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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연주의적 오류와 메타 윤리학

조회 수 2357 추천 수 0 2009.07.06 12:36:00

딱히 김에녹시아 님과 논쟁을 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말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해내는 잘못을 뜻한다. 최재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가 모계 유전되기 때문에 호주제는 자연에 거스른다'는 식의 발언이나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도 정글 자본주의가 최선이다'는 식의 주장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인문학은 역사를 빼면 다 무용한 것 같다."라고 느끼는 이과생이 왜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적 오류는 이과생들이 배우는 학문의 교과서 앞부분에 주로 등장하는 철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준칙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이 욕망의 문제까지 설명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별 쓸모가 없다."라고 믿는 과학도라면, 아무래도 자연주의적 평론을 지지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입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미삼아 그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을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서 일관성을 추구해보자. 에녹시아킴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니고 있는지는 이 논의에서 관심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가지고 있는 프레임에도 굉장히 많은 맥락의 인문학적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명제가 당위명제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두 갈래 길을 선택해야 한다. 1) 당위명제의 세계가 따로 있다. 도덕적 판단을 위한 학문이 따로 있다. 2) 당위명제라는 것은 애초부터 허상이다. 도덕적 판단이란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1)의 길을 가게 되면 윤리학을 별도의 분야로 존중하게 된다. 인문학이 아무래도 필요없다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더구나 그는,    


이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규범윤리학'이 '기술윤리학'보다도 더 오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도 말한다. (사실 이 진술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데, 그에 대한 맥락 설명은 다음에 하자.) 자연주의적 오류를 벗어난 당위명제의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2)이다. 2)를 메타 윤리학에서는 비인식설 non-cognitivism이라 부른다. 이 안에 정서주의emotivism도 있고 규정설prescriptivism도 있는 뭐 그런 분야다. 이것들은 모두 현대 논리실증주의의 산물인 도덕적 진술에 대한 의미론적 분석과 관련이 되어 있다. ('보통 인문대 학부생'인 나도 으례 그렇듯 이것들을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냥 대충 이해가 되는 부분만 읽은 정도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가 하면, 사실 과학도들이 좋아할 인문학 무용론의 관점들도 인문학적 논쟁의 지평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에녹시아킴의 태도가 일반적인 이과생의 태도라면, 이과생들은 자기들 교과서에 적혀 있는 철칙의 인문학적 문맥을 자세히 알지도 모르면서 그걸 신봉하고 그 틀 안에서 인문학은 무용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있는 철칙은 실은 인문학의 세계에 오면 철칙이 아니라 그냥 고유한 장점과 난점을 지닌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비인식설은 과학도들이 좋아할 만한 메타 윤리적 관점이다. 그렇지만 이건 과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다. 만일 에녹시아킴이 '자연주의적 오류'를 진화심리학의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견해'라고 믿기 시작한다면 이렇게 골치아픈 메타윤리학의 논쟁 앞에 나아가야 한다. 에녹시아킴은 이택광과 한윤형을 비판하면서 "이 사실 하나만 검증한다."고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도 간간히 드러내고 있다. 애초의 이택광 비판 글 말미에서 쓴 것들도 그렇고, 갑자기 뜬금없이 윤리학 얘기를 끄집어내는 걸 봐도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들이 참 만만찮은 작업(이라고 쓰고 뻘밭이라고 읽는다.)이며, 일반적인 상식인의 입장에서는 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이 글은 일단 여기서 맺어야 할듯. 
 


P.S "너희들은 그렇게 골치아픈 소리를 하니 과학이 아닌 거야." (누가 과학이래?)라고 말하는 이들을 위한 고전의 선물.


"우리의 논술은 주제가 허락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가지면 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논의에서 똑같은 정도의 정밀성을 구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출발점에서 논술함에 있어 진리를 대강 그리고 엇비슷하게 지적함으로써, 그리고 개연적인 일들을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논술함에 있어서는 개연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논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이와 똑같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 무릇 여러가지 사물이 각 영역에 있어서는 거기서 다루어지는 문제가 허락하는 만큼의 정밀성을 찾는 것이 교양있는 사람에게 합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직하기는 하나 확실하지는 않은 추리를 수학자가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면 수사가에게 과학적 논증을 요구하는 것도 똑같이 합당치 못한 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도입부에서

제발 교양을 가집시다, 여러분.

노지아

2009.07.06 15:35:59
*.145.62.53

왜 자꾸 논의를 확장시키냐는 옹알이를 듣겠군. ㅋㅋㅋ

솔직히 견적이 안 나오던데..
이택광의 견해가 완전히 새롭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아마 역비 아니면 윤해동의 저서 어딘가였던듯.

하뉴녕

2009.07.06 15:13:13
*.241.15.143

여기저기 쓰레기를 투척하시는 어린이가 울며 겨자먹기로 빗자루 들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엄마에게 "왜 자꾸 이 방 저 방 옮겨다녀?"라고 묻는 꼴. ;;;

2009.07.06 14:57:09
*.64.96.100

예를 들지 마세요. 에를 들면 논의가 확장됩니다! 예를 들지 마! 왜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확장시키는거야!

하뉴녕

2009.07.06 15:16:13
*.241.15.143

오오 탁월하다! 정말로 A님의 논리학 사전에는 "예시를 들면, 그 논의는 확장된다."고 쓰여 있는지도. ;;

ivN6

2009.07.06 15:29:17
*.152.97.247

좋은 마무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가 오늘 새벽동안에 썼던 트랙백을 이렇게 짧게 정리할 수 있다니 - _- 흥...

하뉴녕

2009.07.06 15:37:38
*.241.15.143

그 글 나름 좋았지만,

이런 것이 고전의 힘이라는 것이겠죠...(먼산)

세라비

2009.07.06 21:13:43
*.99.69.247

'문제가 허락하는 만큼'을 수학자가 하느냐 수사가가 정의하느냐에도 차이가 있겠지만, 수사가 A (또는 수학자 A)가 하느냐 수사가 B (또는 수학자 B)가 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는 있을거고, 그러기에 학문은 발전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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