(혹은 설명)을 한다. 무언가를 해명하겠다는 이론들은 '자연주의'라는 세간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윤리학도들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우리 교과서 처음에 나와 있는데 말야. 자연주의는 틀린 거지? 맞지? 그런 거지??"라고 다른 분과학문 학생들이 묻는다면, 대답이 꽤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윤리학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말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학자가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개 동의하지만 ('대개'라고 쓰는 이유는 여기에도 동의 안 하는 학자도 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이나 인간 행동의 경향성으로부터 도덕법칙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뭐가 나쁘냐고 묻는 학자들도 많은 거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입장도 과학도들과 얼라이를 맺을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기서 또 난감해지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연주의적 오류냐는 거다. 


사실 엄밀히 말할 때 자연주의적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윤리학과 칸트 윤리학 정도다. 에녹시아킴은 뭘 알지도 못하면서 "규범윤리학이 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비-자연주의적인 규범윤리학은 당연히 가능하다. 가령 기독교 윤리학. 신이 시켜서 한다는데 거기에 자연주의가 될 게 뭐가 있나. 그러나 이건 신자들이나 동의할 소리니 접자. 남는 건 칸트다. 도대체 칸트는 어떻게 비 자연주의적인 규범윤리학을 만들 수 있었을까. 정답은 처음부터 그걸 의도하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학도들은 무어의 말을 인용하며 자연주의적 오류를 배우지만, 사실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가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한 건 흄이다. "내가 도덕철학자들 글을 계속 봤는데 말야. 왜 다들 인간은 이러이러하다고 하더니 갑자기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로 말이 바뀌는 거지?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대충 이런 얘기였다. 윤리학에서만 그런 건 아니지만 칸트는 흄의 글을 보고 "조때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수이성에서만 연역될 수 있는 윤리학 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칸트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규범 윤리학의 명제들은 자연주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공리주의 정도면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준칙에는 "쾌락은 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을 텐데, 그 전제가 왜 참이냐고 물으면 왠지 "사람들이 좋아하니껭"이라고 대답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원칙들도 구체적인 적용 사례에 오면 쾌락원칙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어차피 윤리라는 건 "...해야 한다"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더 재미있는 건 윤리적 이기주의의 경우인데, 이 이론은 "개인은 무엇이든 자신의 이익을 가장 증진시키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건 왠지 자연주의적인 것 같지? 근데 전제를 이렇게 깔면 언제 어느 때에라도 저 자신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국면에서는 인간이 협력하는 유전자를 발달시켜왔다고 말할 진화심리학과 부딪힐 수도 있는 거다. (사회계약론은 또 그 자체로 크나큰 논쟁거리이기 때문에 서술을 생략한다.)  


그래서 자연주의적 오류가 문제라고 하더라도 윤리학 이야기는 진화심리학과 정치평론의 관계를 다룬 본래의 논쟁과 별 상관이 없을 듯 싶다. 최재천처럼 "미토콘드리아의 모계전승 때문에 호주제는 폐지되어야 해!"라고 화끈하게 말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주장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너무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재미있고 들을만 하다. 원래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오류는 해악이 덜한 법이다. 그런데 정치평론의 영역에서 그렇게 화끈하게 당위론을 설파하는 경우가 흔할까.


윤리학에서 정치학이 곧바로 연역된다고 믿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란 것은 우리가 대개 알고 있는 그 윤리학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인데,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고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도 대략 지켜야 하는 덕목들은 이런 것들이 있을 텐데 이 덕목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어쩌고 저쩌고 반복학습으로 습관을 잘 들여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대충 이런 윤리학이다. 이건 규범윤리학인지 기술윤리학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너의 목적이 이거라면, 이런 걸 해야해."라고 조언을 해주는 셈이다. 칸트 선생님이 싫어하는 가언명령이다. 칸트의 생각처럼, 가언명령은 당위라고 보기 힘들다. 당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언이다. 대개의 정치평론도 그런 조언이거나, 혹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다. 사실 내가 병맛 진화심리학 평론으로 소개한 아이추판다 님의 글조차도 당위론을 말하고 있진 않다. 그는 남성 페미니즘을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으로 분석했지만, 사실 '과시적 소비'가 나쁘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정치평론도 대개 당위명제를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이 논의에 잘못 소환되어 고생하는 윤리학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겠다.


