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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안노 히데아키는 십년 전에 우리에게 빚을 졌다.” 1995년에서 1998년까지 구축된 ‘에반게리온 월드’는 그 안에서 숨쉬던 소년들에게 납득할만한 해답을 주면서 완결되지 않았다. 스스로 어지러웠던 설정과 캐릭터는 세기말의 사춘기 소년들의 현기증 나는 심사를 대변했지만, 그것을 해소해주지는 않았다. 전공투의 마지막 세대가 ‘신세기’를 기다리는 소년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그 실체가 묘연했다. 단지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모두 신지다.“라는 한마디 뿐이었다. ‘에반게리온 월드’에 신지의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소년들은 자기 자신이 바로 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지의 찌질거림과 부대낌 속에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을 거라고 믿은 소년들의 세월은 레이와 아스카의 사진과 함께 과거의 앨범 속에서 추억이 되었다.


난 죽어도 아스카빠다...ㅅㅂ


그리고 난해한 것은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위해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2007년부터 구축된 새로운 에반게리온은 자신이 소년들에게 진 부채에 대한 안노의 답변이다. 도대체 이 시리즈에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에반게리온 월드의 주민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이 극장판이 흥미로울 거라는 얘기는 안노의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던 상업적 조건이지, 그것의 본질은 아니다. 미사토상이 다음 편을 예고하기 전에 카오루는 달에서 지상을 향해 내려온다. “약속의 때다. 신지군, 이번에야말로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어!” 이것이 이제 거죽만 늙어버린 십년 전의 소년들에게 안노 히데아키가 하는 말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돌아왔다고...내가!!!

‘뉴 에반게리온 월드’의 미덕은 이 시리즈가 에반게리온 자신의 얄팍함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 년 전에 에반게리온과 소년들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의 고민 속에, 절망 속에, 그 찌질거림 속에, 무언가 심오한 것이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것을 파헤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접근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의 온갖 설정과 어지러운 캐릭터들 속에서 무언가 심오함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이제 내 핑계대고 찌질대지 마라...그럴 나이 지났다...ㄷㄷㄷ

그러나 심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고 이 시리즈는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안노는 신지와 겐도우, 레이와 아스카, 미사토와 리츠코와 카지의 욕망을 이해한다. 그네들의 욕망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노력만하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언가였다는 것을 이해한다. 자신의 고민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사춘기는 끝난다. 돌아온 에반게리온은 소년들에게 그때는 나도 너희들만큼 얄팍했었노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대사가 낯간지럽다고? 이건 원래 그렇게 간지러운 얘기였어. 이제 알 때도 됐잖아?”라고 에반게리온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를 욕망한다는 데 거기 무슨 심오함이 있니??


재해석되고 정리된 캐릭터 속에서 ‘서’에서 유지되던 본편의 이야기는 ‘파’에서 사정없이 무너진다. 이것은 어제 나온 에반게리온에 곧바로 이어지는 듯한 그 에반게리온이되 별도의 에반게리온인 것이다. 부채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상환될 수 있다. 아니 부채는 어떤 방법으로도 탕감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정서가 투사되어있는 그 인물들의 다른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곳에서 레이가 당신을 기다린다.



덧1: 아스카빠 입장에서는 아스카 첫 등장씬의 판치라가 사라진 것, (대신 본편의 -이번 극장판에도 나오는- 어느 장면을 패러디한 대체물이 있다.) 신지와의 “Shall we dance?” 에피소드가 사라진 것이 아쉬울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아스카빠가 결집하여 가이낙스를 테러하는데 찬성하지는 않는다. 아스카는 신지와 레이의 캐릭터와 관계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덧2: “아스카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단언 역시 더러운 레이빠의 뇌내망상에 불과하다고 아스카빠는 우기고 싶다. (근데 십 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또 싸울 때는 아니지 않나.) 오히려 아스카는 일종의 ‘남성 판타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신규캐릭터인 마리에 줘버리고 더 담백한 캐릭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무슨 캐릭터인지 납득이 된다. 일단은 다음 시리즈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겠다.

내가 뭐하는 년인지 궁금하면 계속 봐라..ㅇㅋ??


덧3: ‘서’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미사토의 비중을 높인 것은 시리즈에 매우 안정감을 부여하는 요소다. 미사토 자신의 캐릭터도 살뿐더러, 신지와 겐도우의 캐릭터나 관계 역시 매우 잘 해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파’에서 미사토는 적어도 두 장면에서 나를 울컥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대위가 아니라 중령이랍니다...우훗! 우후훗!!

덧4: 중간에 나오는 동요 BGM 두 번의 연출, 나는 매우 좋았다. 이게 왜 안 좋다는 건지는 좀 납득이 안 감.  