-께속-





파도소리

2009.07.06 20:59:56
*.98.176.162

좀만 바꾸면 딴지일보에 올려도 될 만한 글 같네요. 딴지일보 필진하면서 물드신거 아닌지 ㅋㅋㅋ

pinacolada

2009.07.06 21:11:24
*.190.2.100

"비밀글입니다."

:

아!

2009.07.06 23:48:53
*.154.102.232

이런 글 좀 자주 올려주소서~!! 넘 보고 싶었어요. 맨날 오락얘기만 하시다보니,(오락, 특히 스타는 기실 한번도 해본적없는 20대후반인지라..) 올 때마다 허탈(?)하였는데... 오랫만에 넘 반갑네요. 누가 이런 논쟁을 촉발했던간에 넘 감사할 정도입니다.

김용호

2009.07.09 17:08:06
*.168.140.118

스타 거의 안한 20대 후반 여기 추가~

위에 2chan 스레 펌한 것 보고 조금 동질감을 느끼긴 했지만

ivN6

2009.07.07 02:09:29
*.77.73.35

sein은 sein이고 sollen은 sollen일 뿐이지... 흐음...


그건 마치 경제학에서 명목은 실질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명제와도 유사하군... ㅋ


자연에서의 독립적인 변수를 독립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식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아 이건 사담에 불과하므로 씹어도 무방. 언젠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듯.)

흠...

2009.08.14 15:45:14
*.199.254.123

라캉지랄을 아직도 하고있었나요? 으아, 과연 사이비는 질기네.

흠...

2009.08.14 15:45:34
*.199.254.123

그냥 이딴 블로그 때려치우시는게?

하뉴녕

2009.08.14 16:02:12
*.49.65.16

...넌 뭐하는 놈이냐?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81 [작가세계] 문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부분공개) [9] 하뉴녕 2009-07-25 2253
980 [황해문화]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부분공개) [5] 하뉴녕 2009-07-25 1534
979 홍진호의 해리티지 우승을 기원합니다! [8] 하뉴녕 2009-07-21 910
978 블로그 글도 고칠 수 있다면 [15] 하뉴녕 2009-07-17 5865
977 스타리그 양대리그 현황 [7] 하뉴녕 2009-07-16 920
976 09. 07. 16 아발론 MSL 16강 김택용 치어풀 [7] 하뉴녕 2009-07-15 1114
975 [펌] 안경환 인권위원장 이임사 [11] 하뉴녕 2009-07-14 910
974 [딴지일보] 스타리그의 진정한 본좌는 누구인가? (4) - 잊지 마라, 0대 본좌 기욤 패트리를! [8] 하뉴녕 2009-07-13 42113
973 진보신당 청년학생모임 여름강좌 file [5] 하뉴녕 2009-07-13 860
972 오늘 해리티지 매치 예상 정리 [5] 하뉴녕 2009-07-13 878
971 두번째 책제목 이벤트 [64] 하뉴녕 2009-07-10 1161
970 박정석의 테란전 [7] 하뉴녕 2009-07-08 1083
969 [펌] 84의 전설 [8] 하뉴녕 2009-07-07 916
968 영원한 것은 없다. [5] [1] 하뉴녕 2009-07-07 842
967 우생학, 진화생물학, 그리고 대중적 진보담론 [24] [2] 하뉴녕 2009-07-07 1708
» 자연주의적 오류와 규범 윤리학 [8] [1] 하뉴녕 2009-07-06 2320
965 자연주의적 오류와 메타 윤리학 [7] 하뉴녕 2009-07-06 2357
964 비문의 문제 하뉴녕 2009-07-06 5719
963 관심 [2] 하뉴녕 2009-07-06 935
962 홍진호 2승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6] 하뉴녕 2009-07-04 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