덧5: 아스카의 이름이 바뀐 것은 모두 알고 있겠지? 아야나미 레이,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 그리고 마키나미 마리. 여성 파일럿 이름을 대략 정리정돈(?)했다.


bloomfield

2009.12.05 11:48:02
*.171.54.60

최종전투 때는 에바가 아니라 무슨 용자물 보는 느낌이었죠 ㄷㄷㄷ;; "레이를 돌려줘!"라는 말이 신지 따위의 입에서 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이번 에바의 미덕이 자신의 얄팍함을 솔직히 드러냈다는 데에 정말 공감해요. 그 덕분에 신지도 레이도 다들 조금씩 어른에 더 가까워졌죠.

그나저나 카지 형님과 신지군의 (삭제)가 불발로 끝난 게 솔직히 좀 아쉽더군요(...)

하뉴녕

2009.12.05 23:43:46
*.49.65.16

신지와 미사토는 그야말로 괄목상대...

더구나 이번 겐도우를 보니 티비판 겐도우는 스스로도 철부지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우다리

2009.12.07 11:43:45
*.10.82.49

완구회사의 간섭이 싫다는 이유로 소년만화들의 전형적인 금형찍기 쉬운 로봇디자인과 전혀 다른걸 만들어냈고 그때문에 제작비가 쪼달려서 엉뚱하게 맥주회사같은 곳에다 스폰을 댔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tv판 에바시리즈 주인공들의 요상한 성격과 오덕소년들의 거리낌없는 신지에 대한 자기투사는 이런 뒷상황으로 인한 본의아닌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문에 신지가 시몬같아진 신극장판의 연출에서 일본 금형업체의 진일보한 기술력을 연상하게 되네요

그리고 열혈 용자로봇물의 전형성에 대한 반동의 상징이자 그 자체였던 신지의 내여자를 찾는 열혈연출에서 김영삼, 이재오, 김문수따위의 우파를 향한 퇴행성 행보도 떠오르구요

하뉴녕

2009.12.07 13:14:38
*.49.65.16

모든 '추억'은 결국 자본주의가 포섭하게 되지요. 심지어는 반지의 제왕과 1960년대도 그랬을진데, 에반게리온에게 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구요. ^^;;

신지의 캐릭터가 그렇다고 열혈 용자물로 돌아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퇴행'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신지가 정치적 대안이 없는 시대에 퇴행으로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어제 '서'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사실 신지의 '폭주'라는 건 히키코모리들이 고시원 방화를 하거나 신주쿠에서 무차별 살인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지요. 그 얘기를 내면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친구들을 불가해한 존재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것이 기성세대들의 주류담론이라면) 그렇다고 신지의 행위 자체를 추인할 수는 없겠지요...

저기

2009.12.05 13:56:11
*.140.58.28

스샷 어디서 구하셨어요? 디비디 화질 같은데

하뉴녕

2009.12.05 15:03:51
*.237.168.12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나오던데요...ㅎ

bloomfield

2009.12.05 15:56:47
*.171.54.60

근데 이번 극장판에서의 자막 보면 카츠라기 누님은 그새 또 승진해서 대령이 되신 것 같더라구요;;

하뉴녕

2009.12.05 23:44:19
*.49.65.16

아 맞다 그랬었군요 ㄷㄷㄷ 하긴 뭐 아스카가 대위이니...

Carrot

2009.12.05 20:56:06
*.128.181.44

얄팍한 욕망이랄 것도 없고 대사가 낯간지러울 것도 없고 저게 그냥 사람 사는 모습들 아닌가요, 물론 애니메이션적인 과장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서 전 <에반게리온 : 파>가 반갑습니다, 정말.

안노 히데아키는 좀 진작에 솔직해졌어야 했어요, 제길. ㅠㅠ

하뉴녕

2009.12.05 23:43:08
*.49.65.16

동감입니다 ;;

레이빠

2009.12.05 21:39:36
*.41.254.106

카오루의 저 대사 ( "이번에는 행복하게 해주겠어" )나 아스카 성이 바뀐것을 두고 이번 시리즈가 무한 루프 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엔드오브에바에서 인류 멸망한 후 다음이야기가 에반게리온 파 란 이야기죠.

하뉴녕

2009.12.05 23:42:49
*.49.65.16

만화 내적으로 보면 그게 맞는 이야기죠. 바닷물이 뻘건 것도 그렇고...

kritiker

2009.12.06 10:04:19
*.208.160.247

제길제길제길제길얼른봐야하는데;ㅁ;!!!!!

fdk91

2009.12.06 18:58:30
*.216.101.141

보고온 사람으로서, 정말 잘 쓴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맛에 에반게리온 봤는데 정말 그렇게 어려울 필요는 없었던 거죠. 물론 처음에 보고 난 다음에 뭐야?! 하긴 했지만...인물들간의 감정선 확실해지고 엔딩크레딧 후 다음편 예고편까지 보고 나서 작품에 대한 만족도랑 상관없이 계속 극장에서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죠///

그나저나 아스카빠로서 솔직히 이런 전개는 슬프긴 함...

하뉴녕

2009.12.07 03:24:41
*.237.168.12

얀데레 레이와 해적왕 아스카....쿨럭 ;;;

쿠르세

2009.12.07 17:23:27
*.149.185.199

더..덕후같아!! 하지만 멋있어!!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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